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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77)화 (77/220)

Chapter 10. 신념과 현실 사이

76화

파티의 첫 춤이 시작되기 전, 귀부인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눴다. 아직 대공 부부가 등장하지 않아 뒷말도 드문드문 이어졌다.

“어머, 역시 황제 폐하가 오시기 직전에 들어올 모양이에요.”

“그러게요. 그래도 수도에서는 첫 데뷔와 마찬가지 아닌가요?”

“대공 전하는 그렇다 쳐도, 대공비는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았잖아요.”

나엘라가 명문가인 마호세르디의 영애임에도 아프다는 이유로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았기에 다들 수군대었다.

사실 많은 이들이 나엘라의 데뷔탕트를 기다렸다. 첫째인 단제는 근위대 소속이라 사교계 진출을 할 수 없었고, 둘째인 다나한은 수도에서 데뷔했으나 마호세르디령을 오래 비울 수 없다는 핑계로 수많은 영애를 거절한 채 사라졌다.

그러니 다들 나엘라의 데뷔탕트만을 기다렸다. 마호세르디와 인연을 만들 유일한 기회였던 것이다. 많은 귀족들이 수도든 마호세르디령이든 언제고 참석할 의사가 가득했다.

어떤 의미에선 마호세르디령에서 데뷔탕트를 열게 된다면 더 좋았다.

실제 마호세르디의 재력과 명성이 자자한 검은 방패 기사들을 직접 볼 기회가 아닌가. 보안이 워낙 철저해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 본 사람이 없었기에 직접 가는 것을 더 반기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엘라는 아프다는 핑계로 데뷔탕트조차 치르지 않는 바람에 당시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하길래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 있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 때문에 어떻게든 흠집을 잡겠다는 의도로 이를 악물고 온 이들도 있었다.

하일모라는 그들을 보며 추한 질투심이라고 생각했다.

나엘라의 행동은 마호세르디기에 할 수 있는 행동임을 모두 알고 있으리라. 공작이 그만큼 커다란 힘을 갖고 있으니 나엘라 또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남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칠 때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일모라가 아는 것을 이들이라고 모를까. 하지만 그녀들은 꾸역꾸역 추한 마음을 감추고 나엘라를 깎아내렸다.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 전하와 나엘라 노헤스카 대공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홀의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소리치자 장내가 일순간 조용해지며 모두 한곳을 바라보았다. 대공 부부가 등장해 홀을 걷는 순간에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하일모라는 그 이유를 알기에 내심 뿌듯했다. 누가 봐도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부부였다. 나엘라의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와 체드란의 무감정한 시선이 굉장히 잘 어울렸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란 말은 저 둘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사람들 사이로 나는 길을 따라 마호세르디 공작에게 다가간 그들이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입이 열리고서야 그나마 얼어 있던 분위기가 풀렸다.

“저 목걸이는 뭘까요?”

“아, 저게 그 대공 전하가 선물했다던 목걸이 아닌가요?”

“대공 전하가 하고 계시는 망토 체인은 뭐죠?”

“저도 처음 보는 디자인이에요.”

그 짧은 시간에 액세서리까지 모두 훑어보았단 말인가. 다들 참 눈도 좋았다.

그런 마음도 잠시, 옆에 있던 이들이 하일모라에게까지 동조를 바라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 봤을 때도 차갑다는 느낌이 들어서 부부 생활을 걱정했는데 오늘 보니 더욱 그렇네요.”

하일모라와 베르에티가 나엘라를 만나고 온 바로 다음 날 보란 듯이 황후의 티 파티가 마련되었다. 귀부인들의 궁금증이나 풀어 주라는 황후의 뜻이기에 그녀도 망설임 없이 얘기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소문은 돌기 마련이니 하일모라가 직접 말하는 것이 나았다.

자신이 얘기하는 건 괜찮지만 남이 얘기하는 건 싫은 느낌?

외모는 예쁘다는 말없이 차갑게 생겨 부부 생활이 걱정된다고 말하니 티파티는 금세 활기를 띠었다.

황후가 중간에 따로 불러 어땠냐고 묻기도 했다. 시킨 것은 잘하고 왔느냐는 물음이겠지만 어떻게 단 한 번으로 환심을 살까.

더군다나 직접 나엘라를 보게 되는 날 자연히 깨닫게 될 일이었다. 호락호락 넘어갈 인물이 아님을.

그래서 하일모라도 의심받지 않을 선에서 친목을 다져 놓고 다음을 기약했다고 전했다. 그러한 이유로 한동안 호사가들 사이에서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했음을 나엘라가 알까 모르겠다.

“제국의 주인,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드십니다!”

모든 이들이 행동을 멈추고 들고 있던 잔이나 음식도 빈 테이블에 모두 내려놓았다.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내리자 느긋하게 황제와 황후가 들어왔다.

하이힐과 구두 굽 소리가 조용한 장내를 채웠다. 단상을 지나 푹신한 카펫을 밟는지 소리는 금세 사라졌다. 숨소리조차 없이 무거워진 공기가 내려앉았다.

고요함은 황제가 자리에 앉아 첫마디를 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모두 고개를 들라.”

성대를 긁어 내리는 듯한 음성은 사람의 심상을 죄었다. 저 기묘한 목소리는 황제가 황위에 오르기 전, 독을 먹고 변한 것으로 유명했다.

모두가 고개를 들자 황좌를 꽉 채우고 있는 황제가 보였다. 늙고 주름진 얼굴을 해도 여전히 눈빛만은 형형했다.

황제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반질거리는 눈동자에 몇몇 이들은 무례임을 알면서도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기까지 했다.

