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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83)화 (83/220)

82화

“오라버니가 부인을 좋아했다고요?”

“그렇게 놀라니 조금 기분이 상하네요. 제가 그럼 저 싫다는 사람을 따라다닌 줄 알았어요?”

나엘라는 형제의 연애 이야기가 어색하고 낯간지러웠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

다나한과 지엘라가 서로 좋아했는데도 결국 이어지지 않았다. 지엘라에겐 아픈 이야기일 터라 걱정이 들었다.

“서로 좋아했지만 둘 다 현실적으로 결혼은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죠. 황가의 사람이 마호세르디에 들어간다면 황실의 간섭이 시작될 테니까요.”

핑계는 만들면 그만이었다. 지엘라를 보필할 하녀, 시녀들을 황실에서 보내려 할 테고 지원을 핑계로 교류가 시작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황가의 의무를 이행하는 지엘라를 따라 다나한도 반려로서 함께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지엘라는 마호세르디가 가진 황실에 대한 분노를 알고 있었기에 결혼은 불가능하리란 것도 알았다.

다나한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란 이유로 어떻게 황실 사람을 마호세르디에 들일 수 있을까.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마호세르디를 들락날락했어요. 저도 하일모라 영애만큼 꽤 사랑에 정열적인 타입이라서요.”

“세레노피 부인입니다.”

지엘라가 멍하니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매번 지적하기만 했지 나엘라에게 지적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조금 의기양양한 나엘라의 미소를 보며 지엘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속이 시원해 보이네요.”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요.”

“정말 오랜만에 즐겁네요.”

그 말이 꼭 결혼 생활 당시의 고단함을 내비치는 것만 같아서 나엘라는 웃음을 삼켰다.

“아쉽지만, 오늘은 일찍 일어나야겠어요. 과부가 오래 돌아다니면 좋은 이야기를 못 듣는답니다.”

지엘라는 나엘라의 상태를 잠시 보러온 것이라 덧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에 어색히 웃은 나엘라는 그녀를 배웅했다.

응접실을 나와 현관으로 향하자 앞에 대기 중인 황실 마차가 보였다. 황실의 문양은 박혀 있으나 화려하기보다는 정갈하고 소박한 마차였다.

“어이없지 않아요? 과부는 마차도 소박한 걸 타야 하나 봐요.”

지엘라가 작게 말을 건네자 나엘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그런 예법은 왜 만들어진 건지. 화려한 마차를 타면 슬픔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황실 호위 기사가 다가오기 전, 나엘라는 손을 들어 그를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지엘라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혹시 언제쯤 돌아가시나요?”

“아마 한 달 정도 머무르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럼 돌아가셨다가…….”

나엘라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제 말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과한 제안이 아니길 바라면서.

“모든 일이 끝나면 제국으로 돌아오세요. 마호세르디도 좋고, 제가 있는 노헤스카도 좋습니다.”

백금발이지만, 황실의 푸른 눈을 물려받지 않은 지엘라는 연한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그곳이 더 안전해요.”

입꼬리만 올려 짓는 웃음도 없이 지엘라는 그저 무표정만 내비친 채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이 표정의 의미가 거절일까 봐 나엘라는 걱정스러워졌다.

“제가 그랬잖아요.” 

지엘라의 눈이 살짝 접히며 호선을 그렸다.

“마호세르디의 사람들은 참으로 곧고 다정하다고. 그대는 여전히 다정하네요.”

분명 평상시보다 더 환한 웃음인데 어딘지 더욱 슬퍼 보였다. 나엘라는 그것이 거절임을 깨달았다.

“첫사랑에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어요.”

지엘라는 천천히 몸을 돌려 마차를 향했다. 단단하고 곧게 선 뒷모습 때문에 지엘라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곧이어 마차의 문이 닫혔다. 호위 기사들이 말에 오르자 마차가 출발했다.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 안에서 지엘라는 이를 꽉 물고 울음을 삼켜 내었다.

한때는 다나한의 아내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와 결혼해서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그처럼 키워야지. 아들을 낳으면 다나한처럼, 딸을 낳으면 나엘라처럼 키워야지.

시누이가 될 나엘라에 대해 무엄한 것들이 떠들지 않도록 완벽하게 가르쳐야지.

그리고 나엘라를 데리고 쇼핑하러 다녀야겠다. 그녀는 싫어할 테지만 공작님께 말해서라도 끌고 다니면 늘 그랬듯이 못 이기는 척 나오지 않을까.

공작님도 좋고 다나한도 좋고 나엘라도 좋으니까 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같은 군사 경계 지역이니까 체드란 오라버니도 마음 편히 볼 수 있지 않을까.

마호세르디 사람들은 모두 따뜻하고 다정하니까 황실에서처럼 외롭고 쓸쓸하진 않겠지.

잠시 그런 헛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 잠깐의 꿈이 얼마나 달고 행복한지 상상하고 난 다음이면 여지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꿈이니까.

내게는 절대 없을 행복이니까.

제국으로 돌아오라는 나엘라의 말에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달고 행복했던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헛된 상상을 또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나는 이미 그때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이미 더럽혀진 몸이기에 다나한에게 돌아갈 수 없다.

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기회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어떻게든 다나한에게 달려가고 싶은 변명들이 자꾸만 차올랐다.

아직도 다나한을 사랑하고 있어서.

결혼했음에도 내내 당신을 그리워해서.

“보고 싶어요, 다나한.”

그래서 지엘라는 더욱 눈물을 쏟았다.

언젠가는 스치듯이라도 볼 수 있기를.

제게만 가끔 보여 주던 수줍은 미소를 단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기를.

아니, 이렇게 더러워진 저를 다나한이 보지 못하기를.

언제나 아름다웠던 지엘라만 기억하기를.

“으흑…….”

울음소리가 밖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지엘라는 이를 악물고 참아 내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아직 차기만 해 눈물 하나 마음대로 흘리지 못하니까.

*

저택을 빠져나가는 마차의 꽁무니만 보던 나엘라는 한참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왜 이리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다. 옛날에는 뭐든 노련하게 잘하던 지엘라였는데 오늘따라 눈에 밟혔다.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에 표정이 어두워진 나엘라는 침실로 돌아가 소파에 가만히 앉았다.

이런저런 상념들이 끝이 없었다. 지금 누군가를 걱정할 처지냐마는 그래도 걱정이 드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아무래도 지엘라에 대해 체드란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가린이 다가왔다. 오늘은 지안도 제니도 다른 일이 있어서 종일 가린이 나엘라의 시중을 전담하고 있었다.

“서튼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가린이 곱게 접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나엘라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또?”

대체 제 말은 뭐로 듣는 걸까?

톨레로 상단에 들어가더니, 감시받을 줄 뻔히 알면서도 또 연락을 보내왔다. 진짜 중요한 일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건만 고새를 못 참다니.

대체 어떻게 기합을 줘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나엘라는 서튼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릴 생각을 하며 종이를 펼쳤다.

하지만 나엘라는 곧 서튼에게 기합 대신 칭찬을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손바닥 안쪽 검지부터 대각선 흉터, 갈색 머리에 왼쪽 눈썹의 흉터, 175cm 정도의 키와 발 사이즈는 270, 걸을 때 조금 바깥으로 걷는 걸음걸이. 위와 같은 특징을 가진 남자 발견 및 신원 확인 끝. 황후의 심부름꾼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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