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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82)화 (82/220)

81화

저녁이 돼서야 나엘라는 눈을 뜰 수 있었다. 그 오랜 시간 비를 맞고 몸을 움직였는데도 다행히 열은 나지 않았다.

대신 온몸이 욱신거리고 찢어진 손바닥이 따끔거려 인상을 썼다.

“일어나셨어요?”

나엘라의 뒤척임에 다가온 제니가 물을 건넸다.

“고마워.”

잔뜩 잠긴 목소리로 감사를 전하고 시원한 물을 삼키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물을 계속 시원한 상태로 유지하려 주방을 왔다 갔다 했을 하녀들이 훤히 보였다.

“다른 것도 고맙고.”

나엘라가 연무장에 있는 동안 뒤를 지켰다는 것을 안다. 방으로 찾아왔을 때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사방을 뒤지고 다녔을 것이다.

“아프지만 마세요.”

나엘라가 아프면 자신들이 더 아프다는 듯 구는 그들을 알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방이 소란스러워지자 밖에 있던 체드란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픈 곳은?”

“내일 근육통이 올 것 같네요.”

할 일이 많은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움직였다는 타박은 없었다. 대신 침대 옆에 있던 간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차라리 공작께 찾아가 빨리 얘기를 듣는 편이 낫지 않겠나?”

나엘라가 누워 있을 때 감정 정리를 도와주려 고심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 발을 동동거리고 계실 모습이 훤하네요. 당분간은 그러고 있으라 하죠.”

공작이라고 마음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킨 행동이 얄미워 하는 말이었다.

“그럼 당분간 그냥 쉴 예정인가?”

“그건 저도 고민 중이에요. 마냥 쉬기는 시간이 아깝네요.”

“적어도 암살은 보류군.”

나엘라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쓰러지기 전에 한 마지막 말을 기억하는 듯했다.

에스토의 일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충격이 컸음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감정에 계속 얽매여 있을 순 없었다. 감정을 털어 냈다기보단 뒤로 미뤘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 같았다.

“지엘라가 방문을 청했네.”

의외의 인물이었다. 에스토의 일로 가장 먼저 달려올 것 같은 사람들은 안 오고 지엘라라니.

“만나 보겠나?”

“뭐… 상관은 없겠죠?”

“일자는?”

“오늘은 안 되겠죠?”

지금 딱히 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내일 오전으로 잡지.”

대신 답장을 써 주겠다는 말에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쉬게.”

그녀를 오래 붙잡고 있을 생각이 없다는 듯 체드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들짝 놀란 나엘라가 체드란을 붙잡았다.

“저녁은요?”

“저녁?”

“저 온종일 굶었는데요?”

잠시 침묵하는 체드란에게 제니가 대신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배고프다는 나엘라를 위해 호화로운 저녁이 준비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

저녁을 든든하게 먹은 나엘라는 먹자마자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누워 있어 놓고도 또 중간에 깨는 일 없이 자고 일어난 나엘라는 아침도 엄청나게 먹어 치웠다. 그녀의 요청대로 아침부터 고기가 가득 올라와 체드란까지 기름진 식사를 해야 했다.

아침에도 어제저녁처럼 먹자마자 누운 나엘라를 보며 체드란은 어이없음을 감추지 않았다.

“또 그러고 있을 건가?”

“손님이 오기 전까지 회복에 전념하도록 하죠.”

염려만큼 근육통이 심하게 오지는 않았지만, 아픈 것은 아픈 거다.

그렇게 체드란을 내쫓고 또 한참을 눈 감고 누워 있었다. 할 일이 많다는 건 알지만 회복이 먼저였다.

몸이 멀쩡해야 다음 행동도 할 수 있는 법. 나엘라는 잘 먹고 잘 쉬기를 착실히 실천 중이었다.

“이제 곧 황녀님께서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난 나엘라는 하녀들의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깨끗이 씻고 몸을 단장하고 나니 딱 맞게 지엘라가 도착했다.

“지엘라 황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집사 라르바의 말에 나엘라는 삐걱거리는 몸을 가볍게 풀었다.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스트레칭을 해 줘야 근육통이 빨리 나아지겠지. 아직도 정신이 없는지 씻기 전에 했어야 할 일이 이제야 떠올랐다.

“가지.”

라르바를 따라 손님 응접실로 향하자 차와 디저트를 가져오던 하녀와 마주쳤다. 가린이 대신 하겠다며 건네받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똑똑─

“대공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조용히 문이 열리자 소파에 앉아 있는 지엘라가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비 전하.”

“이렇게 뵈어 반갑습니다, 지엘라 황녀님.”

“그냥 지엘라 부인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직도 마호세르디 영애라고 부르던 나지막한 목소리가 선명한데. 어느새 나엘라에 대한 호칭도, 지엘라를 부를 호칭도 달라져 있었다.

하녀들이 다가와 찻잔을 놓고 차를 따랐다. 그리고는 나엘라의 지시가 없었음에도 다들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워 주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지엘라의 물음에 나엘라는 가만히 찻잔을 들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잘 지냈다고 해야 할까, 잘 못 지냈다고 해야 할까.

“늘 한결같이 지내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녀다운 대답에 지엘라는 미소를 지었다.

“부고가 있으셨다 들었습니다.”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그리 길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결혼했을 때부터 남편의 죽음을 예상했다는 말이었다. 대체 얼마나 오늘내일하던 놈에게 시집을 갔길래 지엘라가 이리 초연한 걸까.

