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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84)화 (84/220)

83화

바론은 조용하고 한산한 거리를 확인한 뒤 가볍게 땅을 박찼다. 자정이 넘었으니 은신처로 이동한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서신을 전하고 복귀해야 했다.

내일 정오가 오기 전까지 처리하려면 말을 타고 달린다 해도 쉴 시간은 없을 것이다.

타닥, 탁! 그의 발걸음 소리가 빨라지더니 곧 소리도 사라졌다. 일부러 인적 없는 곳으로만 움직인 터라 신경 쓸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수도 외곽으로 향했다. 외곽 중에서도 가끔 약초꾼이나 몇 있을 법한 인적이 드문 숲, 그곳이 바론의 은신처였다.

오는 내내 주변을 경계해 따라오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긴장을 풀고 은신처의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해진 은신처의 문을 여니 사람 없는 집이란 걸 티를 내듯 한기가 느껴졌다.

대충 사물만 보일 정도로 촛불을 켠 그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온종일 말을 타야 할 테니 요깃거리도 챙겨 가야 했다.

그때 갑자기 끼익 소리를 내며 나무문이 스산히 열렸다. 단숨에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든 그는 문을 노려보았다.

“이야, 멀리도 왔네. 덕분에 달리기 좀 실컷 했다.”

간만에 운동했다며 너스레를 떤 남자는 검은 복면을 한 채 집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누구냐.”

당장이라도 암기를 날리려 자세를 잡은 바론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누구한테 묻는 건데? 나? 아니면 뒤의 아가씨들?”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의 뒤로 로브를 쓰고 있는 이들이 몇 명 더 있었다. 바론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도주로를 확인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나? 나는 서튼이라고 해. 반가워.”

서튼?

바론은 서튼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허나 영 기억이 나지 않아 가만히 노려보고만 있으니, 서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장난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이 서튼 님을 모른다고? 맙소사, 역시 한동안 너무 조용히 산 게 틀림없어. 나 때는 말이야, 위대한 용병 서튼 님을 보면 당장 도망가라는 말이 있었다고.”

용병 서튼?

그제야 바론도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용병 서튼이라고 하면 그 잔인함에 악명이 높아 서부에서 꽤 유명한 자였다.

돈이라면 무엇이든 한다고 했던가.

“……죽었다고 들었는데 위장이었나 보군.”

“참나, 우리 단장님은 일 처리가 너무 살벌해서 문제야. 왜 멀쩡한 사람을 죽여 놓냔 말이야.”

이유야 어찌 됐든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서튼을 보아하니 바론 자신이 목적인 듯했다.

그때였다. 서튼의 뒤에 서 있던 이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로브에 가려져 있어 정확히 알 순 없지만 호리호리한 체형에 170cm 정도 되는 자였다. 남자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가씨들이란 표현을 사용했으니 여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여자 쪽을 노리는 것이 편했다.

하지만 걸음걸이, 그리고 절도 있는 움직임에서 쉽지 않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말이야.”

로브를 쓴 여자가 정면으로 걸어오며 바론을 압박했다. 말을 하며 거리를 좁혀 오는 서튼은 오른쪽, 왼쪽은 창가이고 문은 정면에 있었다.

로브를 쓴 여자를 피해 문으로 가고자 하면 그녀를 따라오는 다른 이가 또 있었다. 키가 더 작고 사뿐사뿐 걷는 자세로 보아 분명 여자이며 기사나 병사는 아닌 것 같았다.

“창문으로 도주할 생각은 하지 마. 다른 이가 지키고 있으니.”

서튼의 놀리는 듯한 말에 바론은 눈을 가늘게 떴다. 미리 도주로까지 차단한 것을 보니 이미 이 주변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집 옆에 매어 놓았던 말 또한 이자들 손에 들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방법은 하나였다. 창문으로 향하다 로브를 쓴 여자를 피해 정문을 돌파한다. 그 뒤로 확인해 둔 산길을 통해 도주해야 했다.

“탈출하려고 하는군.”

여자치고 조금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지안이든 서튼이든 잡는 사람에게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여자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두 사람의 기세가 달라졌다. 분명 평범한 여자로 보였던 이는 ‘함께 소풍, 함께 쇼핑, 함께 대련’ 같은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서튼은 오로지 눈을 희번득 뜨며 ‘돈, 돈, 돈’만 반복했다.

조금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문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자도 로브를 쓰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문을 꽉 채울 만큼 커다란 체구였다.

“내가 잡으면 나도 소원 들어주나?”

낮은 그 음성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저자만큼은 절대 상대하면 안 된다. 바론의 오랜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창문이나 지키랬잖아요. 왜 들어와요? 혼자 못 잔다고 난리 쳐서 데려왔더니.”

남자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샜다. 그 웃음엔 여유가 가득해 바론은 입술이 바짝 말랐다.

“가린에게 맡겼다.”

“내 하녀에게 일 시키지 마요.”

