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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81)화 (81/220)

80화

계단을 내려와 1층 홀에 도착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체드란이 곧바로 다가왔다.

“지금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나엘라의 말에 그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돌아가면 말이 나올 테지만 몸이 약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뒤에 서 있던 하일모라가 다가와 나엘라의 손을 살짝 잡았다.

“최대한 빨리 저택에 방문할게.”

하일모라가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괜찮다는 말조차 이제는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 공작에게 가 먼저 돌아간다는 인사를 건네고 황궁을 빠져나왔다.

저택에 도착하자 놀란 사용인들이 뛰어나왔다. 다행인 건 그들도 나엘라를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너무 지쳤다는 핑계를 대고 나엘라는 방에 들어가 그대로 잠들었다. 체드란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하녀들이 밤새 오갔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밤새워 뒤척이다 깜박 잠이 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어제 일어난 시간과 같은 새벽이었다.

비가 내리는지 창문 밖에선 추적추적 빗소리가 들려왔다. 나엘라는 그대로 일어나 방 한쪽에 감춰 두었던 검을 꺼냈다.

체드란이 선물해 준 검에 아직 이름도 붙이지 않았었구나.

생각이 물꼬를 틀어 마음을 담아 보낸 검이 떠올랐고, 자연히 그 검을 가지고 있을 에스토가 뒤를 이었다.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엘라는 찬 비를 맞았다.

딱히 피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되레 몸을 젖어 들게 하는 빗물이 좋았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저택 구석에 마련된 작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호위 기사들이나 가끔 쓰도록 만들어진 곳이라 대공령의 연무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았다.

그래도 이곳을 사용하는 이들은 전부 대공령에서 함께 온 기사들이니 말이 새어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린 나엘라는 눈을 감았다.

어느새 빗줄기가 강해진 것인지 사방이 빗소리로 가득 찼다. 너무 조용한 것보다는 시끄러운 게 정신을 집중하기에 효과는 좋았다.

세상과 공간을 단절시키고 오직 검만이 존재하는 듯 집중하는 것이다.

작게 숨을 뱉은 나엘라는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마호세르디의 검법은 화려함이나 묵직함보다는 정교함과 속도에 맞춰져 있었다. 검 손잡이에서 날 끝까지 조절할 수 있어야 정확한 궤도를 만들 수 있는 검법이었다.

집중한 채 조금씩 휘둘러지던 검이 점점 빨라졌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그 길을 존중할 겁니다.”

소중한 사람이 배신하면 어떻게 할 건지 묻던 지엘라에게 내놓은 자신의 답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자만인 줄 모르고.

“나는 너의 그런 신념이 좋다.”

에스토는 그렇게 말했다.

“너는 너의 신념대로 살아. 널 배신한 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날 배신한 이가 본인이라면 어떻게 할 건지 물었어야 했을까.

에스토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아직 이유도 몰랐다.

지금 당장 아버지를 찾아가 에스토가 정말 황후의 편이 된 것인지, 그게 시론 후작이 죽은 것과 관련이 있는지를 물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은 왜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걸까.

에스토가 배신한 것이 사실일까 봐?

아니면 그 이유에 시론 후작의 죽음이, 마호세르디가 관련이 있을까 봐?

마호세르디가 관련이 없다면 대놓고 적이 됐을 리가 있을까.

만약 아버지에게 확답을 받으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엘라는 검을 조금 더 빠르게 휘둘렀다. 검에는 상념이 들어 있어선 안 됐다. 그러니 더욱 빠르게, 더욱 정확하게 휘둘렀다.

자꾸만 올라오는 생각들을 지우려.

*

체드란이 눈을 떴을 땐 아침 식사 시간이 막 지났을 때였다. 밤새 꼼짝 않는 나엘라가 걱정되어 잠을 설친 덕에 평소보다 조금 늦게 깨었다.

나엘라의 기상 여부와 상관없이 아침 식사 시간이면 자신을 깨웠을 텐데?

소리 소문조차 없는 것이 이상해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 옆 협탁엔 세숫물부터 마실 물, 수건과 갈아입을 옷까지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대충 채비하고 나오자 나엘라의 방이 텅 비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복도로 나선 체드란은 저 멀리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다롱 부단장을 발견했다.

보자마자 혈색이 도는 것이 그를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당장 연무장으로 가셔야겠습니다.”

급히 안내하는 다롱 경을 따라 체드란도 방향을 바꾸었다.

“몇 시간째 그러고 계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스트레칭을 하려고 나왔을 때도 계셨습니다.”

체드란의 걸음이 빨라지며 다롱 경을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저택을 나오니 아직도 부슬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새벽에 언뜻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었는데? 설마 그때부터 있었던 걸까.

“대공비 전하의 하녀들이라면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똑같이 비를 맞으면서 내내 서 있기만 합니다.”

대체 어느 정도길래 다롱 경이 이리 울상까지 지으며 말하는 건지.

어느새 연무장이 보이고 점점 거리가 가까워졌다. 마침내 도착했을 때 체드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저런 색을 가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질린 피부와 파랗다 못해 보라색으로 변해 버린 입술의 나엘라가 있었다. 옷과 더불어 묶지 않은 머리칼은 비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얼마나 파인 것인지 진흙이 되어 버린 바닥에 비로 없어졌어야 할 발자국이 가득했다. 나엘라가 움직인 딱 그곳만 그랬다.

