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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79)화 (79/220)

78화

“황실 휴게실은 방음이 좋으니 걱정하지 마.”

하일모라의 너스레에 나엘라도 어깨만 가볍게 으쓱였다.

“황후는 널 지치게 할 의도로 늦게 올 수도 있겠네.”

파티의 주인공인 대공비가 빠지면 황후가 더 돋보일 테니 하일모라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래도 나를 위한 선물을 숨기고 있을 테니 황후는 신나서 달려오지 않을까? 몸이 근질근질하지 않겠어?”

나엘라의 말을 듣자마자 하일모라는 납득했다. 놀라울 만큼 가능성 높은 가정이었다.

황후를 몇 번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녀의 습성을 이리도 잘 아는 걸까. 하일모라의 눈에 나엘라는 봐도 봐도 신기할 정도로 사람에 대해 잘 알았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늦지 않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마마 드십니다.”

황후를 따라다니는 시녀인지 문 앞에는 없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엘라와 하일모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자 황후와 시녀 세 명, 그리고 파르로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랜만이라 해야 할까, 그날은 제대로 인사를 못 한 터라 마치 처음 보는 기분이군.”

처음 보는 것처럼 인사를 해 달라는 걸까, 아니면 그날 왜 이리 일찍 갔냐 타박을 하는 걸까.

의도를 알고 싶지 않은 언사에 나엘라는 그저 평범히 답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후 마마.”

살라만 부인의 장례식장에서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을 전하지 못했으니 나쁜 인사는 아닐 것이다.

딱히 대꾸 없이 황후가 상석에 앉았다. 뒤를 따르던 파르로시가 그 오른쪽에 자리해 하일모라는 나엘라의 옆으로 이동했다.

시녀들이 황후를 호위하듯 의자 뒤에 빙 둘러섰다. 압박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해 나엘라는 속으로 혀를 찼다.

“혼자서 다 오고, 용감하네.”

파르로시의 입에서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조용히 말하긴 했지만, 휴게실이 워낙 고요해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

나엘라는 별생각 없이 무시했다. 들었던 이야기도 있고, 다시 보니 황후를 빛내기 위한 장식품 같다는 생각이 더 깊게 들었다. 싸움을 원하는 이에게 굳이 관심을 줄 필요도 없고 말이다.

얼마 후 찻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트레이가 준비되자 시녀들이 나서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웃기는 것은 황후와 파르로시 황녀의 잔만 놓였다는 점이다.

저는 그렇다 쳐도 하일모라는 무슨 죄인가. 아니면 하일모라도 함께 무시해 같은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고 싶었나.

이유야 어찌 됐든 하는 짓이 너무 유치해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대놓고 척을 지자 행동하는 셈이다.

“수도 생활은 어떠한가.”

황후가 차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나엘라는 문득 체드란에게 이 꼴을 보여 주고 싶었다. 진짜로 뻔뻔한 태도란 이런 것이다.

“아버지께서도 계시고, 많은 분들이 잘 챙겨 주셔서 불편함은 전혀 없습니다.”

대공 부부가 공작을 따라 황제파와 만났다는 것은 황후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다.

“그렇군.”

자꾸만 뚝뚝 끊어지는 대화에 준비한 것이나 얼른 내놨으면 하는 심정이 크게 부풀었다. 대화도 제대로 안 나눌 거면서 뭘 그리 뜸을 들인단 말인가.

나엘라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자 파르로시가 눈을 치켜떴다.

“황후 마마께 안부라도 묻는 것이 어떠한가.”

저런 완벽한 하대를 보았나. 예법을 가르친 이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은 알려 주지 않았어도 하대하는 법은 가르쳤던 모양이다.

