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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89)화 (89/220)

88화

나엘라를 깨우려 조심히 방문을 열고 들어간 지안은 이상함을 느꼈다. 테이블 위에 병과 잔이 널려 있었다. 보아하니 나엘라가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잠든 모양이었다.

나엘라의 술버릇은 그 자리에서 곧장 잠드는 것이다. 한데 소파엔 아무도 없어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캐노피가 처진 침대를 확인하니 밤새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냉기만이 느껴졌다.

뒤따라온 가린이 이상한 표정을 짓자 지안도 사색이 되었다. 얼마 전 그녀가 일찍 일어났던 그날이 떠오른 것이다. 밤새 검을 휘두르던 창백한 표정이 스쳐 지나가자 지안은 몸을 돌렸다.

“잠깐.”

방 안을 둘러본 가린은 응접실 테이블을 바라보다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잔 두 개엔 모두 술을 담았던 흔적이 있었다. 체드란과 함께 술을 마신 게 분명했다.

가린이 보기에 그라면 나엘라가 검을 휘두르게 두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걸음을 옮겨 그의 방을 확인한 가린은 숨을 멈췄다. 새근새근 숨을 뱉는 나엘라와 그녀를 껴안고 잠든 체드란이 눈에 들어왔다.

가린의 뒤에서 나타난 지안도 그 모습을 보곤 멈춰 섰다. 이 상황에 어찌 행동해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좀 더 재우게.”

자는 줄 알았건만. 체드란의 목소리가 들리자 가린과 지안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오늘 하일모라 님이 방문하기로 한 날입니다.”

“언제쯤?”

“점심을 같이하실 예정입니다.”

“그럼 아직 시간이 남지 않았나. 그냥 두게.”

체드란처럼 하녀들 또한 혹여 그녀가 깰까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다행히 나엘라는 미동도 없이 고른 숨소리만 뱉었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지안과 가린이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가자 체드란은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미 달아난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어제 나엘라의 모습에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엘라는 많은 짐을 지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 진 짐이지만 체드란은 내려주고 싶었다. 나엘라 혼자 감당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자꾸만 이런저런 생각이 뒤채어 체드란은 시간이 가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해가 중천을 향해 떠오를 즈음이 되었다. 나엘라의 숨소리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점점 몸이 뻣뻣해지는 것이 잠에서 깬 게 분명했다. 낯선 아침에 놀란 듯 일어났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당황한 것일까. 체드란은 그녀 대신 먼저 말을 꺼냈다.

“악몽은 꾸지 않았나?”

“아쉽게도 꿈은 꾸지 않았네요.”

당황한 속내를 들켰음에도 당당한 것이 참 매력적이다.

“정말 아쉽군. 그대의 악몽을 달래 줄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말이야.”

“제 악몽을 바랐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나쁜 사람 같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나엘라는 부스스한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다음부터는 악몽을 꾸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음번에도 함께 잠들자는 고백인가.”

“아침부터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그대의 말투가 어제와 달리 딱딱하기에.”

그래서 장난을 쳤다는 말이었다. 낯선 곳에서 잠이 깨 당황한 나엘라를 풀어 주려.

체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의 줄을 잡아당겼다. 대기하던 하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아침 메뉴를 묻듯이 그가 가볍게 말했다.

“나엘라의 침대를 없애.”

나엘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이불에 걸려 다시 주저앉았다.

“당분간 한 침대를 쓴다.”

하녀들이 당황했으나 그보다 나엘라의 당황스러움이 훨씬 컸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악몽을 꾸지 않게 되면 말하게. 침대를 돌려줄 테니. 물론 그때까지 침대가 남아 있다면 말이야.”

나가자마자 라르바에게 침대를 갖다 버리라고 명하리라 생각하며 체드란은 침대에서 빠져나갔다.

“체드란!”

나엘라의 외침은 등 뒤로 흘린 그는 문을 닫았다.

