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파티장으로 돌아온 나엘라는 주변을 둘러보며 체드란을 찾았다. 드레스만 갈아입고 바로 왔더니 생각보다 이르게 온 탓일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신 분들이 이렇게 자리를 비우시면 쓰나요.”
줄리 부인의 애정 섞인 꾸중에 나엘라는 미소 지었다.
“드레스를 갈아입느라 어쩔 수가 없었네요.”
“이상하네.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들었나? 실수 같진 않았는데.”
놀림이 섞여 있는 말이지만 눈썰미 좋은 부인을 어찌 이기랴. 나엘라는 고분고분 답했다.
“저 대신 손님들을 상대해 주셨으니 보답을 드려야겠네요.”
“아쉽게도 전 필요한 게 없답니다.”
“백작 영식이 새 검을 찾는다지요?”
부인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줄리 부인도 자식에게 들어오는 선물은 고민이 되는가 보다. 곧 부인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공작님께 부탁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마호세르디의 장인들이 저를 더 예뻐한다는 건 알고 계신가요? 수석 대장장이께서도 제 부탁이면 다른 걸 다 제쳐 두고 들어주셨습니다.”
고집불통 대장장이 조알론조차 나엘라라면 두 손 두 발을 다 드는 판에 다른 장인들은 오죽할까.
특히나 어르신들은 나엘라를 친손주처럼 예뻐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담백하게 감사 인사를 전한 부인이 천천히 물러났다. 주인공을 오래 붙잡아 둘 순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엘라가 다른 이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로자리안 페즈몽레라고 합니다.”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 온 이는 페즈몽레 백작의 아내, 로자리안이었다. 건강이 안 좋아 대공령에서 열었던 파티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수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의외의 인물이었으나 나엘라는 반갑게 맞이했다.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자마자 수도로 올라왔습니다. 남편은 대공령을 떠날 수 없어 저 혼자 왔으니 같이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얗고 마른 로자리안은 병약한 티가 났으나 눈빛만은 올곧았다. 사려 깊은 성격이 드러나는 눈빛이었다. 어딘지 페즈몽레 백작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오는 길이 고되진 않으셨나요? 조금 더 몸을 추스르고 오셔도 좋았을 텐데요.”
대공 부부가 올라오는 바람에 페즈몽레 백작이 대신 대공령을 살피고 있었다. 맡긴 일이 한둘이 아니니 그가 올라오기란 어려울 터다.
약한 몸으로 혼자 올라왔을 부인이 걱정되었다.
“다행히 아가산 백작 부인께서 함께 올라와 주셨습니다.”
로자리안 부인이 가리킨 곳을 보자 아가산 백작 부부가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공 측에 손을 들어주겠다 하더니 제대로 활동하려는 모양이었다. 아가산 백작은 여러 사람과 안면을 익히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제가 진작 신경 쓸 걸 그랬습니다. 그래도 노헤스카의 가장 큰 가신 가문인데.”
“아닙니다. 아가산 백작 부인께서 많은 호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나엘라는 매우 흡족하게 웃었다. 아가산 백작 부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페즈몽레 백작가는 대공가에 중요한 가신이기에 아가산 백작가에서 많은 도움을 준 것이다. 이번엔 아가산 백작가에 감사를 표해야 했다.
“가서 인사를 해야겠군요. 아가산 백작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보상은 확실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처세술이 남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참 마음에 들었다.
나엘라가 아가산 백작 부부에게 다가가자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시선을 돌렸다. 다들 고개 숙여 예의를 차릴 때 백작 부부도 함께 인사를 건네왔다.
그 인사에 맞춰 그녀도 그들과의 친분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뵙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수도에서 불편함은 없으신가요.”
“불편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수도에서 대공비 전하를 뵙게 되니 더욱 영광입니다.”
“그렇군요. 페즈몽레 백작 부인께서 신세를 졌다 들었습니다. 이 감사를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가산 백작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과찬이십니다. 저희가 한 일은 미비하니 그리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저희 가문의 사람이 신세를 졌는데 미비하다니요. 사양하실 것 없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 주세요.”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나엘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톨레로 상단과 전폭적인 관계를 이어 나가실 듯한데 제가 그 관계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처세술이 선을 넘지도 않고 깔끔하다. 나엘라는 그리 생각했다.
톨레로 상단과의 관계에 보탬이 되겠다는 말은 인연을 맺고 싶다는 말과 같았다. 그것도 대공가의 이름이 보증하는 관계 속에서.
나엘라로선 그녀의 소개로 톨레로 상단이 거래처를 확보한 것과 같고, 아가산 백작가로선 동부와 남부를 넘어 다른 지역에까지 손을 댈 기회였다.
대공가에서 밀어주는 상단이니 수도에 자리 잡는 것 또한 시간문제인 셈. 앞으로 기회는 더 많을 것이다. 대놓고 나서겠다는 것도 아니고 한 발 정도만 걸치겠다는 의미이니 나엘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언제든지요. 아가산 백작가가 도와준다면 더욱 좋은 일이 많지 않겠습니까.”
