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수도에 있는 노헤스카 저택에서 파티가 열렸다. 마호세르디와 황제를 따르는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황태자를 따르는 귀족들까지 대거 참석했다.
황태자는 느지막이 잠깐 들를 예정이라고 전해 왔으며 황제에게는 예의상 초대장을 보냈지만, 거절의 답신이 왔다.
황제가 사사로이 발걸음 할 수 없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나엘라는 하일모라를 초대 못 한 것이 내심 아쉬웠다.
황후의 사람이라 알려진 하일모라기에 이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황후 역시 두 사람의 친분을 제대로 모를 테니 어쩔 수 없었다.
드디어 저택의 모든 이들과 톨레로 상단의 원조, 황제 측 상단들의 원조 속에서 화려한 파티가 열렸다.
“정말 엄청나네요.”
한 귀부인이 저택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온갖 상단들이 어떻게든 줄을 잡으려고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죠?”
이번 파티는 권력이 곧 자본이 됨을 시사한 경우였다. 상단들은 앞다퉈 무상으로 제공하겠다, 초대만 해 달라며 물건들 보내왔다. 그중 신중하게 선정한 몇 곳만 초대했다.
당연히 저택의 모든 가구, 장식품, 소소한 물건까지 최고가를 달리는 명품으로만 채워졌다. 그 틈에 나엘라가 슬쩍 침대를 주문하려고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께서는 아직이시네요.”
파티의 주최자가 손님을 맞이함은 당연하나 통용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신분제의 꼭대기에 앉은 황실 사람들이다. 황실에 발이 걸쳐져 있는 대공 부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신 마호세르디 공작이 주인 노릇을 자처했다. 공작이 나섰으니 손님을 소홀히 했다는 평은 전혀 없었다.
어느새 연회홀에 사람이 가득 찼다. 그 순간만을 기다린 듯 곧이어 주인공들이 도착했다.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 전하와 나엘라 노헤스카 대공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아치형 홀 입구에 대공 부부가 등장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경쾌하던 음악은 어느새 묵직한 음악으로 바뀌었고, 바다가 갈라지듯 사람들 사이로 길이 생겼다.
2층 층계 위에서 나타난 부부는 1층과 연결된 커다란 계단을 내려갔다. 붉은 레드 카펫이 깔린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즈음에 부부는 걸음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봤다.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체드란이 인사말을 대신했다.
“오늘 이 자리가 얼마나 뜻깊은 자리인지 많은 분이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흰색 연미복을 입고 있는 체드란은 검은색을 입었을 때완 느낌이 전혀 달랐다. 어린아이들이 동화책에서 보던 황자님이 튀어나온 듯했다.
물론 체드란은 진짜 황자였었지만.
“이 자리가 화합과 미래를 상징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 귀족의 화합, 그것은 황후에 대한 반기를 의미했고 미래엔 결국 이 모임에 참석한 이들만 남게 되리란 것을 의미했다.
일반적인 가주들보다 젊은 체드란답게 진취적인 메시지였다.
“그동안 수많은 귀족을 이끌었던 마호세르디 공작님을 대신하여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평상시 말주변이 없던 모습이 무색할 만큼 체드란은 멋진 연설을 이어 나갔다. 물론 열 몇 가지에 달하는 대본과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되었다.
“저는 수많은 역사 속에서 제국을 지켰던 노헤스카의 가주로서 앞으로도 제국을 위협하는 이들이 있다면 검을 들기에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그 뒤로도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벅찬 연설이 이어지고, 곧 감사합니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체드란의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엘라는 작게 미소 지으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오가는 눈길 속에 칭찬과 하루를 버틸 응원을 담은 채로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오늘은 많은 일이 예정된 날, 앞에 나서기보다 백조와 같이 물 밑에서만 열심히 발을 놀릴 것이다. 속으로 숨을 삼킨 나엘라는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런 부부에게 가장 먼저 공작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었다.
*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번 황실 파티 때는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저희는 마호세르디 영지와 맞닿아 있는 영지입니다. 조금 끄트머리이긴 하나 오랫동안 공작님을 믿고 따랐죠.”
“세상에, 황실 파티와 버금가는 파티네요. 저 화병,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데 어떻게 들이셨나요? 역시 노헤스카네요.”
그야말로 홍수 같은 인파였다. 나엘라는 옅은 미소를 유지하며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에 요령을 부리기도 어려웠다. 오래 대화하지 못하니 인상 깊은 말로 나엘라의 이미지를 심어 놓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체드란도 마찬가지였다. 경련이 나는지 그는 어느 순간부터 웃지도 않았다. 대신 신중한 말로 미소를 대체했다.
“이 많은 물건을 납품한 상단이 어디라고 하셨죠? 수도에선 처음 듣는 이름이라 중요히 여기지 않았는데 대공비 전하의 안목이 뛰어나신 모양이에요.”
나엘라는 틈틈이 톨레로 상단을 홍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도 새로 눈여겨본 상단입니다. 톨레로 상단이라고, 우부라 가문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믿을 만하더군요.”
그런 상단이 왜 이제야 수도에 진출했느냐며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혹여 가문에 피해가 갈까 그랬답니다. 아무래도 우부라 가문은 청렴함을 원칙으로 삼는 곳이라 더욱 조심했겠죠. 하지만 제가 수도 진출을 추천했습니다. 상단주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에요. 다른 나라와의 무역도 활발히 진행 중이고요.”
무역이 아니라 밀수지만 나엘라는 웃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리 말했다.
