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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78)화 (78/220)

77화

나엘라는 체드란의 팔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걸었다. 손을 단단히 받쳐 주는 팔이 느껴졌다.

천천히 단상 위로 시선을 올리자 이곳을 바라보는 황제가 보였다.

사람을 옭아매는 듯한 시선, 꼿꼿하고 단단한 자세.

우습게도 눈매를 제외하고는 체드란과 황제는 놀라울 만큼 빼닮았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저 눈매 때문일까.

높은 곳에서 깔아 보는 시선이 나엘라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곳에 올 적 마차 안에서 체드란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 것인가.

황제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복종하듯이 굴까, 아니면 조금 당당하게 나서 볼까.

황제는 너무 충성심을 보여도 의심할 인물이다. 더군다나 공작과 똑 닮은 외모의 나엘라이니 스쳐 보기에도 절대 무던해 보일 리 없었다.

그렇다고 도전적으로 굴면 경각심을 느낀 황제가 나엘라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으려 들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두 사람의 결론은 시선을 피하지 않으나 복종할 것이었다. 황제가 적이라 판단하기 전에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황제가 무언가를 느낀다면 그만큼 철저히 알아볼 테니 말이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군.”

그의 목소리는 가까이서 들으니 더욱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사람의 목소리가 저렇게 목을 긁듯이 나올 수 있을까.

“제국의 주인을 뵙습니다.”

체드란의 인사를 따라 나엘라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다시 허리를 폈을 때 황제 근처에 서 있던 근위대장, 단제가 보였다. 제 큰 오라버니는 황제의 소속이기에 마호세르디의 승계권조차 포기해야 했다.

권력을 가지면 황제를 오롯이 보필할 수 없다고 했던가.

나엘라의 눈에는 전부 황제의 술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대가 공작의 막내딸이군.”

“제국의 주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가의 축복은 체드란에게만 내려져 나엘라가 황제를 제대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공작이 그대를 그리 애지중지하였다지.”

“진즉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몸이 허약했던 걸 어찌하겠나.”

내용만 본다면 한없이 자애로운 황제였다. 뱀처럼 그녀를 살피는 시선과 삐뚜름한 입꼬리가 없었다면 말이다.

“어렸을 적 큰 충격을 받아 병치레가 잦았습니다.”

“그대의 어머니 얘기군.”

그 일 이후 단제조차 한동안 마호세르디를 오갔으니 자연히 황제도 알 이야기였다.

“그래도 이리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되어 다행이로군.”

나엘라는 황제의 말에 입술을 깨물지 않도록 감정을 꾹 내리눌렀다. 인사치레로 들릴 법한 말 속에 숨겨진 뼈를 그녀는 찾아내었다.

정말 마호세르디를 아꼈다면 이제는 아픈 곳이 없는지부터 물었을 테니까.

“그래, 이제 인사도 나누었으니 그만 가 보게. 오늘의 주인공들이 아닌가.”

체드란과 나엘라는 깜짝 놀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근처에 있던 황후부터 데테로아까지 모두 마찬가지였다.

요즘 노헤스카는 어떤지, 두칸의 조짐은 이상한 점이 없는지 간단히라도 물을 줄 알았건만.

보통 안부 인사 이후 황후, 황태자, 황녀의 순으로 인사를 잇는다. 작위상 파르로시는 건너뛸 수 있을지 모르나 황후조차 기회를 차단하다니.

이건 명백히 황후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후가 언짢은 기분을 표시하며 챠르륵─ 부채를 펴곤 입을 가렸다. 우그러지는 표정을 숨기기 위함인 듯싶었다.

황제의 얼굴엔 속셈을 알 수 없는 미소만 떠올라 있었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황제가 가라니 어쩌겠는가.

체드란과 나엘라는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전하고는 물러나야 했다. 대공 부부가 물러나는 모습에 공작이 왜 이리 빨리 끝났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나엘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가만히 걸음을 옮기던 나엘라는 이를 악물었다. 이것은 황후를 무시하는 처사도 맞았지만 그보다 먼저 다가온 것이 있었다.

이것은 경고일지도 몰랐다. 체드란과 자신에 대한 경고.

황제에게 가장 중요한,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패는 언제나 마호세르디다. 그러니 대공 부부의 인사를 제대로 받아 주지 않는 것으로 노헤스카조차 언제든 쳐낼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약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심지어 얼굴 한번 보여 주지 않던 가장 좋은 약점이 사교계에 발을 떼었다. 그러니 때를 놓치지 않고 황후와 대공 부부에게 한 방씩 먹인 것이다.

나엘라는 꾸역꾸역 화를 삭이며 제 생각이 비약이길 바랐다. 예민함이 극에 달해 억지스러운 생각을 한 것이길 바랐다.

그저 황후를 무시하려 했던 것이라고.

꼭 그래야만 할 것이다.

나엘라가 모든 준비가 끝나기 전에 일정을 앞당기고 싶어지려고 하니까.

*

대공 부부는 공작의 알현이 끝나길 기다리며 홀 한쪽에 섰다. 황제 측 인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눌까 생각도 했지만 일단 뒤로 미루었다. 어쨌든 마호세르디에 가장 큰 힘을 실어 주는 것이 나았다.

그래서 홀에서 등을 돌린 채 잠시 둘이 대화를 나누는 티를 내며 상황을 살폈다.

“수도 첫 파티라고 해서 제가 너무 많은 기대를 했나 봅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나?”