“나 없었으면 가린이 했겠지.”

“있으면 잘 써먹어야죠.”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보며 바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방법은 창문밖에 없었다. 창문 밖에 다른 이가 있다 한들 적어도 이 남자를 상대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어? 움직인다.”

서튼의 목소리와 함께 바론은 발을 박찼다. 허나 창문으로 향하던 바론을 막은 것은 위협적으로 보이던 남자도 서튼도 아닌 키가 큰 여자였다.

“안녕한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로브의 후드가 벗겨지자 보라색 눈동자와 검은 머리가 드러났다.

그제야 바론은 그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

“크윽.”

바론은 조금 전에 발로 차여 욱신거리는 배를 감싸 안았다. 방구석에 처박혀 몸을 웅크린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앞에 쓰러져 있는 바론을 방치한 채 저들끼리 싸우는 중이었다.

“어떻게 나한테 주먹을 날릴 수 있어요, 체드란?”

“저자에게 날린 주먹이 잘못 간 거네. 그리고 그대의 실력이라면 피할 수 있지 않은가?”

“거짓말하지 말아요. 누가 봐도 날 노렸잖아요.”

“그러게 왜 저자를 잡는 사람에게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나? 어쨌든 소원은 내 것이네.”

그런 두 사람 뒤에서 대기 중이던 지안과 서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억울합니다! 대공 전하를 데려오는 게 어딨습니까? 내 돈!”

“대공 전하는 제외해야 한다고요! 전혀 공평하지 않아요!”

제 실력을 얼마나 무시하는 걸까 싶었지만 바론은 그 틈에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눈치를 보며 조금씩 도주로를 확보할 즈음 스윽─ 서늘한 감각이 목에 드리워졌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무표정한 여자의 말에 나엘라가 얼른 외쳤다.

“일하는 건 가린밖에 없네!”

“그래도 소원은 내 것이다.”

“이건 무효입니다! 저 돈 벌어야 한다고요!”

“맞아요. 무효예요! 저 나엘라 님이랑 놀러 가야 해요!”

자꾸만 무효라고 외쳐 대는 지안과 서튼을 향해 체드란은 잘 짓지 않는 비웃음을 지었다.

“돈도, 놀러 가는 것도 내 차지가 되겠군.”

“억!”

“안 돼!”

그런 그들을 더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저은 나엘라는 바론에게 집중했다. 쓰러져 있는 그를 보며 그녀가 다정히 말을 걸었다.

“내가 기억나나?”

바론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어찌 모를까. 자신의 손으로 직접 납치했던 여자였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가린이 다가와 바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시작했다. 비명이든 말이든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때 내 입이 막혀 있어 차마 전해 주지 못한 말이 있지 뭔가.”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찾고 있으리라곤 생각 못 했다. 정말로 찾아낼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고.

대체 어떻게 자신을 찾았단 말인가. 분명 그날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말일세. 받은 것은─.”

나엘라의 손이 바론의 발목으로 향했다. 서튼과 가린이 재빠르게 그의 다리를 잡아 고정했다.

꽉 쥔 악력에서 그녀의 의도를 깨달은 바론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꼭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네.”

콰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통증이 강타했다.

억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바론을 보며 나엘라는 다른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지 못하면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가 없는 사람이야.”

콰득─, 다른 쪽의 발목도 돌아갔다. 양쪽 발목이 모두 부러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나엘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브 속에는 가벼운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도 눈에 띄었다.

“품 안을 뒤져 봐.”

서튼과 가린이 각자 가까운 쪽에서 그의 옷을 살폈다.

“먼저 발견한 사람이 수당 받습니까?”

서튼의 말에 가만히 있던 체드란이 물었다. 서튼을 보다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돈이 많이 필요한가?”

“우리 조카 선물 사 줘야 합니다.”

“몇 살이길래?”

“여섯 살이요.”

“그래서 5년 전에 위장 죽음을 선택한 건가?”

“작년에도 여섯 살이었고, 재작년에도 여섯 살이었습니다.”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바지 안까지 훑던 서튼은 정말 손에 잡히는 것이 있자 눈을 번쩍 떴다. 뭘 생각한 건지 가린의 표정이 썩어 들었지만, 서튼은 망설임 없이 봉투 하나를 꺼냈다.

순간적으로 불결하다 외친 지안이 한 발짝 물러섰다.

“희한한 곳에 숨기는군.”

“남자의 보물을 넣어 두는 비밀 장소죠.”

“이자의 아내에게도 보물일 것 같지는 않은데.”

음담패설 정도야 보고 들은 것이 많아 나엘라는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옆에서 번개 같은 속도로 고개를 돌린 체드란이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알았지만 나엘라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대충 봉투를 열어 안에 있던 종이를 펼치니 황후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톨레로의 협력을 얻어 냈다. 곧 반란군이 사용할 물자와 인력을 지원해 준다고 하니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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