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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88)화 (88/220)

87화

저택으로 돌아온 체드란은 집무실로 돌아가 외출복을 갈아입었다.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 별이 뜬 이 시간, 저택은 고요했다. 방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소리 없이 조심스러웠다.

조용히 문을 연 체드란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창을 통해 넘어온 달빛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그려졌다.

“이제 와요?”

외도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의 심정이 이러할까? 체드란은 절로 변명이 나오려던 것을 눌러 참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아직 안 잤군.”

술을 즐기지 않는 나엘라가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재질의 와인잔이었다.

“도자기인가?”

“신기하죠? 당신이 찻잔은 불쾌해하지 않잖아요. 유리를 채취한 광물도, 도자기를 만드는 흙도 결국 땅에서 나온 건데.”

“글쎄, 나의 트라우마는 유리보단 황후에 관한 것이 아닐까.”

체드란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 잔이 하나 더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잔과 똑같은 재질의.

“이미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생각할 것이 많았을까, 아니면 그를 기다리느라 그랬을까.

테이블 위에는 이미 와인 두 병이 비어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반이 넘게 사라진 상태였다. 치즈와 카나페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지 그 모양 그대로 말라 가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본의 아니게 바람맞힌 꼴이라 체드란은 조용히 와인병을 들었다. 붉은 액체를 따르니 향긋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잠이 안 오는 모양이군.”

바로 오늘 저녁, 에스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럴 만했다.

혼자 와인을 홀짝이는 그녀를 따라 잔을 기울였다. 붉은 액체가 체드란의 입으로 들어갔다.

“쿨럭, 대체 무슨……. 큭…….”

예상하지 못한 맛에 격하게 기침을 쏟아 내는 체드란을 보며 나엘라는 숨죽여 웃기만 했다.

“무슨 술이…….”

마치 지나간 길을 알리듯 독한 술을 따라 목 안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어머, 체드란 술 못 마셔요?”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소하다는 듯 웃고 있어 체드란은 할 말이 없었다. 기침을 참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며 나엘라는 가볍게 진실을 전했다.

“코냑이에요. 술을 잘 안 마신다 했으니 모를 수도 있겠네요. 주재료가 포도주죠.”

포도주로 독주를 만든다고?

혀에 닿는 술이 독하기 그지없었다.

“40도가 넘는 술이라 조금 독하긴 한데, 체드란은 술을 잘 못하나 봐요. 안 마시는 게 아니라 못 마시는 거였네.”

누구라도 예상 못 하게 독주를 마시면 기침을 쏟아 낼 것이다. 그럼에도 나엘라는 그를 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체 본인은 얼마나 잘 먹기에….”

“세 병 다 코냑인데.”

체드란은 테이블을 한 번 훑어본 후 나엘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촛불 하나 켜 두지 않아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볼이 조금 불그스름한 것을 제외하고는 멀쩡했다.

그 평온한 얼굴이 더욱 얄미워 체드란은 인상을 썼다.

“코냑을 왜 와인병에 담아 먹나?”

“제니가 대공 부부의 침실에서 코냑 세 병이 나오는 것보단 와인 세 병이 나오는 게 낫다고 해서요. 병을 바꿔 주던데요?”

“뭐가 다르지?”

“대공비가 주당이었다는 사실을 감춰 주죠.”

“와인 세 병도 대단한 거 아닌가? 다른 사람이라면 머리를 부여잡을 텐데.”

그녀는 진심으로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기 같기도, 정말 몰랐던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체드란 놀리기에 열정적인 것만은 확실하다.

“저희 집안엔 고작 와인 따위로 머리 아픈 사람이 없어서 몰랐어요. 체드란은 생각보다 술이 약하군요. 나약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만. 잘 시간이네.”

“단제 오라버니와 술 마실 생각은 하지 말아요. 가장 잘 마시거든요. 저는 검으로도 술로도 오라버니를 이긴 적 없어요. 체드란도 술로는 못 이길 게 확실하네요.”

체드란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이런 그녀의 태도를 언젠가 경험해 본 듯 느껴졌다.

나엘라는 체드란이 침묵하는 지금도 계속 떠들어 댔다. 마치 아무 이야기든 계속 이어 나가고 싶은 사람처럼.

“남편이랑 좋은 분위기를 잡으려면 술을 마시라 들었는데, 내가 훨씬 술이 강하니 큰일이에요.”

“…….”

“우리에겐 평생 좋은 분위기 따위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처음부터 술을 잘 마신 건 아니었어요. 저번에 봤던 서튼이란 자 있죠? 그자가 말이에요.”

체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 기시감이 언제로부터 비롯됐는지 깨달은 것이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나엘라는 말을 멈추었다.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을 만나러 갈 때였나? 그대가 이렇게 아무 말이나 했던 게.”

밀수범들이 잡히고 다나한을 만나러 가던 아침, 나엘라는 그때도 이런 태도를 보였다.

“그대는 걱정이 들거나 무서울 때 이런 행동을 하는군. 오늘 또 하나를 알았네.”

체드란은 자세를 낮춰 그녀의 손에 있는 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곤 나엘라를 안아 들었다. 평소라면 어떤 말이든 꺼냈을 나엘라였으나 그저 가만히 안겨 있었다.

“무심한 남편이라 미안하군. 혼자 내버려 둬서 미안하고.”

