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하일모라를 마중하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나엘라에게 라르바가 다가왔다. 중후한 인상인 그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레노피 부인을 너무 믿으시면 안 됩니다.”
중앙 층계를 올라가던 나엘라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황후 마마의 사람입니다.”
늘 말을 조심하고 행동거지를 단정히 하던 이였는데 의외였다. 손님이 왔을 때를 빼곤 그녀의 행동에 별다른 이의 제기를 하지 않던 인물이라 더 그랬다.
“무슨 뜻인가?”
“지금은 대공비 전하께 잘 보이려 행동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세레노피 백작은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신흥 귀족입니다. 때에 따라 행동을 바꿀 수도 있고, 동시에 여러 곳에 줄을 대놓을 수도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라르바와 나엘라에게 집중하는 이들은 없었다. 단순히 집사와 안주인의 대화로 판단한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을 알고 있으나 대공비 전하께서 마음 쓰실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나엘라는 다시 층계를 올랐다. 라르바가 뒤따르는 것이 느껴져 조용히 덧붙였다.
“황실에 물건을 납품하는 가문이다. 신흥 가문이라 한들 황실의 신뢰를 받고 있으니 무시할 수 없어.”
“황제 폐하의 성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레노피가가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 세레노피와 친목을 다지는 게 아니지.”
“황후를 알아보기 위해 세레노피가와 친분을 다지시는 거라면 이리 대놓고 만남을 가지시는 건 더더욱 피하셔야 합니다.”
라르바가 하일모라와 황후, 그리고 나엘라 사이에 얽혀 있는 것들을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엘라가 방 앞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지안과 가린이 문을 열었다. 문을 지나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춰 라르바를 돌아봤다.
“그대의 평소 태도로 보건대, 얼마큼 용기 내 한 말인지 알겠네. 그만 돌아가 보게.”
라르바가 깊이 고개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편히 쉬십시오.”
그의 인사를 뒤로한 나엘라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혔다. 소파에 앉은 그녀에게 가린과 지안이 다가왔다.
“라르바가 황제의 사람인지 확인해 봐.”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황제와 황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머리도 꽤 좋은 자야.”
얼마큼 황실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는 질문에도 라르바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돌아가는 형세도 잘 아는 눈치였으며, 그에 따른 나엘라의 태도까지 조언했다.
평상시 라르바에 대해 떠올리며 가린이 물었다.
“모시는 주인에게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니 이것저것 알아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에 그가 첨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내 결정을 잠시라도 말린 건 하일모라가 왔을 때밖에 없고.”
하일모라가 왔던 두 번 다, 주변 이들을 물리려는 나엘라에게 목소리를 내었다. 한 번도 속내를 보인 적이 없는 자가 하일모라만 관련되면 나서는 것이다.
“집에 왔던 손님은 공작님과 하일모라 님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똑똑한 이라는 게 거슬려. 왜 그리 똑똑한 이가 집사를? 나 같으면 황제나 황후, 적어도 데테로아 황태자에게 붙었을 거야.”
“뭐,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요.”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린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지안이 나섰다.
“나엘라 님, 아무래도 가린은 황제의 첩자일지도 모릅니다. 감히 나엘라 님의 말에 반박하다니요.”
가린은 얼빠진 표정이 되어 지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지안, 드디어 미친 거야?”
“제가 가린을 처음 만났을 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녀석이라고요.”
“대체 10년도 더 된 이야기를 언제까지 할 거야?”
가린이 어이없어하든 말든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새로운 시각이로군. 가린을 의심하다니.”
억울해진 가린은 다른 이를 끌어들였다.
“그럼 프리야는?”
“프리야는 반죽음이 돼서 도망쳐 왔던 아이잖아. 프리야는 확실하지.”
하녀 중 가장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 프리야다 보니 모두가 당시 상황을 알았다.
황제의 손에서 도망쳐 오느라 그녀를 지키던 용병들은 모두 죽고, 혼자서 마호세르디령까지 숨어들었던 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 중 가장 독하고 가장 상처가 많다.
“그것도 일리가 있지.”
나엘라가 동조하자 가린은 말을 말자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체드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얘기를 하던 중이었나?”
잠시 쉬러 온 것인지 털썩 소파에 앉은 그에게 나엘라는 가린의 과거를 전했다.
“제 돈을 털었던 가린의 어린 시절을 얘기 중이었습니다.”
“소매치기였나?”
체드란은 의외라는 듯 가린을 바라봤다. 말이 별로 없고 조용하기에 과거도 그랬을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범했다.
“아직 어렸을 때니 미래의 소매치기범이었죠.”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어 소매치기들 사이에서 자란 그녀의 미래는 뻔한 노릇이었다.
다만 시내로 놀러 나갔던 나엘라의 주머니를 턴 것이 문제였다. 분노한 공작이 범죄 소탕에 나섰다가 직접 데려왔고, 그렇게 인연이 이어졌다.
“그래서 발이 가볍고 상황 판단이 빨랐군.”
가린에 대해 많은 것을 관찰했는지 체드란은 꽤 정확히 판단했다. 하녀들이 매번 체드란의 시중을 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제 침대는 어디다 버리셨습니까?”
체드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버린 것은 그가 아니니 어디다 버렸는지는 몰랐다.
“이 넓은 저택에 침대가 여기밖에 없나요, 다른 곳에서 가져오면 돼요.”
“대공비의 품격에 걸맞은 고급 침대는 없지.”
“아무 침대나 쓰면 되죠.”
