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식당의 모든 이들이 어느 한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마호세르디 공작은 분명 제 저택, 제 식당인데 왜 자신이 이렇게 눈치를 보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당당히 말을 걸려던 그는 나엘라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릇 지성인이란 때와 장소를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어디까지 이야기해 줄 수 있으세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공작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다 얘기해 주실 거 아니잖아요. 어디까지 얘기해 주실 건가요?”
에스토가 배신한 것에 대해 어디까지 설명해 줄 거냐는 물음이었다. 나엘라에게 연락받은 이후로 계속 고민 중이던 공작은 결국 올 것이 왔음을 알았다.
“시론 후작이 죽은 것은 알 것이다.”
공작과 시론 후작은 절친한 사이였다. 그에게도 큰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죽음에 마호세르디가 있으리라는 건 눈치챘겠지.”
“에스토가…… 마호세르디를 배신하고 황후에게 붙었다면 그런 이유겠죠.”
왜 에스토는 황후의 사람이 되었을까. 마호세르디에 등을 돌릴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나엘라가 가장 인정하기 싫던 사실이었으나 답은 하나였다.
“그래. 시론 후작은 마호세르디의 잘못으로 죽었다.”
나엘라는 앞에 있는 그릇을 살짝 밀었다.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잘못인가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과연 나엘라가 돌이킬 수 있는 문제인가, 없는 문제인가.
“시론 후작을 죽인 자가 단제다.”
단제 마호세르디, 그가 움직였다는 것은 황제의 뜻이란 말과 같았다. 단제가 순순히 움직일 리 없으니 황제는 또 무언가 약점을 잡은 것이다.
나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던 최악의 수였다. 협박이었다고 한들 마호세르디가 직접 시론 후작가를 쳐 낸 것이나 다름없다.
평생을 믿었던 마호세르디에 배신당한 시론가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며, 앞으로 에스토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에스토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었다. 마호세르디가 먼저 에스토를 배신한 것이다.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까?”
나엘라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꾸역꾸역 감정을 참아 내는 목소리였다.
“그것밖에 없었다.”
“죽이는 척만 했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시론 후작을 죽인 척 움직이고 비슷한 사체라도 구했으면 될 일이었다.
“황제가 감시자를 붙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느냐?”
상대는 그 의심 많은 황제였다. 당연히 감시자가 동행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감시자가 단제와 함께 움직였다.
“황제에게 무슨 약점이 잡혔습니까.”
“알려 줄 수 없다.”
“왜입니까.”
“마호세르디의 일이다.”
나엘라가 깊게 개입하지 않는다면 괜찮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마호세르디가 무너지면 저는 안 위험할 것 같습니까.”
“황제가 노헤스카까진 건들지 않을 거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군사 경계 지역 두 곳이 무너지면 제국이 위험해지니까.”
결국, 공작이 믿는 것은 그 점이었다.
모든 걸 떠안고 갈 마호세르디, 그리고 노헤스카는 처벌하지 않을 황제.
설마설마했지만 이제껏 생각했던 방향 중 가장 최악의 가정이 들어맞은 것이라 나엘라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이미 일은 일어나 버렸고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탓한다 한들 아버지나 가족들에게 손댈 순 없었다.
그렇다고 에스토에게도 손댈 수 없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나엘라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행동을 반복하는데 바로 옆에 있던 체드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엘라는 제 손이 하얗게 변한 것을 그제야 알았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에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그럼…….”
이제야 겨우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에 나엘라가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에스토가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황제의 명이라는 것까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에스토에겐 마호세르디와 황제라는 적이 생겼군요.”
그것은 곧 황후와 같았다. 황후 또한 마호세르디와 황제를 적으로 뒀으니 두 사람의 목적이 일치했다.
“에스토도 너와 노헤스카에는 그리 악감정이 없을 게다.”
친구였던 정으로 자신을 눈감아 준다 할지라도 에스토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황후는 아닙니다. 이미 제게 손을 댄 적이 있습니다. 납치 사건의 주범이 황후임을 확인했습니다.”
잠시 멈칫한 공작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보라색의 눈동자가 선명한 분노로 가득했다.
“황후더냐.”
“예상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예상과 확인은 다른 것이지.”
“그런 일로 당할 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지.”
공작은 분노를 다스리려 했다. 지금 터트려 봤자 도움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엘라도 감정을 참아 내는데 아비가 되어서 갈무리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정말 약점이 무엇인지 알려 주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럼 하나만 더 알려 주세요. 그 약점이 저와 관련이 있습니까?”
단제가 시론 후작을 쳐 낼 만큼 큰 약점이 뭔지 감이 안 왔다.
“없다. 이것 하나는 진심으로 말해 줄 수 있다.”
곧은 시선에 거짓은 담겨 있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하죠.”
약점이 무엇인지, 황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일 순 없었다.
적어도 황후를 처리한 뒤에 황제를 처리해야 했다. 황후를 처리한다고 황제가 마호세르디를 쳐 내진 않겠지만, 황제를 먼저 처리한다면 황후는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의 뒤를 칠 것이다.
모든 것을 끝장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대공 저택에서 열 파티 초대장은 보냈느냐.”