자신이 있으면 단장을 하기에 불편할 테니 아침 산책이라도 하고 올 셈이었다. 구겨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가주를 보면 다른 이들이 기겁할 테지만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막 나가는 나엘라를 닮아 가는 걸지도.

기분 좋을 때면 나엘라가 부르던 콧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체드란은 걸음을 옮겼다.

*

베이지색의 내추럴 드레스를 입은 나엘라는 머리도 땋아 올렸다. 머리 위에 진주 헤어 바인을 고정시키고 화장을 마무리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그녀가 방문을 열자 때마침 올라온 라르바와 마주쳤다.

“세레노피 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알리러 온 길이었는데 먼저 나오셨군요.”

“창문 너머 마차가 도착한 것을 보았네.”

“오늘은 루부스 후작 영애 없이 혼자 오셨습니다.”

베르에티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늘은 무슨 핑계로 이들을 내보내야 하나 고민했지만, 하일모라가 대신 나서 주어 해결되었다.

“티 파티 때문에 걱정되는 일이 있어 이리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티 파티 말입니까, 부인.”

“네. 긴히 드릴 말이 있으니 사람을 물려주시지요.”

라르바는 저번처럼 반대하고 나섰다.

“대공비 전하를 보필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접대실을 비울 순 없습니다.”

나엘라는 가만히 찻잔을 들었다. 참된 집사의 자세이나 반갑지 않으니 문제였다.

“나가 보게. 안주인으로서 손님을 불편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뭔가 더 말하려던 라르바는 잠시 입을 다물곤 고개를 숙였다.

“필요하시면 불러 주시옵소서.”

그가 눈짓해 하녀들도 함께 방에서 벗어났다. 문이 닫히자, 하일모라가 괴이한 신음을 내며 다리를 뻗곤 소파에 등을 기댔다.

“으어어, 진짜 죽겠다.”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나엘라는 곧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어?”

“황후 때문이지 뭐.”

“왜?”

하일모라는 말도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열심히 성격 눌러 참는 중이야. 저번 황실 파티, 너 골탕 먹이려고 개최한 건 알지?”

“내가 먼저 가 버리는 바람에 황후의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네.”

“거기다 지엘라 황녀님께 한 방 먹기도 했고 말이야.”

널브러져 있던 하일모라가 슬쩍 나엘라의 눈치를 살폈다. 에스토를 만나고 처음 갖는 자리다. 혹여 상처가 깊을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난 괜찮아.”

“안 괜찮다고 그랬잖아.”

에스토를 만나고 했던 말을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자세를 고쳐 앉은 하일모라는 진심으로 사과를 건넸다.

“일찍 못 와서 미안해.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하고.”

“정말 괜찮아. 그나저나 에스토가 우리 사이는 말 안 한 거야?”

“그거 때문에 너랑 상의하러 왔어. 우리 사이는 말하지 않았지만 네가 기사였던 건 밝혔거든.”

“우리가 친구인 건 말하지 않았다고?”

“응. 그게 의문이야.”

나엘라의 손가락이 소파 손잡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도 의문이야. 에스토의 일도 이상하고, 아버지께 들었던 상황 설명에도 뭔가 이상한 부분이 많아. 황후에게도 알 수 없는 점들이 있고.”

그녀의 의문들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하일모라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베르에티 영애는?”

“말도 마. 파르로시 황녀 때문에 엄청 고생 중이야.”

“파르로시 황녀?”

“둘이 나이가 비슷하잖아. 황후가 영애에게 파르로시를 맡겨 놓다시피 했어.”

“똑똑해 보이니 보고 배우라는 건가?”

베르에티가 황후에게 잘 보인 모양이었다. 파르로시에게 붙여 처세술을 가르치려 한 것을 보니.

생각하다 보니 또 의문이 들었다.

“왜 이제야? 여태껏 파르로시 황녀를 제멋대로 굴게 뒀잖아?”

