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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80)화 (80/220)

79화

“나중에 서로 결혼하고 나서도 친구인 거다.”

언제가 들었던 에스토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던가.

분명 결혼 따윈 할 생각이 없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랬던 저는 결혼을 했고, 에스토는 황후의 옆에 서게 되었다.

“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후 마마.”

에스토는 우아하게 인사를 올린 뒤 파르로시의 옆에 앉았다. 그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러워 마치 예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놀란 나엘라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후는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오랜만이군, 시론 경.”

황후에 이어 파르로시도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는 에스토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일모라까지 인사를 건네었다.

“저번 티 파티 때 뵈었죠? 오랜만이네요.”

하일모라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엘라는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시론 경.”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통했을까. 다행히 나엘라는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아직은 괜찮았다. 이 정도는 오랜 가신이 황후의 옆에 있어 놀란 정도로 내비칠 수 있었다.

아니,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

에스토는 왜 저기 있지? 황후는 무엇을, 또 자신과 에스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거지?

괜찮은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둘이 친구 사이라고 들었는데. 둘 다 서로 존댓말을 하나?”

알고 있었구나, 우리가 친구인걸.

황후의 눈이 반달로 접히며 웃음이 퍼졌다.

알아서 부른 거다. 알아서 이날을 기다린 거고.

“황후 마마의 앞인데 그래도 예를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스토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한없이 따사로운 웃음에 나엘라는 마호세르디에서 함께 대련하던 그 시간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대공비도 그리 생각하나?”

황후가 나엘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황녀님께 예법을 지적받았는데 어찌 친구라고 한들 함부로 말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말이 좋게 나가지 않았다. 정신이 없다 못해 멍하단 표현이 더 걸맞았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말게나.”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선 에스토의 멱살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무슨 생각이냐고.

대신 다른 말을 뱉었다.

“알겠습니다. 그냥 넘기도록 하지요. 그런데 황후 마마─.”

웃으며 돌려 말하는 사교계의 예법대로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한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정신을 차린다고 차리는데 혼이 나간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래도 이상하게 웃음은 나왔다. 나엘라의 마음속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 내 것을 건드렸는데 내가 왜 참아야 하지?

나엘라는 더는 좋게 얘기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상대는 적이다. 잘 보일 필요도, 친목을 다지는 척 웃을 이유도 없는 적이었다.

멍청하게 굴었다. 체드란조차 황후에게 곱게 대하지 않았는데 내가 뭐라고.

“오늘 보니 황제 폐하와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 마음이 놓였습니다. 다정한 두 분의 모습에 저 또한 감명받았습니다.”

오늘 대공 부부의 앞에서 대놓고 무시를 받았는데 나엘라가 그것을 먼저 꺼낼 줄은 몰랐겠지.

황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파르로시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에스토 쪽은 시선조차 주지 않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낮아진 황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티가 났다.

그것이 고깝고 즐거웠다. 왜 즐거운지는 모르겠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리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 아쉽게도 내가 폐하와 사이가 좋지 않네.”

황후 또한 돌려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모르는 이는 없다. 다들 쉬쉬함을 황후도 알고 있었다.

“혹시 다툼이 있으셨습니까? 그래도 금방 나아질 겁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황후가 미소를 거두자 뒤에 있던 시녀들마저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황후와 나엘라가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숨이 막히는지 작게 심호흡을 했다.

“내가 꼭 그만하라는 말을 해야 관둘 텐가.”

황후가 이렇게까지 경고하면 대부분의 이들은 넙죽 조아리며 사과했을 터다. 아무리 눈치 없는 이들이라도 그 정도는 했겠지.

“나엘라 님이 마호세르디에만 계셔서 황실 사정은 잘 모르십니다.”

나엘라를 잘 아는 것처럼 에스토가 덧붙였다. 너무 언짢아하지 말라며 황후를 달랬다.

동시에 나엘라에게도 그만하라는 호소였다. 하일모라도 그런 에스토를 거들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좋은 마음으로 하신 걸 겁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엘라는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지금 한 사람에 대한 분노, 실망, 의문으로 가득 찼으니까.

에스토의 선택이 황후라면 나엘라는 기꺼이 그의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 주리라.

그래서 황후의 기분 따위를 염려에 둘 생각이 없었다. 천천히 움직이려던 계획도, 여러 수를 두고 움직이려던 태도도 함께 날려 버렸다.

어쩌면 훗날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그날 이후 나엘라의 생에 이만큼 감정이 요동치던 때도 없던 것을.

“파르로시 황녀님께서 자유분방하게 구시기에 황제 폐하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구나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부부의 사이도 물어 뭐하겠습니까.”

파르로시가 헉, 숨을 들이쉬는 게 보였다. 그녀의 버릇없음을 지적함으로써 황후가 한 소리를 들은 셈이다.

