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정원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황후에게 한 기사가 급히 달려왔다. 작게 귓속말로 말을 전하는 그의 뒤로 다른 시녀도 다가오고 있었다.
기사에게 바론이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은 황후는 연달아 시녀에게 언짢은 말을 들어야 했다.
“대공비께서 황후 마마의 티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하!”
간이 부어서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신이 어지간히 만만히 보였거나.
“어떻게 생각하나, 시론 경.”
앞에서 함께 차를 마시던 이들 중 에스토가 고개를 들었다. 선명히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리 오고 싶다는데…… 초대하시지요. 한 번쯤은 괜찮을 겁니다.”
“그때 그 불경한 태도를 보고도?”
“그러니 불러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과연 많은 이들을 앞에 두고도 그럴 수 있는지 봐야지요.”
티 파티에 귀부인들을 불러 그녀를 지켜보자는 말이었다. 그때처럼 나온다면 그녀의 무례에 대해 소문이 퍼질 것이고, 얌전하게 군다면 그때의 복수를 하면 된다.
그런 생각이 든 황후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세레노피 부인.”
하일모라는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조만간 대공저를 방문하려 했는데 잘되었군요. 제가 이참에 그녀에게 조심하라 말도 전하고 지원군이 되어 주겠다는 말도 해 보겠습니다.”
“알아서 잘할 것이라 믿네.”
걱정 말라며 하일모라는 웃어 보였다. 에스토가 하일모라와 나엘라의 사이를 밝히지 않았기에 지켜지는 평화였다.
말하지 않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엘라와 함께 그들의 목적을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될 것이다.
“그나저나…….”
황후가 유리로 된 찻잔을 천천히 손톱으로 긁었다. 그 선명한 소리에 파르로시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정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확연히 몸이 불편해 보이던 파르로시는 지금도 제대로 앉아 있질 못했다. 새하얘진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녀에게 괜찮은지 묻는 이가 없었다. 혹여라도 물었다간 황후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본격적으로 파티들이 열리고 있는데 왜 황제 측 인사들은 조용할까.”
귀족파들은 너도나도 파티를 여는 중인데 황제에게 속한 이들은 간간이 친목 위주의 파티나 열었다. 많은 이들이 모일 파티는 자제하는 티가 났다.
그들의 수장인 마호세르디에서 조정하는 것이겠지만 그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이리 고민하는 터였다.
“대공비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늘 짓고 있는 웃음 때문에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에스토는 가끔 날카로운 말을 꺼냈다. 그가 생각보다 도움이 되는 것을 알기에 황후는 얘기해 보라며 시선을 보냈다.
“아마 황제 측에서 열리는 첫 파티는 대공비의 주관이 될 겁니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손잡은 원인이나 다름없으니 대공비가 그 결속력을 상징하게 될 테니까요.”
“노헤스카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황제 측이 대다수 참석한다면 그만큼 결속력을 보여 주는 일은 없겠지.”
“제 생각에는 황태자를 지지하는 귀족들도 참석할 것 같습니다.”
“그래……. 황태자가 체드란의 알현을 허락했다지. 제대로 손을 잡고 움직이겠군.”
“아마 그 시기를 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다.”
“대공비 몸이 안 좋으니 회복하면 바로 열리겠군.”
“아닙니다.”
황후는 의아한 눈으로 에스토를 바라보았다.
“대공비는 몸이 약하지 않습니다. 마호세르디에서 기사 생활을 할 만큼 오히려 건강한 편이죠.”
황후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듯 황당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인가? 기사라는 소문이 있었다고는 들었지만.”
“예. 마호세르디 공작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도록 그녀를 사교계에 내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딸을 어지간히 아꼈군. 그럴 때 쓰라고 있는 자식이 아니거늘.”
황후의 말에 파르로시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숨겨진 얼굴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같은 딸인데 대공비는 사랑받으며 자란 모양이었다.
기사? 어떻게 여자가 상스럽게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파르로시는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비틀린 감정을 느꼈다. 어떻게든 대공비를 없애고 싶었다. 그 같잖은 얼굴도, 황후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하던 두 눈도 모두 싫었다.
그날 파티 이후로 체드란이 내내 그녀를 기다리며 초조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대공비는 공작에게도 체드란에게도, 갑자기 쳐들어온 지엘라에게도 소중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그것이 또 다른 분노가 되고 있었다.
절대 나엘라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파르로시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에게 최악의 죽음을 선사해 줄 것이다.
*
다나한은 막 일을 마치고 돌아와 검은 방패 기사단 건물에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요즘 들어 제스라 왕국이 이상할 만큼 얌전해 여기저기 살펴보고 오는 길이었다.
아무래도 수도에서 부는 바람을 제스라 왕국도 눈치챈 듯했다. 조만간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니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는 제스라 왕국은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기분일 것이다.
경계를 더 강화해야겠다며 자리에 앉은 다나한은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보좌관이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일어났던 밀무역 건에 대해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말하게.”
다나한의 허락에 보좌관은 입을 열었다.
“확인해 본 결과 정보가 생각보다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점이 수상해 알아봤습니다.”
“그 조직 전체를 감출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겠지.”
“조사하던 중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 조직이 수도에서는 활동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그랬지.”
체드란이 적어 준 정보에도 있던 내용이다.
“그런데 똑같이 수도에서 활동하지 않는 상단이 있었습니다. 최근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활동 중이고요.”
“상단? 확실히 상단이라면 조직의 범죄자들을 상단 인원으로 바꿔 움직일 수 있겠군. 자본 세탁도 가능할 것이고.”
“네. 톨레로 상단이라고 하는데 상단주는 코너 우부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부라 자작가의 차남입니다.”
다나한은 뜻밖의 이야기에 자세를 바꿨다.
“황실 행정을 담당하는 자가 상단을……?”
“그래서 마호세르디의 첩자들을 움직여 보니 몇 가지 결과가 나왔습니다.”
보좌관에게 건네받은 자료를 빠른 속도로 자료를 확인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서류를 바라보다 한참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편지지를 갖다주게. 나엘라에게 확인해 봐야겠군.”
옆에서 대기하던 보좌관은 한쪽에 준비되어 있던 편지지를 넘기곤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보좌관이 머뭇거리자 다나한은 편히 말하라며 기다렸다.
“아닙니다.”
빤히 바라보던 다나한은 중요한 일이라면 보고했으리라는 생각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보좌관은 지엘라가 돌아왔음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때 다나한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왜 이때까지 약혼자도 없이 사는지 알기 때문에.
보좌관이 집무실을 나가자 안에서는 사각사각 만년필 소리만 울렸다.
*
나엘라는 자리에 앉아 잘 밀봉된 봉투를 잡아 뜯었다. 안부 편지 한 번 보낸 적 없는 사람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서신을 펼친 그녀는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을 가만히 읽었다.
「나엘라, 몇 가지만 확인해 줘. 대공 전하의 정보가 필요해. 혹시 톨레로 상단이나 우부라 자작가와 인연이 있는지, 유난히 자주 연락하는 이가 있는지, 노헤스카의 수입 규모와 비교하면 돈이 많은지 좀 확인해 줘. 똑똑한 너라면 알아서 잘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