그런 황제의 옆에는 올려 꾸민 붉은 머리에 가발을 달아 잔뜩 부풀린 황후가 있었다. 가발과 머리 사이사이에 얼마나 많은 장신구를 꽂았는지 셀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과하기 짝이 없는 화려함이 또 황후와 매우 잘 어울렸다.

황제와 황후를 따라 황태자 데테로아와 파르로시 황녀도 들어왔다.

데테로아는 약혼자조차 없기에 황실 파티가 열릴 때면 매번 파르로시의 에스코트를 억지로 떠맡았다. 본인이나 파르로시가 결혼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데테로아는 매번 오물을 참아 내는 기분이었다.

황후나 파르로시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황후를 뒤에 업은 파르로시가 지엘라를 오래 괴롭혔기에 데테로아는 치를 떨며 싫어했다.

데테로아와 파르로시까지 자리에 앉자 황제가 손을 들었다. 악단의 음악이 바뀌며 첫 춤이 시작되는 신호다. 순식간에 파티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제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는 황제는 매번 인사말을 건너뛰고 바로 첫 춤을 시작했다. 첫 춤이 끝나야 알현을 받는 것이다.

황제는 자신에게 알현하는 내용을 다른 이들은 못 듣기를 바랐다. 그래서 춤이 계속 이어지는 중간중간에 알현을 받아 왔다. 악단 음악 소리에 묻혀 말소리가 들리지 말라고.

역대 황제 중 유별나다면 가장 유별난 황제였다.

하지만 귀족들끼리 이 대화를 알지 못해야 황제에게 있어 귀족들을 조종하기가 쉬웠다. 귀족들이 서로를 의심하길 반복할 테니까.

어느새 첫 곡이 시작되고 대공 부부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중앙으로 향했다.

하일모라도 그 모습을 보며 남편을 찾았다. 잠깐 다른 이와 얘기를 하러 나간 남편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첫 곡을 추는 동안은 모두 대공 부부를 바라볼 테니 이 틈에 잠시 자리를 비우자는 생각으로 남편을 찾으러 나섰다.

홀 근처의 복도로 나간 그때, 어느 시녀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가만히 보니 황후를 보좌하는 시녀였다.

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황후의 뜻을 조용히 전해 왔다.

“대공 부부 알현이 끝나면 대공비를 2층 휴게실로 데려오라는 전언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귀족 알현은 직급대로 순서를 가진다. 황실 다음은 대공이니 가장 먼저 대공 부부가 될 것이다. 그다음은 황제의 오른팔 마호세르디 공작이 되겠지.

대공과 공작이 자리를 비울 틈에 2층에 마련된 황실 전용 휴게실로 나엘라를 데려오라는 의미였다.

이유를 몰라 불안하던 찰나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이쯤 되면 보여야 할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하일모라가 손톱을 깨물던 그때 저 멀리서 세레노피 백작이 다가왔다.

“하일모라, 왜 나와 있어요? 날 기다렸군요.”

다정하게 웃는 남편을 보고서야 하일모라는 긴장이 탁, 풀렸다. 그리곤 울상을 지었다.

“무슨 일 있어요?”

세레노피 백작이 놀라 다가오자 하일모라는 응석을 부리듯 그의 품에 안겼다.

“큰일이에요. 나엘라가 곤란해질 것 같아요.”

하일모라의 말에 백작은 놀란 눈을 했다. 하지만 대답은 백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죠?”

부드럽지만 무게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에 하일모라는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백작의 뒤에서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3황녀 지엘라였다. 여전한 미모와 눈부시게 빛나는 백금발, 또렷한 갈색 눈동자까지. 황실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던 모습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엘라 황녀님.”

하일모라는 지엘라와 마호세르디에서 몇 번 본 적이 있기에 반가움이 밀려들었다.

“잘 지냈나요? 이제는 그대도 나도 영애가 아니네요.”

눈은 조금만 접고 입꼬리만 올리는 지엘라 특유의 웃음이 사르륵 번졌다. 언젠가 나엘라가 따라 했던 그 웃음이었다.

“힘든 일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돌아온 지엘라에게 잘 지냈냐는 물음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팔려 가듯 결혼한 것을 안다 해도 부부 사이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으니 마냥 돌아온 것을 환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힘든 일이라…… 결혼 생활이 조금 더 힘들었네요.”

사별이 쉬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 한마디로 지엘라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는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이가 있었다면 언급하지 않았을 테지만 하일모라와 나엘라의 사이를 알고 있어 지엘라도 꺼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두 분이 같이 오셨나요?”

하일모라의 남편과 지엘라가 함께 나타나 하는 말이었다.

“들어오는 길에 황녀님을 뵈었습니다.”

백작의 말에 지엘라의 입꼬리가 진해졌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 때에 그녀가 짓는 표정이었다.

“파티가 열린다는 말에 속력을 좀 내었더니 아슬아슬하게나마 도착했군요. 그런데 둘 다 계속 황녀라고 부르네요? 저도 제국을 떠난 것이 매우 아쉽습니다.”

사별했다고 하나 결혼까지 한 부인에게 부르는 호칭으로는 적절치 않았다. 그런 일들을 겪었다지만 지엘라는 여전했다. 나엘라가 어려워한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하일모라는 따로 변명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대공비가 곤란해진다니, 무슨 말이죠?”

번개보다 빠르게 하일모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앞에 있는 이는 지엘라였다.

황후나 파르로시의 초대를 받지 않고도 황실 전용 휴게실을 들어갈 수 있는 지엘라!

생각지 못한 뜻밖의 지원군에 하일모라는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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