이번 파티는 황후의 자존심을 밟으려는 것도 있지만 명목상으로도 중요한 파티였다.
“보냈습니다.”
“주요 인사에겐 내가 따로 다시 보내겠다.”
황제 측 수장이 보내는 초대장은 또 다른 의미가 될 거다. 해야 할 일과 현재 상황을 정리하느라 나엘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공작도 공작 나름대로 생각할 것이 있는지 침묵을 유지했다. 너무 큰 이야기들이 오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 조용히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십니까?”
갑작스러운 체드란의 말에 무거운 분위기가 깨졌다.
“나엘라에겐 좋아하는 사람들의 순위가 있습니다.”
순위? 공작은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야기도 끝났으니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꺼낸 말임은 알았다.
하지만 갑자기 순위라니, 무슨 소리일까.
“그래서 저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하나씩 처리할 생각입니다.”
체드란은 들고 있던 식기를 놓곤 가만히 공작을 바라보았다.
마치 탐색하는 눈초리라 시선을 받는 당사자는 어이가 없었다. 순간 체드란이 괜찮은지 걱정까지 들었다.
나엘라 때문에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공작님은 몇 번째일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 39위거든요.”
39위? 그 하찮은 숫자에 공작은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남편이라는 이가 아내에게 39번째 좋아하는 사람일 수 있을까.
조금 전의 걱정은 싹 다 날아갔다. 피식, 공작의 입에서 웃음이 새자 체드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연히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평생 함께한 아버지와 같겠냐며 공작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순위 타령을 해 대는 체드란이나 고민은 뒷전으로 한 채 당당히 말하는 공작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얼마나 유치한지 다른 귀족들이 봤으면 경악을 했을 것이다.
그 어이없는 작태를 보며 나엘라는 조용히 말했다.
“체드란이 그렇게 찾던 38위, 아버지예요.”
잠시 식탁에 적막이 돌았다. 한참 후에서야 체드란이 입을 열었다.
“장인어른, 검을 놓으신 지 오래됐으니 실력이 많이 줄어드셨겠습니다.”
공작은 들고 있던 포크를 있는 힘껏 콱─ 쥐었다. 자신이 38위인 것도 믿을 수 없는데, 지금 뭐라고?
누가 봐도 명백한 도발이었다.
“우리 애들 검 실력이 누구를 닮았겠습니까.”
두 남자의 살벌한 눈싸움 속에서 나엘라는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갔다.
*
“소원으로 뭘 요청할지 고민 중이네.”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체드란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나엘라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지안이 번쩍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엇으로 할지 매우 고민 중이지.”
몇 가지의 목록이 있으나 뭘 소원으로 빌어야 할지 우선순위를 따지는 중이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엘라가 탁 뱉었다.
“나들이로 하죠.”
이번엔 나엘라에게로 휙 고개를 돌린 지안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그 근처가 나들이로 유명한 곳이라 하니.”
나엘라가 언급한 곳은 바론이 가려 했던 지역이었다. 황후의 서신이 도착했어야 할 목적지에 가겠다는 의미다.
“내 소원을 왜 그렇게 써야 하지?”
어차피 가려고는 했었다. 바로 그 지역으로 가면 의심 받을 테니 옆 영지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이 매년 이른 봄에 축제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지안에게 뺏은 소원이니 당연히 나들이죠.”
“억지일세.”
“체드란이 제게 주먹을 날린 것부터 억지였습니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체드란도 마냥 억울하다고 말하진 못했다.
왜 하필 그때 주먹이 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소원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반사적으로 체드란의 주먹을 피하다 나엘라가 넘어지기도 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황당하게 바라보던 표정이 떠나지 않았다.
“어쨌든, 잡은 건 나 아닌가.”
“체드란만 아니었으면 제가 잡았겠죠.”
“확신하지 말게. 세상일은 모르는 걸세.”
“그러니까요. 피했기에 망정이지, 남편이 제게 주먹질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체드란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하필 왜 그때 주먹을 날렸단 말인가. 그 바람에 모든 것이 무산되어 버렸다.
“나중에 노헤스카령으로 돌아가면 말입니다.”
나엘라의 말에도 체드란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때 소원을 걸고 다시 내기하죠. 게임도 좋고 대련도 좋고.”
대답은 칼같이 돌아왔다.
“나쁘지 않군.”
극적인 타협에 화기애애해진 분위기도 잠시, 지안이 살짝 손을 들었다.
“지원자에 제한은 없습니까?”
“없어.”
체드란이 왜 네가 껴드냐는 듯 바라보자 지안은 턱을 치켜들며 씨익 웃었다.
애초에 지안과 서튼에게 제안했던 소원이었다. 그것을 홀랑 가져간 주제에 노헤스카령에서도 그만 독식하게 둘 수 없었다.
“이것 참, 오늘 경쟁자가 많이 생기는군.”
체드란이 눈을 빛내며 전의를 불태우자 지안도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대공 전하이시나 봐드리지 못함을 미리 사과드립니다.”
번개가 치듯 부딪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차 안을 달구었다.
그래서인지 나엘라도 그 유치한 싸움에 물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기분이 풀려 가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