“황실 사람이 아닌지라 황실 예법이 미숙한 점에 대해 양해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황녀님께서 예법을 조금 알려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분명 존댓말인데 미묘하게 기분이 나쁜 말투였다. 그것을 여실히 느낀 파르로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호세르디에서는 예법조차 안 가르쳤는가! 대공비가 되어 창피한 줄 알아야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파르로시 때문에 나엘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옆에서 혀를 쯧, 차는 소리가 들렸다. 파르로시가 말렸음을 황후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녀 쪽이 더 노련했다.

“먼저 양해를 구하고 배움을 청한 이에게 이리 소리를 지르실 줄 몰랐습니다. 차 한 잔도 내어 주지 않으시기에 저를 좋아하지 않으신 줄은 알았는데…… 그래도 제가 대공비라고 생각은 하고 계셨군요.”

황실에서는 소리 지르며 대화하라고 가르치는지 자신이야말로 묻고 싶었다.

귀족 간의 대화는 예법을 지키는 선에서 가식과 물어뜯기의 싸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대공비임을 아는데 기본적인 예의부터 지키지 않는 태도는 어찌 봐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대공이라는 자리가 보통 황제의 형제에게 내리는 작위임을 모르는 걸 수도 있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체드란이 황태자의 형제임을 일부 인정받아 대공이 되었다고 한들, 어쨌든 파르로시의 윗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예로부터 황실의 법도는 가장 큰 어른이 가르친다. 파르로시의 말 한마디로 나엘라가 왜 대공비가 되어 황실 예법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지까지 올라간다면 황후에게 화살이 갈 내용이었다.

파르로시의 입에서 더 폭탄이 떨어지기 전 황후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쯤 하면 되었다. 대공비도 가족끼리 그러는 것 아닐세.”

아주 난리도 아니란 말이 나엘라의 목구멍에서 걸려 다시 내려갔다.

황후는 체드란의 새어머니 행세를 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반박하기도, 말을 더하기도 귀찮아 사과 하나 없이 입을 다무는 것으로 끝냈다.

파르로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나 황후도 더 긁어 부스럼 만들 생각은 없는지 그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늘 수도에 올라온다더니 조금 늦는군.”

혹 황후도 누군가를 기다린 걸까? 그녀가 흘끗 시선을 돌리자 한 시녀가 다가와 고했다.

“시간 맞춰 오신다고 했으니 곧 도착하실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황후에게 한 번, 뒤로 다시 물러서는 시녀에게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렸다.

이쯤 되면 나엘라도 궁금증이 가득 차올랐다.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황후가 어떤 말도 없이 잠자코 기다리는 것일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호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방 노크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황후 마마의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길래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갈색 머리에 다정한 미소가 매력적인 한 인물이 천천히 걸어와 앞에 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엘라 님.”

나엘라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에스토……?”

에스토 시론.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웃던 친구의 등장이었다.

*

“드디어 만났겠군요.”

공작의 표정은 미동이 없었으나 음성에는 걱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연회장에 도착하자마자 2층 휴게실로 향하던 에스토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엘라는 괜찮을 겁니다.”

묵묵히 있던 체드란이 입을 열었다.

소중한 이의 배신이 나엘라에게 어떤 충격을, 얼마나 큰 충격을 가져다줄 것인가.

다른 사람에 비해 오래 봐 오진 못했으나 그는 대공비로서 누구보다 단단히 선 나엘라를 알았다. 그녀는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다. 체드란은 나엘라를 믿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자리를 옮기려는 공작에게 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나엘라를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나엘라를 믿는 것과는 별개로 충격을 받았을 마음이 걱정되었다.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혼란스러운 그녀를 제일 먼저 맞이해 다독이고 싶었다.

적어도 곁에 제가 있음을 잊지 않도록.

“그럴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공작의 눈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황제와의 알현을 끝내고 2층 휴게실로 향하는 지엘라가 보였다.

“지엘라도 이야기를 들은 모양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말하자 공작도 한시름 놓은 듯했다.

“지엘라 황녀님께서 나엘라를 많이 아꼈으니 괜찮을 겁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체드란은 공작을 바라봤다.