그런 그녀를 지안과 제니, 가린이 모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들 또한 얼마나 기다린 것인지 입술 색이 보라색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체드란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나엘라를 가장 아끼는 이들도 그저 지켜보며 마음을 다스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과연 자신이 끼어들어도 괜찮을 것인가.

대체 얼마나 힘들길래 몸을 저렇게 혹사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체드란은 그녀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길이 들지 않은 검을 몇 시간이나 휘둘렀으니 손바닥이 터진 것이다.

그녀에게 다가간 체드란이 말했다.

“그만.”

하지만 그녀는 체드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오로지 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만!”

체드란은 어쩔 수 없이 힘으로 검을 뺏어 들었다. 나엘라의 팔을 붙잡고 손목에 힘을 주니 그제야 하얗게 질려 있는 손이 삐걱거리며 펴졌다.

툭 떨어지는 검 손잡이엔 벌건 핏물이 가득 묻어 있었다.

“체드란?”

보라색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나?”

그녀의 팔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움직였고 온기도 전혀 없었다.

“그냥 아침 운동 좀 했습니다.”

제 낯빛이 어떤지도 모른 채 나엘라가 답했다.

“아침 운동 두 번 했다간 사람이 죽겠군.”

“그 정도는 아닙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나엘라는 또박또박 대꾸했다.

자학하는 꼴에 화가 났으나 한마디도 안 지려는 모습에 체드란은 되레 안도했다. 이성이 나가진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으니 자신이 알던 그녀인 것 같았다.

“그래서 기분은 조금 나아졌나?”

비를 너무 많이 맞아 체온이 떨어졌는지 멍해 보이는 눈동자가 체드란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보단 낫네요.”

“몸은 훨씬 안 좋아졌을 것 같은데.”

체드란은 두르고 있던 외투를 나엘라의 뻣뻣한 몸에 걸쳐 주었다.

“마음을 앓는 것보단 몸을 앓는 게 낫죠.”

“난 아니라고 생각하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일어날 힘이 있지.”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못 들어 봤나. 마음도 실컷 앓고 일어나야 한 걸음 나아가는 법이었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엘라가 본인 마음을 잘 모른다는 것이 느껴졌다.

“배신을 당해 본 적 없나?”

“한 번도 없었습니다.”

“축복받은 인생이로군.”

나엘라가 좋은 사람이라 그동안 좋은 사람만 만나 온 거다. 아니면 사람 보는 눈이 좋았거나.

하지만 이번 일은 나엘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일이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모릅니다.”

“확인했는데 배신이 맞다면?”

자수정빛 눈동자는 깊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한없이 슬퍼 보여 체드란은 이때까지 느꼈던 나엘라의 대한 감정과 다른 기분이 들었다.

나엘라는 대답 대신 질문을 택했다.

“체드란은 많았습니까?”

“없진 않았다.”

“어떻게 했습니까?”

“……그동안 했던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적이면 베었고 아군은 지켰지.”

나엘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너무도 아꼈던 사람이 적이 되어 갈피를 잃었겠지.

하지만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을 부른다.

“장군이 망설이면 죽는 것은 내 사람이다. 분노, 후회, 슬픔은 지키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전쟁터에선 망설이는 순간 수많은 이들이 죽는다. 이곳이 전쟁터는 아니지만 어떤 의미론 전장보다 더한 곳이었다.

“그때 버티지 못할 것 같으면요?”

“버틸 수밖에 없을 거다. 그대를 바라보는 수많은 아군 때문에.”

여전히 제 뒤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또다시 일어나게 될 거다. 배신한 이를 생각하며 멈춰 서기엔 짊어진 사람이 많았다.

체드란은 그중 한 명이 자신이길 바랐다.

저가 나엘라를 일으킬 지지대 중 하나이기를.

“그대는 나를 지키는 기사가 되겠다고 했었다.”

지키겠다고 하더니 오히려 지켜 주고 싶게 만들면 어찌할까.

“승패의 축하와 위로는 레이디의 몫이니 나를 위해 남겨 두도록. 그대를 위한 위로와 손수건을 준비해 놓지.”

자신은 제 일을 할 것이다.

그러니 나엘라는 나엘라의 일을 하기를.

힘이 들면 뒤에 있는 자신을 생각하기를.

그제야 그녀가 작게 웃었다.

“에스토가 지내는 곳에 숨어 들어가려 했습니다. 조용히 처리하고 나오려 했는데……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네요.”

그 말을 끝으로 몸에 힘이 풀리며 나엘라가 허물어졌다.

끝내 감긴 눈을 보며 체드란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얼음장 같은 몸에 대기 중이던 하녀들을 불렀다.

“의원을 부르고 따뜻한 물을 준비하라.”

일단 몸을 좀 녹여야 할 것 같았다.

왜 그리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지.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이야기라도 해 볼 걸 그랬다.

차게 식은 몸을 꽉 끌어안은 채 체드란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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