이때까지 감히 황녀를 지적한 사람은 없었을 터. 그러니 저런 성격이 됐을 게 분명했다.

정말 화가 났는지 황후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대공비, 잘 생각하고 말하지 그러나.”

이럴 때조차 품위 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교양을 잃었단 말은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대가 내비친 행동 하나에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까지 나엘라는 곧잘 깨닫곤 했다.

어릴 적 살라만 부인에게 괴롭힘을 받았다고 했으니 제대로 예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주변을 보고 따라 하며 살라만 부인에게 지적받지 않도록 이 악물고 노력했겠지.

그렇다고 그녀에게 연민을 갖고 싶지도, 이쯤에서 물러날 생각도 없었다. 목구멍에 충분히 생각하고 말했다는 대답이 올라와 내뱉기 직전이었다.

황후를 부숴 버리고 싶었다. 나엘라가 알던 자신이 아닌 것처럼 감정이 격랑 속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지엘라?”

그 무례한 자를 당장 내쫓으려 입을 열었던 황후는 뜻밖의 인물에 멍하니 이름이나 내뱉었다.

백금발의 긴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기고 옅은 화장을 한 지엘라는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로 살며시 웃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새어머니.”

“새어머니?”

황후는 황당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게 됐으니 황후 마마라는 딱딱한 호칭은 거리감이 느껴질 듯싶어서요.”

지엘라는 여전히 예법의 표본 같은 자세로 천천히 걸었다.

“대공 전하를 그리 아끼신다고 들었는데, 설마 저는 딸이 아니라 여기시는 건 아니실 테죠? 저는 이리 반가운데 환대해 주지 않으시니 서운합니다.”

지엘라는 정말로 반가운 것처럼 웃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여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황후도 웃었다.

“나를 그리 친애하는지 알았다면 결혼하기 전에 많이 아껴 줄 것을 그랬구나.”

“지금이라도 아껴 주시면 되지요.”

“……지엘라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지. 내 먼저 조의를 표해야 했는데 정신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황후 마마께도 안 좋은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살라만 부인과 그리 각별한 사이셨는데…… 마음이 아픕니다.”

황후의 미소가 싹 걷혔다.

지엘라의 시선과 황후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살벌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닐까.

“그런데 왜 이리 급히 들어왔는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무례를 탓하자 지엘라의 미소가 진해졌다. 제대로 된 대답조차 없이 황후가 말을 돌렸으니 지엘라의 승리였다.

“반가운 마음에 행동이 앞섰나 봅니다. 이럴 땐 황후 마마께 예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당시 페트론 오라버니의 일로 심신이 매우 힘드셨을 테니 이해는 합니다.”

이렇게 연달아 황후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자니 새삼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봐줬는지 나엘라는 알 것 같았다.

제가 알기로 대놓고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은 지엘라의 성향이 아니었다. 황실의 예법대로 눈치가 없는 이라면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돌려 말하는 게 그녀의 화법이었다.

그래서 알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데 대공비 전하와 귀부인께는 왜 차도 내주지 않으셨나요? 금방 갈 손님들인가요?”

방 안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금방 가실 분들이라면 인제 그만 파티를 즐기심이 어떨까요? 오랜만에 본 황후 마마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가족 간의 이야기인지라…….”

명백한 축객령에 황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서 빈틈을 잡아챈 나엘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뻔히 차도 주지 않은 황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황녀님께서 오셨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나엘라는 예법을 지켜 인사를 전하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지엘라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황후만 바라보고 있었다.

휴게실을 빠져나가는 데 저를 따라 하일모라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호위병들에 의해 탁,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엘라는 천천히 걸었다. 턱을 당긴 채 허리에 힘을 주고 일자로 걷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엘라…….”

밖을 지키던 몇 명의 하녀와 호위병들이 지켜본다는 것을 알기에 나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평생의 다짐만 계속 되새겼다.

그럼에도 이리 마음이 허한 이유는 소중한 사람인 에스토가 저곳에 있기 때문인가.

작게 실소를 내뱉고 싶었는데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나엘라, 에스토는 있잖아…….”

하일모라가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하일모라에게는 나엘라가 곧 터질 것 같은 폭탄처럼 보였다.

“괜찮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한 번도 소중한 사람 중 하나가 적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기에 에스토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정말 괜찮은 거야?”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다. 에스토와 하일모라까지 셋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잊은 적 없다. 그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남은 평생도 친구일 거라고, 그렇게 믿어 왔다.

“아니, 안 괜찮아.”

꼿꼿이 앞만 보고 걸으며 나엘라는 제 안에서 무언가가 산산조각 깨어졌음을 느꼈다. 그저 허물어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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