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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92)화 (92/220)

91화

“대공비께선 황실의 중요한 사람이다. 예법을 따지면 황녀보다 높은 신분이시고.”

나엘라는 별다른 말 없이 파르로시를 바라보았다. 엄밀히 따지면 그녀는 적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파르로시에겐 더 잔인하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파르로시 또한 나엘라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터다. 미안해하기엔 제가 그리 마음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내일 황후를 만났을 때 할 말쯤은 있어야 했다.

“괜찮습니다, 황태자 전하. 호칭 같은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저는 황녀님께서 파티를 잘 즐기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엘라는 파르로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를 보면 어딘지 마음이 걸리는데, 정확히 뭐가 불편한 건지 모르겠는 게 문제였다.

“감사합니다. 제가 돌아가면 따끔하게 혼을 낼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자 데테로아는 자신을 기다리는 귀족들 쪽으로 슬쩍 눈길을 돌렸다가 체드란을 보았다. 그녀를 남겨두고 가도 되겠냐는 데테로아의 눈빛에 체드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테로아를 뒤따르지 않은 채 파르로시는 나엘라와 체드란의 곁에 남았다. 세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주변 이들이 조금씩 거리를 벌려 주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르로시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머니에 관해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파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독대 신청은 과한 법이다.

상대가 평생 로열패밀리로서 누리고 살았던 것을 인정해야 할까, 아니면 한마디를 해야 할까.

하필 주제도 황후인지라 어느 방향으로든 이득이 될 정보일 게 뻔하다.

그래서 되레 그 부분이 걸렸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주최자로서 자리를 비워선 안 되나, 남매의 시간을 방해하진 않겠습니다.”

체드란이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느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나엘라의 표정은 단호했다.

체드란의 눈빛도, 그를 받아치는 나엘라의 눈빛도 파르로시는 모두 보았다. 그런데도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아 내었다.

“잠시면 됩니다, 오라버니.”

체드란은 탐탁지 않은 기색이 만연했다.

“다녀오세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체드란은 자리를 옮겼다.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엘라는 몸을 돌렸다. 귀부인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간 그녀는 줄리 부인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전혀 모른 채로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정신이 팔린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나엘라는 행동이 부산한 사람을 굳이 피하지 않고 부딪혔다.

“어머!”

한 귀부인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이 나엘라의 드레스를 물들였다. 그런데도 나엘라는 그저 화사하게 웃었다.

“제가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 예법이 몸에 익지 않은 모양입니다. 부인의 와인이 아깝게 되었네요.”

실수한 것은 귀부인인데 도리어 나엘라가 사과하니 불편한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귀부인도 어쩔 줄 몰라하며 연신 사과했다.

“아닙니다. 제가 잘못한 건데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잠시 드레스를 갈아입고 와야겠어요.”

옷을 갈아입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한다. 파티의 주최자가 모두 자리를 비우게 된 것이다.

“줄리 부인과 공작님, 저 대신 파티를 부탁드려요. 대공 전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요.”

약간의 소란 때문에 이미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 있었다. 그 속엔 줄리와 아버지의 것도 섞여 있었다.

나엘라는 멀리서 자신을 보고 있는 줄리 부인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자리를 떴다. 드레스를 갈아입는다는 건 부수적인 악세서리와 화장도 바꾼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한 시간 정도는 비워도 괜찮을 터다.

그사이에 체드란도 이야기를 끝내고 나올 테고.

나엘라가 연회홀을 빠져나와 침실로 향하자 하녀들이 뒤를 따랐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가 사람 없는 복도를 울렸다.

그 뒤를 따라 걷는 이들 중 발걸음 소리를 내는 이가 없으니 다른 이의 귀엔 나엘라 혼자 움직인 듯 들릴 것이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녀들이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드레스는 지금 입은 거랑 최대한 비슷하게. 장신구와 다른 것들은 일절 건드리지 않고 갈아입을 거야.”

지안이 침실 내에 또 다른 방인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들을 확인했다.

“파르로시 황녀 때문에 그러십니까.”

나엘라가 드레스를 갈아입으려 일부러 유도한 것을 알았다. 제니와 가린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궁금하지 않아? 왜 황녀는 체드란에게 그리 애틋할까. 체드란이 어떻게 대하든 황녀는 그를 바라보잖아.”

“누구도 그녀와 같은 삶을 살아 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요.”

파르로시에 대한 대비가 없던 것은 아니다. 내일에 대한 대비도 해 놨고 파르로시가 일찍 돌아가게 할 방법도 알았다.

문제는 나엘라의 마음속에 자꾸만 작은 가시가 박힌 것처럼 거슬렸다.

“나엘라 님.”

가린은 나엘라의 시선 속에서도 단호히 말했다.

“파르로시 황녀는 적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마세요.”

나엘라도 알고 있었다. 파르로시에게 답지 않은 연민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체드란은 칼같이 끊어 내긴 하지만 황후를 대하듯 파르로시에게 날을 세우진 않는다.