“그러게 말이야. 이제는 그리 둘 수 없다는 거겠지.”

“파르로시 황녀를 본격적으로 써먹으려 하나 보네.”

“그런가 봐. 그래서 나도 베르에티 영애를 못 본 지 꽤 됐어. 가끔 티 파티에서나 보고.”

나엘라의 손가락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베르에티가 고생하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어찌 보면 꽤 좋은 기회였다.

“베르에티 영애와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

“말해 봐.”

“나는 아직도 살라만 부인이 걸려. 제국으로 돌아오면 황후가 패악 부리리란 걸 그녀가 몰랐을까? 분명 알면서도 돌아왔을 텐데…… 그 이유가 뭘까.”

나엘라의 말에 하일모라도 그제야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리고 황후는 왜 파르로시 황녀가 제멋대로 행동하게 놔뒀을까? 그녀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면 황후는 늘 파르로시를 얕잡아 보는 눈빛을 해. 주변 사람들도 알고 있고. 제 눈빛을 모를 리가 없으니 다정한 이미지와 그녀를 무시하는 이미지, 둘 다 표현한다는 건데 조금 이상하긴 하네.”

“거기다 파르로시가 체드란을 좋아한다는 건 모두 알고 있어. 왜 그걸 묵인하는 걸까?”

나엘라가 보기에 제일 이상한 부분 중 하나였다. 황후의 성격이라면 파르로시 황녀의 감정을 깨달았을 때 바로 단속했어야 옳았다.

“음…….”

“체드란을 싫어하는데 파르로시가 체드란을 좋아하는 건 그냥 둔다라….”

“어쩌면 파르로시도 싫어할지 몰라.”

“그건 무슨 말이야.”

“너 티 파티 전날로 파티 날짜를 잡았지? 초대장도 벌써 보냈으니까.”

“황후에게도 갔지.”

“오늘 여기 방문한다고 보고하러 황후를 만났었어.”

늘 그렇듯이 하일모라는 황후궁으로 향했다. 그녀를 만나 노헤스카 저택에 방문한다는 보고를 하고는 짧은 대화를 나눴다.

“바로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노헤스카에 가는 것이니 드레스라도 새로 장만하지 그러나.”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황후는 하일모라에게 보석 몇 개를 건넸다. 작게 웃은 하일모라는 별말 없이 보석을 받아 들었다.

“온 김에 파르로시 황녀님을 뵙고 가려 합니다. 베르에티 영애도 볼 겸해서요.”

“아쉽게 오늘은 보지 못하겠군.”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파르로시가 오늘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다네.”

“아마 초대장을 받고 화난 황후가 파르로시 황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을까.”

하일모라는 본능적으로 황후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엘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지 못할 정도로 맞은 모양이네.”

“그만큼 황후가 화났다는 뜻이겠지.”

하일모라도 나엘라도 이상하게 입안이 썼다. 하지만 적을 안타까워하는 것만큼 덧없는 행동이 어딨을까. 나엘라는 얼른 그런 생각들을 떨쳐 냈다.

“아무튼, 내가 말한 것들을 알아봐 줘.”

“파르로시와 황후에 대해서 말이지? 살라만 부인이 왜 돌아왔는지도.”

“응. 그리고 에스토와 황후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는 만큼 알아봐 줘.”

“나엘라…… 에스토에 대해선…….”

하일모라는 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으니 나엘라도 이리 알아보려는 것이겠지.

그녀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이다. 그래도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친구잖아. 아니 친구였잖아.”

그 과거형에 하일모라는 아린 미소를 지었다. 나엘라에게 에스토가 각별했던 만큼 하일모라에게도 에스토는 소중한 친구였다.

그러니 하일모라는 나엘라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웃으려 했던 나엘라는 얼굴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아 그저 찻잔을 들었다. 차를 마시는 척 자신의 표정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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