“지엘라가 그녀를 아꼈습니까?”

“몰랐습니까?”

“제게는 그런 말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열다섯 이후로는 전쟁터에만 전전해 기회도 없었고요.”

“황태자 전하께선 황실에 함께 머무르셨으니 알고 계셨나 보군요.”

황태자에게 지엘라에 대한 이야기를 곧잘 들었기에 공작은 체드란도 알고 있는 줄 알았다.

“둘 사이는 어땠습니까?”

체드란은 나엘라에게 직접 물으려 했으나 여러모로 신경 쓰다 보니 꺼내지 못했다.

작게 미소를 지은 공작이 계단을 올라가는 지엘라를 바라보았다.

“황녀님께서 나엘라를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그건 아꼈다고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지 않습니까?”

“내내 검밖에 모르던 아이를 데리고 많이도 돌아다니셨지요. 하일모라와 나엘라가 친해진 계기도 황녀님 때문이었습니다.”

체드란은 일전에 위험했던 하일모라를 구해 준 적이 있다던 나엘라의 말을 떠올렸다.

“그게 지엘라 때문이었습니까?”

입을 열려던 공작은 근처를 지나는 사람을 보곤 잠시 뜸을 들였다. 다행히 장인과 사위의 대화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간혹 동선이 겹쳐지는 사람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황녀님께서 소풍을 가셔야겠다며 나엘라를 끌고 나갔으니까요.”

나엘라를 따라다닐 적 하일모라는 지엘라가 애인인 줄 알고 난리 친 적도 있었다. 하필 지엘라가 다나한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해 더 그랬다.

“지엘라가 정말 나엘라를 좋아하긴 했군요. 호불호가 확실한 스타일이라 좋아하지 않았다면 말도 걸지 않았을 겁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엄청 귀찮게 굴고요.”

“허허, 다나한을 좋아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그럴 것 같았습니다.”

공작에겐 조금 씁쓸한 이야기였다.

지엘라와 다나한을 강제로라도 혼인시켰다면 그녀는 적어도 지금보단 행복하지 않았을까?

황실에 너무 치를 떨었던 자신이 문제였다. 다나한이 그녀를 받아 주지 않았기에 핑계를 대었다.

어쩌면 다나한도 황실 사람이란 이유로 지엘라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걸 수도 있는데.

이제껏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버티는 다나한을 보니 더욱 씁쓸했다.

“그런데 나엘라도 지엘라를 좋아했습니까?”

체드란의 질문에 공작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라가 어디 가자는 대로 소풍에 나설 아이입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다며 체드란은 수긍했다.

“머리가 좋은 아이니 모두가 함구했어도 어려서부터 알았을 겁니다. 황실이 마호세르디의 적이라는 걸.”

그래서 나엘라도 지엘라를 마냥 좋아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밀어냈을 수도 있다.

훗날 적이 될 거라는 생각에.

“자기 마음은 잘 모르는 아이니 말입니다.”

왜 하필 머리가 그리 좋아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세상일을 너무 빨리 알아 버렸다. 어른의 일은 어른의 일로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늘 그것이 안타까웠다.

못다 한 말을 겨우 삼키며 공작은 체드란을 바라보았다.

“그럼 대공 전하께서는 나엘라를 기다리고 계십시오. 딸아이가 저렇게 고생하는데 아비가 되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을 보내려던 체드란은 문득 나엘라가 가기 전 남긴 말이 떠올랐다.

“나 없다고 놀고 있지 마요.”

왜 하필 그 말이 떠올랐는지. 마냥 기다리지도 못하게 생긴 체드란은 멋쩍게 웃었다.

“같이 가겠습니다.”

계단이 보이는 곳 주변에 있으면 될 것이다.

체드란은 그 뒤로도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는 내내 2층을 바라보았다. 나엘라를 기다리고 있음을 눈치챈 귀부인들이 또 하나의 소문을 부풀린 줄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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