수도 진출을 추천했다는 이야기는 논의된 것이 아니기에 체드란도 내심 놀랐으나 이제 와서 반박할 수도 없었다. 상단으로선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니 말이다.
“저기, 톨레로 상단의 상단주님이 와 계시는군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코더가 다가왔다.
“코더 우부라라고 합니다.”
그가 인사를 건네자 너도나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대공비 전하의 추천으로 수도 진출을 결정하신 거라면서요? 지방에만 머물기엔 너무 아까운 수완이었는데, 다행이에요.”
나엘라가 마음에 들어하는 상단이니 다른 이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쌓인 내공이 있는지 그도 반갑게 답했다.
“대공비 전하가 아니었으면 저희 상단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사람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코더와 이야기를 나눴다. 발 빠른 이는 사업 이야기까지 언질했다. 톨레로로서는 오늘 큰 이익을 얻은 셈이었다.
톨레로 상단의 성공적인 수도 데뷔를 뒤로하고 대공 부부는 다른 이들에게 향했다.
먼저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콧대 높은 사람들은 없으나 그게 참석한 이들 전부는 아니다. 먼저 온 이들에게 밀려 인사를 건네지 못한 사람들이나 쉽게 말을 걸지 못하는 성격의 인물들도 많았다.
이제부터는 또 홀을 한 바퀴 돌며 남은 인사를 전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주요 인물들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야겠지.
나엘라의 속에선 한숨이 차올랐다.
그때 홀 입구를 지키던 하인이 새로운 초대객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데테로아 테사 황태자 전하와 파르로시 테사 5황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데테로아와 파르로시가 함께 왔다고? 입구에서 만났나?
정말 뜻밖의 조합이라 체드란도 놀랐는지 입구를 응시했다.
“제가 조금 늦었나 봅니다.”
환한 미소를 걸고 있는 데테로아와 얼굴을 잔뜩 굳은 채 그와 팔짱을 끼고 있는 파르로시가 입장했다.
체드란과 나엘라는 주최자로서 두 사람을 맞았다. 예를 갖춘 인사를 건네고, 체드란은 데테로아에게 물었다.
“어떻게 두 분이 같이 오셨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단을 보내 모셔 올 것을 그랬습니다.”
“아닙니다. 대공이 그런 수고를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침 파르로시가 참석한다기에 제가 함께 가자 청했습니다.”
가식적인 미소가 아닌 진정으로 흡족해 보이는 데테로아의 웃음에서 나엘라는 앞뒤 상황을 파악했다.
데테로아는 죽은 페트론에게 만큼이나 파르로시에게도 당한 것이 많았다.
항상 황후와 함께 다니기에 때를 잡지 못하던 데테로아가 오늘 파르로시 혼자 움직인다는 소식에 신나서 달려간 것이다. 이 순간처럼 갚아 주기에 적절한 날은 없었다.
게다가 약혼자가 없어 남매끼리 들어온 셈이니 오히려 예법에도 맞았다.
다만 확연히 굳어진 파르로시의 표정과 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이들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거나 이를 악물어 웃음을 참았다. 오는 내내 파르로시에게 얼마나 타박을 줬을지 눈에 훤했다.
“파르로시, 대공께 인사드리지 않고 뭘 하느냐.”
영락없는 사이 좋은 오누이였다.
파르로시는 분노를 참는지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데테로아를 괴롭히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그땐 황후가 한참 잘나갈 적인 데다 그도 황태자가 되기 전이었다.
이제는 예전과 입장이 다름을 그녀도 알고 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라버니.”
그래도 체드란을 봐서 좋은지 그녀는 온화한 눈빛으로 인사를 건네었다. 그때 옆에 있던 데테로아가 눈에 띄게 소스라치며 타박했다.
“대체 그 무슨 예의 없는 언행이더냐. 그런 호칭은 오히려 대공께 실례임을 모르느냐.”
황실을 박차고 나간 사람한테 오라버니라니, 데테로아의 말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체드란의 앞에서까지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는지 그녀는 바로 도끼눈이 되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셨다곤 하나, 저와 오라버니의 사이까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불미스러운 일이라니, 말을 삼가도록 해라. 여기가 어디라고……!”
늘 환한 웃음만 짓고 다니던 데테로아가 엄한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표정을 더욱 허물어뜨리는 파르로시를 무시한 채로 데테로아가 대신 체드란에게 사과를 건넸다.
“동생의 부족함이 드러나 부끄럽습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대공께선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괜찮습니다. 축하를 위해 이 자리에 와 주신 것만으로 감사해야지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으나 제 편을 들어줬다 싶었는지 파르로시의 얼굴이 밝아졌다. 순간순간 드러나는 표정이 너무 솔직했다.
“감사합니다. 뭐하느냐, 파르로시. 대공비께도 인사를 드리거라.”
어떻게 표정이 저리 빨리 변할 수 있을까. 휙휙 바뀌던 얼굴은 나엘라를 보며 가장 표독스러워졌다.
“반갑습니다, 대공비.”
전혀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건네 온 인사는 저번과 다르게 존댓말이었다. 예절 수업을 기본부터 다시 배운 모양이었다. 빠르게 바뀐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수업 진도가 표정 관리까지는 나가지 않은 모양이지? 베르에티에게 좀 더 자세히 가르치라 전해야 할 것 같았다.
“파르로시.”
데테로아가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체드란과 나엘라가 준비한 것을 꺼내 보기도 전에 파르로시는 돌아가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