체드란은 나엘라의 방이 아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제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은 뒤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엘라는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대의 방에서는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나엘라가 왜 이 시간까지 잠들지 못했는지, 왜 잘 마시지도 않는 독주를 마시고 있었는지, 너무 늦게 눈치챘다. 어딜 다녀왔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체드란은 손으로 그녀의 눈을 덮었다. 술 때문에 살짝 높아진 그녀의 체온이 전해졌다.

“그대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겠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밤, 나엘라는 가만히 얼굴 위에 올려진 단단한 손바닥을 느꼈다. 오늘따라 더 다정히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나엘라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시야는 어둡고 누워 있는 침대조차 낯선데 목소리만은 익숙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걸까.

“잠들어도 있어 줘요.”

“요즘도 악몽을 꾸나?”

그녀의 침묵이 곧 긍정의 대답임을 알았다.

계속 악몽을 꿨다면 아침마다 소란스러웠을 텐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을 보면 하녀들을 침묵시켰거나, 하녀들에게까지 감췄던 모양이다.

“옛날 꿈을 꿔요.”

“어떤 꿈.”

그들의 대화가 불빛 한점 없는 침실에 녹아들었다.

“에스토와 하일모라가 있던 시절의 꿈이요.”

“그리운 추억이겠군.”

“꿈속에서는 행복한데 깨고 나면 악몽임을 깨닫죠.”

그때 그 시절이 행복했기에 되레 괴롭다. 행복했던 시절이 악몽이 되는 것만큼 잔인한 일이 어딨을까.

“오늘은 정말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요.”

무섭다고 말하는 나엘라는 처음 보았다. 무서운 것이 있을까 싶었던 그녀에게도 피하고 싶은 두려운 것들이 있었나 보다.

“잘 해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모르는 사이에 나는 무언가를 잃고 있어요.”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게 한순간 의미가 없는 행동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소중한 사람들 덕에 강해지기도 하지만 때론 그것 때문에 약해지기도 하는 법이지.”

“더 나은 선택은 없었을까요? 내가 더 잘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요?”

체드란은 손바닥을 살짝 떼어 내었다. 눈가를 덮고 있던 단단함이 사라지자 나엘라는 천천히 눈동자를 드러냈다.

체드란의 방은 창문조차 커튼으로 가려 놓았기에 어둠이 자리 잡았다.

그 탓일까. 늘 자수정처럼 빛을 내던 보라색 눈동자가 오늘은 고요 속에 잠겨 어둡게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악몽을 꾸고 나면 어떻던가?”

“내 온몸이 꿈에 잠식되어 있어요. 때로는 부식이고 때로는 동결이죠. 손끝에서는 피비린내가 나요. 여전히 피가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사라졌던 게 다시 나타난 것 같기도 해요. 이유는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다는 거죠.”

체드란은 그녀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상상되었다.

눈을 뜨고 나서도 심연에 잠긴 듯 가라앉은 나엘라.

때로는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듯 부식되고, 때로는 너무도 추운 감정의 온도에 얼어붙은 나엘라.

자신의 피 묻은 손을 바라보고 있을 나엘라.

그 모든 순간의 나엘라가 체드란에게 다가왔다.

“향유로 손을 씻는다고 트라우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도기나 사기 따위를 쓴다고 내 트라우마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글쎄, 우선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현실을 인지하는 것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체드란은 치료사가 아니니 정확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 본인의 상처도 이겨 내지 못했는데 어떻게 남의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까.

“눈을 떴을 때 내가 있다면 이곳이 현실임을 느끼지 않을까.”

체드란은 그녀의 옆으로 천천히 몸을 뉘었다. 동그랗게 눈을 뜬 그녀를 무시한 채 목과 어깨 사이로 팔을 넣어 이불 채로 끌어안았다.

이불 속에 누워 체드란을 바라보고 있는 나엘라와 이불 위에 누워 이불 채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그.

묘한 광경이었다.

“적어도 이곳이 전쟁터가 아님을 느끼겠지.”

얼굴과 맞닿은 체드란의 가슴이 낮은 울림을 선사했다. 어머니 이후로 누군가와 같이 자 본 적 없는 나엘라지만 신기하게도 이 순간이 불편하진 않았다.

단단한 그의 가슴도,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도, 누군가에게 안겨 있다는 이상한 포근함도. 전부 낯선 감각인데, 이상한 것은 낯설어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내 나엘라를 괴롭혀 오던 수많은 생각이 이 낯섦에 집중되어 사라지고 있으니까.

“만약 체드란이 내 트라우마를 낫게 해 준다면…….”

나엘라의 숨소리와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도 체드란을 낫게 해 줄게요.”

품 안의 몸에서 점점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체드란은 가만히 그녀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오늘따라 약해진 말들을 뱉는 건 술기운 때문이지 않을까. 아무리 술에 강하다 한들 독주를 연달아 비웠으니.

어쩌면 다른 이유일 수도 있었다.

하녀들이나 다른 이들은 지켜야 하는 상대고, 자신은 지키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기에 약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다 생각했겠지.

몇 번의 대련에도 그녀에게 져 주지 않았던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그녀의 약한 모습을 보는 것은 체드란, 자신이 유일할 테니.

“언제나 기대하고 있겠네.”

왠지 예상되었다. 트라우마를 낫게 해 주겠다며 온갖 유리를 들고 엉뚱한 행동을 할 나엘라가 말이다.

트라우마를 알려면 그를 알아야 한다는 핑계로 불편해하는 과거를 스스럼없이 물어볼지도 모른다. 신기한 것은 그날이 어서 오기를 조금 바라게 되었다.

머지않을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체드란도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야 한 발짝 다가간 이들의 숨소리가 침실 사이로 낮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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