“하인들이 뭐라 생각할지 퍽 궁금하군.”
나엘라가 팍 인상을 쓰자 체드란이 되레 물었다.
“나와 자는 게 그렇게 싫을 줄은 몰랐군.”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했던가, 딱 그런 꼴이었다.
“어제는 잘만 자더니 하루 사이에 마음이 변했나? 날 가지고 놀았나?”
푸른 눈동자에는 얼핏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생떼를 부리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 모습이 얼마나 황당하던지 나엘라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같이 자는 게 뭐라고.”
체드란이 씨익 웃었다. 눈이 살며시 접히는데 장난이 통한 악동 같은 미소라 나엘라의 눈은 다른 의미로 가늘어졌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싶기도 해 당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건 그렇고, 황후가 화가 많이 났나 봐요.”
“황후?”
“제가 티 파티 전날에 파티를 열기로 했잖아요. 황후에게도 초대장을 보냈고요.”
“답장은 왔나?”
“없었습니다. 하일모라가 왔다 갔는데 화가 많이 난 것 같다고 전해 주더라고요.”
“그 성격에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체드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황후 성격을 생각하면 화를 안 내는 게 어색한 일이었다.
“혹시 내가 황후에게 심하게 말하면 어떤 느낌일 것 같아요?”
“심하게 말하다니, 뭘?”
에스토를 만났던 날, 정신이 반쯤 나가 황후에게 제대로 들이받았다. 나엘라는 줄곧 마음에 걸렸던 것을 물었다.
“내가 막 황후에게 막말하고 예의 없이 굴었다면요?”
“그랬나?”
“황실 파티 때요.”
체드란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말없이 당하고 온 건 아니군. 가서 전하게. 남편이 이상한 여자들과 어울리지 말라 했다고.”
설마 나엘라가 아무 말 없이 당하고 온 줄 알았나? 그럴 사람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대로 전할게요.”
“좋은 자세군.”
그 뒤로 소소한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잠시 나갔던 가린이 손에 화려한 편지를 들고 나타났다. 흰색 종이에 황금빛 문양을 박아 넣은, 누가 보아도 황실에서 보낸 편지였다.
“황후에게 답신이 왔습니다.”
나엘라의 손에 넘어온 편지 봉투는 단번에 찢어져 내용물을 훤히 내비쳤다. 화려한 글씨체에 품격 있는 문체가 가득 담긴 편지였다.
빠르게 훑어본 나엘라는 바로 체드란에게 넘겼다.
“무슨 내용인가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지안이 묻자 나엘라의 한쪽 입꼬리가 삐죽 올라가더니 곧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본인은 다음 날 티 파티 준비에 바빠서 파르로시 황녀를 보내겠다네.”
체드란도 편지를 다 읽은 건지 종이를 접어 가린에게 건넸다.
“똑똑한 처사군.”
맞는 말이었다. 여우처럼 빠져나가는 황후가 얄밉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파르로시가 제 파티에서 안하무인처럼 굴다 굴욕적인 대우를 받는다면 황후의 명분이 되죠. 다음 날 티 파티에서 저를 아니꼽게 대할 수 있는.”
“그렇다고 그녀가 제멋대로 행동하게 둔다면 그대의 체면은 떨어지고 황후는 승리감을 맛보겠지.”
“황후에게 파르로시는 참 유용한 패네요.”
나엘라도 이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되어 딸을 이렇게 이용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의 방식과 그들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때가 왔다.
“제가 딸이었으면 바로 가출했을 거예요.”
“파르로시는 황후가 쓰다 버릴 패라고 생각해야 옳아. 그래야 황후의 행동을 예상할 수 있을 테니.”
그녀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을까.
괜한 씁쓸함이 뒤따랐으나 나엘라는 생각을 떨쳐 냈다. 내일 마주할 파르로시의 태도와 그 대응 방법이 더 걱정이었다.
“요즘 파르로시에게 베르에티 영애를 붙였다고 들었어요. 그녀의 행동거지를 교정하는 모양이에요.”
“루부스 후작 영애 말인가? 황후가 파르로시를 본격적으로 써먹으려 하나 보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파르로시도 마냥 예전처럼 굴진 않을 거예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
“대신 본성을 감출 순 있죠.”
나엘라는 파르로시를 모른다. 그나마 아는 게 있다면 그녀가 황후를 무서워한다는 점이다. 황후가 언질을 줬다면 파르로시는 노력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엘라는 손뼉을 쳤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제게 방법이 하나 있어요. 파르로시가 화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자, 단번에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 만한 방법이요.”
“단숨에? 황후의 말을 따르려 할 텐데 그게 가능한가?”
“파르로시가 애절하게 매달리는 단 하나가 있잖아요.”
“어떤 것 말이지?”
“당신이요.”
나엘라가 체드란을 척 가리키자 하녀들의 시선도 그에게로 향했다.
“대신 체드란이 조금 도와줘야 해요.”
“어떻게?”
“불타는 신혼인 척하는 거죠. 눈만 마주쳐도 막 열기가 오르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었으면 좋겠군.”
분명 하일모라가 원인이다. 저런 외설적인 부분은 대부분 하일모라의 입에서 나왔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가 다정을 넘어 열렬한 모습을 보인대도 파르로시의 입장에선 화를 낼 수가 없어요. 그 와중에 몇몇 이들이 속을 살살 긁기까지 한다면 단번에 집으로 돌아가겠죠?”
꽤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역시 나엘라는 똑똑하단 생각과 함께 체드란은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