“요양차 오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리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공 부부의 결혼 축하 파티가 열린다기에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지엘라가 왜 걸음을 서둘렀는지 나엘라는 알까.

지엘라의 눈에 나엘라는 아직도 검밖에 모르는 한 기사였다. 나엘라가 아직 전쟁터를 돌아다니기 전에 처음 만났었기에 더욱 그랬다.

당시에 지엘라처럼 돌려 말하거나 가식적인 이들을 어려워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래서인가, 나엘라가 황후에게 당하고 있을 줄만 알았다.

“파르로시 황녀님께서 자유분방하게 구시기에 황제 폐하의 사랑을 많이 받았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황녀님께서 폐하께 그리 사랑받으셨다면 당연히 부부의 사이가 좋겠지요.”

그 공격적이고 거칠 것 없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걱정돼서 달려왔더니, 이제는 나보다 훨씬 잘하네요.”

잠시 의도를 가늠하려는 듯 나엘라의 눈동자가 가만히 지엘라를 살폈다. 워낙 돌려 말하는 것을 잘해 그녀의 진심조차 쉽게 못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을 웃으면서 상대하는 거 말이에요.”

한참을 살피다 정말 걱정해서 한 말임을 깨달은 나엘라는 눈을 깜박였다.

“내가 대공비 전하를 걱정했다고 해서 놀란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난 정말로 동생처럼 생각했어요. 지엘라와 나엘라, 이름도 비슷하니까요.”

자신이라고 지엘라를 마냥 싫어했던 건 아닌데. 멋쩍은 기분에 나엘라는 볼을 긁적였다.

“긁지 마요. 화장 지워지니까.”

나엘라의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허리 더 펴고요.”

약간 기울어져 있던 허리도 다시 올곧게 폈다.

“기분이 바뀌면 몸의 어딘가가 꼭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가장 티가 많이 나는 곳은 대부분 손가락이나 얼굴이죠.”

갑자기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옛날부터 지엘라는 무언가를 가르쳐 줄 적이면 알 수 없는 화두부터 던졌다.

“파르로시는 대놓고 티를 내죠. 표정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것 같더군요.”

“황후는 손톱을 잘 보면 됩니다.”

손톱? 황후가 화가 나면 손톱으로 유리나 테이블 같은 것을 긁는다고 체드란에게 들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그러는 걸까.

“손톱으로 무언가를 긁는 것처럼 손가락이 움직입니다. 화가 났거나 못마땅하다는 표시죠.”

다른 이의 앞에서는 대놓고 유리를 긁을 수 없으니 그 흉내만 내는 모양이었다.

이런 사소한 습관들을 알려 주려 지엘라가 화두를 던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황제는요?”

지엘라의 시선이 잠시 밑을 향했다. 껄끄러울 텐데도 잠시 생각하는 듯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없습니다.”

“없어요?”

“욕심이 많은 자는 눈치가 빨라요. 황제도 다른 사람들의 습관을 보고 그 심리 상태를 파악해요. 분명 자신의 습관은 모두 없앴을 겁니다. 저도 황제의 습관을 찾을 수 없었어요.”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대체 뭐가 욕심나서 그렇게 살았을까.

황제를 떠올리는 듯 지엘라는 가만히 테이블만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나엘라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황녀님의 습관은요?”

“부인이라고 부르라니까요.”

“익숙해서요.”

“제 습관은 왜요?”

“부인에 대해 알아보려고요.”

꽤 의외의 대답에 눈을 깜박이던 지엘라가 웃었다. 자신을 파악하겠단 대답이 기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대공비께선 고민을 할 때 검지로 어딘가를 두드리죠.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면 차가운 표정이 되고, 곤란한 일을 마주했을 땐 말이 많아집니다.”

“부인의 습관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울지 않죠. 슬플 땐 하염없이 웅크리고, 마음을 정리하고 싶을 땐 검을 듭니다. 이번에도 검을 들었나 보죠? 손이 엉망이네요.”

붕대를 감은 손을 흘끗 보곤 다시 지엘라를 응시했다. 본인의 습관 대신 나엘라의 버릇들을 줄줄 읊고 있었다.

“또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과 포도, 싫어하는 건 잘 없고 자신을 욕하는 것보다 아끼는 사람 욕하는 걸 더 못 참죠. 남의 감정에 섬세하며 자신의 감정엔 둔한 편이죠.”

“저희 아버지보다 많이 아시네요.”

“왜 이렇게 많이 알 것 같나요?”

지엘라의 질문은 마치 숙제 같았다. 어려우면서도 어렵지 않은 숙제라 조심스럽게 답했다.

“절 좋아해서요?”

“맞아요. 그러니 대공비께서도 절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겠어요? 그러고 나면 제 습관이 보일 거예요. 대공비가 직접 제 습관을 말해 줄 날을 기다릴게요.”

지엘라의 말이 슬프게 들렸다면 이상한 걸까.

그동안 나엘라가 지엘라를 꺼려했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듯했다.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거요?”

“부인이 마호세르디를 많이 좋아했다는 거요.”

지엘라는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다나한 경이었지만 마호세르디 사람들을 참 좋아했죠. 황실과는 다른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무뚝뚝한 사람들을 뭐하러 좋아하셨어요.”

“어머, 다나한 경도 절 좋아했는데 몰랐어요?”

나엘라는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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