나엘라가 보기엔 같은 결이지만, 그의 애정이 간절한 파르로시에겐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보답받을 수 없는 애정에 희망을 품고 매달리며 학대 속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파르로시의 굴레였다.

그러한 점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그건 거기까지, 전쟁을 겪는 동안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나하나 안쓰러워하기엔 나엘라는 너무 많은 것들을 겪었다.

“황후에게 채찍으로 체벌받았다면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 흉터가 남았겠지.”

“등이나 엉덩이, 다리 정도가 되겠군요.”

“채찍으로 다리를 때리기엔 높이가 안 맞아. 가격 위치가 너무 낮아.”

“아마 등이 가장 유력할 겁니다.”

“혹시 파티 중 드레스의 등 부분을 찢어지게 할 방법이 있어?”

다들 생각을 하는 듯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방금 드레스를 찾아 가져온 지안만이 나엘라에게 되물었다.

“파르로시 황녀가 그동안 학대당해 왔다는 걸 공개하시게요?”

“황녀를 때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금방 황후의 이야기가 이리저리 돌기 시작할 거야.”

“파르로시 황녀는 치욕 속에 살게 되겠군요. 앞으로 공식 석상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고요. 적어도 황녀 하나는 처리하는 거네요.”

“적어도….”

나엘라가 마지막까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적어도 파르로시가 더는 황후에게 맞지 않겠지. 황후는 세간의 시선을 의식할 테니.”

자신이 말하고도 혀를 차게 되었다. 사교계에서 파르로시를 단번에 물러서게 만들고 황후도 마음껏 날뛰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방법이었다.

“파르로시 황녀에게는 고된 밤이 되겠네요.”

지안의 말에도 나엘라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가 흔들리면 그녀의 밑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영향을 받는다. 윗사람이 작게 흔들린 대도 밑에 있는 사람들에겐 태풍이 부는 듯한 세기일 터다.

“파르로시 황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약하고 당하기만 했던 사람은 아니었을 거야.”

폭력은 대물림된다고 하던가, 황후와 똑 닮은 파르로시가 분을 어떻게 풀었을지 뻔했다.

지안이 나엘라의 말에 동조하며 그녀의 결정을 도왔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소문이라고 하더군요. 황녀의 하녀들에게도 오늘 고된 밤일 겁니다.”

이 이상 고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나엘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처리는 내가 할 테니 파르로시의 드레스를 찢어 놔. 꼭 등이 보여야 해.”

그녀도 어서 드레스를 갈아입고 돌아가야 했다.

“준비하고 나가자.”

나엘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안과 다른 이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체드란은 정원을 걸으며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참아 내었다. 파르로시를 보면 미안함과 죄책감이 항상 뒤따랐다.

비록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 한들 그녀에게 빚이 생겼다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했던 제안은 아직도 유효하다.”

체드란의 말에 파르로시는 처연하게 웃었다.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면요? 다른 나라로 가면요? 그럼 제가 멀쩡히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파르로시 또한 그가 왜 자신을 칼같이 쳐 내는지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의 감정만은 어떤 것보다도 명확히 느껴졌다.

“제게 오라버니가 없는 곳은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체드란은 걸음을 멈췄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모진 대우를 감수하며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도, 밀어내는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거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이었다.”

“아니요. 한 번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체드란이 알게 모르게 도와주었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황후의 입으로 직접 전해 들었으니까.

어머니는 비꼬듯 알려 주었지만, 그것이 파르로시를 살게 했다.

“황후가 무너지면 너 또한 죽는다. 데테로아도, 나도 너를 봐주지 않아.”

“상관없습니다.”

“네가 나엘라를 건드려도 마찬가지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나온 까닭이다.

“마호세르디 영애는…!”

“대공비다. 나의 아내이고 대공가의 안주인이다.”

붉은 머리에 맞춰 붉게 칠한 입술이 자꾸만 뭉개졌다.

“제게 잔인하게 굴지 말아 주세요.”

“잔인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고 현실이다.”

“진짜 좋아하는 것도 아니시잖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하지?”

파르로시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저 산책이나 마저 하자며 정보를 미끼로 체드란을 이끌려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은 파르로시를 무너트리기에 충분하니까.

“그녀를 보면 자꾸만 웃게 되고, 함께 식사나 산책도 하고 싶어진다. 그녀의 짐을 나누어 짊어지는 대신 나엘라가 울지 않았으면, 아니 차라리 울었으면 해. 그리고 그녀를 위로하는 사람은 나이길 바란다.”

나엘라가 새벽 내내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도, 다른 일로 힘들어할 때도 그렇게 느꼈다. 자신에게 평온한 일상을 선물하겠다 약속해 주었을 때부터 그 미래에 나엘라가 있기를 바랐다.

“네가 봤을 땐 어떻던가, 이게 사랑인 것 같은가.”

체드란의 눈은 고요했고 파르로시는 격랑 속에 휩싸였다.

“나는 지금 답을 알았네만.”

답을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들어야 할 이는 지금 이곳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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