“머리에 만두를 올리고 있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나엘라의 거침없는 표현에 체드란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녀의 표현대로 만두를 올린 듯한 이들은 모두 황후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머리카락 색처럼 화려한 것들이 잘 어울리는 황후는 틀어 올린 형태도 꽤 잘 어울렸다.

문제는 그게 유행을 타면서 많은 이들이 도전하였는데 어울리지 않는 이들은 모두 만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 뒤로 유행이 식는 듯했으나 다시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황후가 만두 머리를 한 이들에게 칭찬 한마디씩 던지며 관심을 줬기 때문이다. 그녀의 관심을 받으려면 만두 머리를 해야 한다는 불문율까지 있을 정도였다.

“만두 말고 다른 흥미로운 것은 없나.”

나엘라는 곰곰이 생각하다 슬쩍 연회장을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찾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가 다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건 체드란이 생각해도 문제였다.

한번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한 디자인을 골라 댔다. 그 디자인을 고르지 않으면 유행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할 정도니 모두 흡사한 형태를 고수했다.

“누가 더 잘 어울리냐의 싸움이지.”

“아무도 안 어울립니다.”

사교 시즌이 당겨지며 잘 사용하지 않던 원단들이 마구 사용된 것이 문제였다.

유행을 탄 디자인이면 체형별로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무슨 원단이나 장신구를 쓰는 것이 좋은지 정보가 있었을 텐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디자인이 아니라 원단이 유행하는 바람에 죄다 비슷해진 것이다. 모두 보온을 대비해 제작된 도톰한 원단에 소매가 긴 디자인이었다.

이러니 어깨를 훤히 드러내고 소매도 날려 버린 나엘라의 드레스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원단조차 얇아 홀로 계절을 앞선 덕에 자연히 오늘의 주인공은 나엘라가 되었다.

“내일부터는 다들 추위를 이 악물고 참고 있겠군.”

나엘라의 드레스가 유행할 거라는 말이었지만 알아듣지 못한 그녀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추우면 이불 속에 들어가거나 따뜻하게 입지 뭐하러 추위를 참는단 건지.

“혹한기 훈련에는 다들 추위와 전쟁을 벌이는데 여기는 사서 고생하는군요.”

대체 혹한기 훈련이 웬 말인가.

체드란이 조금 떨떠름한 눈으로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전쟁터에 살았던 자신도 이 상황에 나올 말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래서 귀부인들이 기사들의 이야기를 지루해하는군.”

“왜요?”

“사교계를 훈련과 비교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도 알아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다행히 본인도 안 어울리는 비유였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소소하게 말장난 치는 중인 두 사람을 모르는 다른 이들이 흘깃거리며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대공 부부에게로 한 여인이 다가왔다. 단숨에 하일모라를 알아본 나엘라는 표정을 유지하며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또 만나는군요, 세레노피 백작 부인.”

차가운 나엘라의 말에도 하일모라는 싱긋 웃었다.

“이렇게 또 뵙게 되어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대화를 걸 순간만 재던 이들은 대공 부부에게 먼저 다가간 사람을 보곤 말을 꾸욱 삼키며 집중했다.

“대공비 전하, 혹시 바쁘지 않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체드란은 제외하고 둘이 얘기 좀 나누자는 요청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일모라가 황후와 친분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도 있던가. 그녀가 쉬이 움직일 사람이 아님을 잘 아는 이들은 머릿속으로 황후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군요.”

보는 이들이 많은 곳에서 하일모라가 자신을 찾는 데에는 오로지 그녀의 뜻일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당연히 대공비가 단번에 자리를 비울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 공작의 알현도 끝나지 않았다.

“뵙고자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일모라가 명분을 던졌다. 황후도 생각 없이 나엘라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자리를 비운 황후와 대공비를 보고 무슨 말이 오갈지 모를 리 없다. 어쩌면 황후는 그저 나엘라를 골탕 먹일 수 있다는 기분에 들떠 있을 수도 있었다.

결국,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이곤 체드란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나 없다고 놀고 있지 마요.”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가는 절 두고 체드란만 공작과 돌아다니며 편하게 파티를 즐길 걸 생각하니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체드란에게 억지웃음을 한 번 지어 주고는 하일모라를 따라나섰다.

둘은 연회장 옆에 붙어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타고 2층으로 향하니 그곳에는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황실 휴게실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싼 태가 나는 문짝에 나엘라는 헛웃음이 나왔다.

둘이 휴게실 앞에 서자 기사들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문을 열기 직전 그녀의 시야 속에 살짝 걸린 하일모라는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응접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마음을 놓은 듯 어깨를 내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하일모라가 먼저 소파에 풀썩 앉았다. 상석은 비워 놓은 채 나엘라도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지쳐 보이는 하일모라의 모습에 나엘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이야?”

“뭐가?”

“다들 나한테 숨기던 거, 오늘 공개하는 거냐고.”

제가 물어봐 놓고 나엘라는 난감하다는 듯 볼을 긁었다. 하일모라가 눈에 띄게 굳었기 때문이었다.

“나엘라…… 그래, 눈치챘겠지. 그런 김에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

“뭔데?”

“다들 너의 뒤에 있다는 걸.”

잔뜩 긴장한 듯한 하일모라의 모습에 나엘라는 살며시 웃음을 터트렸다.

“체드란도 그러더니…… 내 뒤에는 사람 참 많아.”

왜 자신의 앞에는 아무도 없는지, 나엘라는 문득 의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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