나엘라는 웃고 있는 아가산 백작을 보며 속으로 간을 보았다. 만약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아가산 백작이 신의를 지킨다면 대공가의 행정 담당으로 써먹어도 참 좋을 인재였다.
사피오가 빠진 빈자리를 충분히 메꾸고도 남으리라.
아가산 백작과의 대화와 백작 부인과의 인사까지 끝낸 뒤 나엘라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페즈몽레 부인은 아가산 백작 부부와 함께 있겠다 하여 마음 편히 움직였다.
또 다른 인재가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입구를 지나 걸어오는 체드란이 보였다. 드디어 파르로시와 대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황녀는 어디 가고 혼자 들어오는 거지? 이상한 느낌에 다가가자 나엘라를 발견한 체드란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거 아는가?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네.”
난데없는 그의 말에 주변에 있던 귀부인들이 탄성을 뱉었다.
“어머, 어머.”
“세상에, 애처가라더니.”
“저렇게 다정할 수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나엘라는 그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그냥 내가 오늘 중요한 것을 깨달아서 말이야.”
체드란은 문득 놀란 나엘라의 얼굴이 귀엽게 느껴졌다.
세상에, 귀엽다니! 사랑을 깨닫고 나자 콩깍지가 제대로 씐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좋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느 호사가들의 사랑 타령도, 음유 시인들의 사랑가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깨닫게 된 계기는 조금 이상하지만, 때론 이런 사랑도 있는 법이었다. 그 어느 날, 나엘라에게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대도 같은 마음이기를.”
귀부인들의 부채가 차르륵 펼쳐지는 소리 뒤로 탄식들이 끊이지 않았다. 세기의 로맨스라더니, 저런 남자가 존재하긴 하는 모양이라고 서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얼굴도 완벽해, 몸매도 완벽해.
계급, 신분, 태생, 인망까지 두루 완벽한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엘라는 와닿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잠깐 얘기 좀 해요.”
나엘라는 황급히 그를 끌고 인적 드문 곳으로 향했다. 이 남자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어서 자리를 피해야 했다.
본인이 한 말이 어떤 파장을 부를지도 모른 채, 체드란은 가만히 끌려가며 그저 웃었다.
“대체 무슨 소리예요? 파르로시 황녀는요?”
소리를 죽여 따져 물었으나 체드란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돌아갔네.”
나엘라는 입을 떠억 벌렸다.
어이가 없다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녀들이 파르로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갑자기요? 왜요?”
“그대도 금방 보내려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체드란이 보내 버렸다고요?”
“그랬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더 듣기를 거부한 파르로시가 등을 돌리고 그만 가 보겠다고 전했다. 붙잡을 수도 없기에 배웅만 하고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엘라에 대한 마음을 곱씹으며, 따뜻해진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서 있다 들어온 것이다.
“황후에 관한 이야기는요?”
“안 들었네. 정보는 통제가 가능하지. 제한된 정보인지도 확인할 수 없고, 어느 방향이든 도움이 된다손 한 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나를 만나려 들 거야.”
나엘라는 발을 동동 구르려다 참았다. 기껏 세워 놓은 계획들이 무산되었다. 환장할 노릇이다.
이대로 보냈다간 내일 황후에게서도 말이 나올 테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좋지 못할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체드란과 얘기 후 돌아갔다 그러면 다른 이들에게 빌미를 준 것과 다름없었다. 체드란이 내쫓은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황후야 시비를 걸기 위해서라면 없는 말도 지어낼 사람 아닌가.
“그런데 그대는 내 말을 듣고도 아무 생각이 안 드는가?”
“뭐요?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는 거요?”
“그래.”
나엘라는 울컥 올라오려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장 코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해야 맞다. 이 남자는 우선순위도 모르나?
“지금 사랑이 중요해요? 체드란이 오늘처럼 도움 안 되는 건 처음이에요.”
나엘라는 자신의 마음을 한껏 표현했다.
대체 뭐라 했길래 그 황녀가 돌아가 버렸다는 건가.
답답해하는 나엘라와 달리 체드란은 천천히 미소를 지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 머리칼을 정리해 주는 것처럼 꾹꾹 눌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부부의 다정한 스킨십처럼 보일 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힘이 의외로 강해 목에 힘을 줘야 했다. 그러다가도 한 번은 힘에 눌려 휙 목이 꺾였다.
인적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봤다면 저게 무슨 꼴이냐며 수군거렸을 테다.
“나엘라, 눈치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만큼은 용서가 안 되는군.”
“갑자기요?”
“나 이번엔 제대로 삐졌네. 당분간 각오해야 할 걸세.”
체드란은 그 말을 끝으로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걸어가 버렸다.
“뭐, 뭐야?”
돌아선 체드란의 표정엔 서운함까지 담겨 있어 나엘라는 정말로 멍해졌다. 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