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이제야 좀 한가해지셨군요.”
체드란이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멍하니 보던 나엘라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바라보고 있던 이와 매우 닮은 이가 부드럽게 웃고 있어 그 낯섦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러나 금세 다시 웃으며 반갑게 맞았다.
“잠시 사람들이 시간을 내준 것이지요. 아직 인사해야 할 이들이 한참 남았습니다.”
데테로아는 나엘라가 바라보고 있던 곳을 확인하고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주인공이시니 오래 붙잡지는 못하겠군요.”
“제가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주인공 아니겠습니까. 서로의 화합을 위한 자리인데 어찌 주인공이 있을까요.”
문득 느껴지는 낯익음이 있어 데테로아는 소리 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엘라 누님이 생각나네요. 두 분이 친했다고 들었습니다.”
“지엘라 부인께서요?”
사람들은 왜 나엘라와 지엘라가 친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데테로아가 그렇게 들었다면 필시 지엘라를 통해 들었거나 공작을 통해 들었을 테니 아니라고 하기도 모호했다.
“그러고 보니 지엘라 부인께서는 요양을 잘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조만간 휴양지를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제가 마침 아는 곳이 있어 추천해 드렸는데, 두 분이 친하시니 잠시 시간을 내어 함께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디를 추천하셨습니까?”
“아그노멘, 유명한 휴양지죠. 곧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겠군요.”
나엘라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그노멘, 별명, 별호, 이명(異名)이란 뜻이 있는 영지였다. 왜 그런 뜻이 지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봄에는 꽃나무들이 꽃을 활짝 피워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나 소풍, 꽃축제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과부가 된 지엘라 부인을 달래기엔 손색이 없는 곳이다. 상 중에 휴양지를 간 그녀의 행동에 대해 지적할 사람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엘라가 위로하기 위해 추천했다는 명목으로 함께 간다면 뒷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휴양만 하고 오면 되겠습니까?”
“그럼요. 제 누이를 부탁드립니다, 형수님.”
데테로아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자 나엘라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럼 대공께서는 혼자 저택을 지키셔야겠군요. 여자들의 나들이에 신사분 혼자 함께 가기엔 얼마나 어색하시겠습니까.”
데테로아의 눈빛이 잠시 날카로워졌다. 그녀를 살피는 듯한 눈길에도 나엘라는 여유롭기만 했다.
“대공과 지엘라 누님의 사이가 나쁘지 않으니 함께 가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저는 대공께서 황실의 모든 분과 사이가 좋지 않다 들었는데요.”
나엘라가 이리 구는 이유는 데테로아의 목적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아그노멘은 애초에 나엘라가 다녀오려 했던 곳이다. 아그노멘의 바로 옆에는 페렌츠가 있고, 그곳은 황후가 반란군을 숨겨 놨다 예상되는 장소니까.
데테로아의 의도는 체드란이 페렌츠를 몰래 다녀올 만한 명목을 만든 거다.
주목적이 나엘라와 지엘라의 나들이라면 다른 이들도 딱히 신경 쓰지 않을 테고, 체드란이 함께 갔다가 둘의 나들이를 방해하지 않으려 자리를 피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만두면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을 데테로아가 굳이 나선 것이다. 마치 나엘라를 떠보려는 의도거나 나엘라를 믿지 못하기 때문인 듯도 싶었다.
“황태자 전하, 저는 말입니다.”
지나가던 하인을 불러 트레이 위에 올려진 샴페인을 받아 든 나엘라가 데테로아에게 건넸다.
자신의 말이 쓸 테니 단맛을 내는 샴페인으로 입을 헹구면 좀 낫지 않을까.
“보안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 누군가 정보를 흘렸다면 그자가 제 남편이라도 매우 혼나야겠지요?”
데테로아는 체드란의 협력자지, 제 협력자가 아니다. 그가 어느 경로로 페렌츠에 대해 알았는지는 모르나 분명 체드란이 연관되어 있을 터.
제가 알아낸 정보를 함부로 흘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페렌츠에 진짜 반란군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자신은 데테로아를 믿지 못한다. 그가 배신하지는 않더라도 정보에 완벽한 보안을 자신할 수 있는지, 주변에 다른 배신자는 없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지엘라 부인과의 나들이는 나쁘지 않군요.”
나엘라는 머리를 굴려 하일모라도 데려갈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이 정도로 친분을 티 냈으니 나들이 정도는 함께 갈 수 있나? 아니면 황후에게 다른 암막을 쳐야 할까.
샴페인을 든 데테로아는 미소를 짓고 있으나 말이 없었다.
“함께 가는 사람은 제가 정합니다. 황태자 전하껜 꼭 초대장을 보낼 테니 혹여나 서운해하지 마세요. 바빠서 오시지 못하시겠지만.”
나엘라는 한 걸음 물러나 드레스 한쪽을 붙잡고 우아하게 고개 숙였다.
“파르로시 황녀 일은 감사합니다. 제 남편의 동생이 되어 준 것도요.”
아까 파르로시에게 예의를 지키라며 쓴소리한 것과 가시밭길이었던 체드란의 인생에 몇 안 되는 형제가 되어 준 것에 인사를 건넸다.
사람들은 가족을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황실은 아니었다. 데테로아도 체드란도 가족을 선택했고 둘은 형제가 되었다.
그것에 감사하며 나엘라는 천천히 물러났다. 마지막까지 우아하게 몸을 돌린 그녀는 저 멀리 체드란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데테로아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뱉었다. 체드란의 충고를 무시한 대가로 한 방 먹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절대 나엘라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지 마.”
“조금 차가워 보이긴 했지만, 그 정도입니까?”
“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느낌이 다를 것이다.”
데테로아 자신 또한 평생을 연기하며 살았으면서 상대는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나?
그녀가 보여 준 모습은 마호세르디의 병약한 공작 영애가 절대 아니었다. 감추고 사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거늘. 오늘 또 하나를 배웠다.
설레설레 고개를 젓던 데테로아는 다가오는 이들을 발견하곤 표정을 바꿨다. 아직 파티가 끝나지 않았으니 끝까지 황태자로 자리해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작.”
데테로아의 인사에 다가오던 이가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 역시 인사해야 할 이들이 한참 남아 있었다.
*
깊어진 밤에 북적거리던 파티도 점차 잦아들었다. 인사를 남긴 손님이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윗사람이 있으면 파티가 재미없는 법이라며 데테로아가 제일 먼저 돌아갔다.
“나중에는 꼭 나들이에 함께하겠습니다.”
주변 이들이 의아해했지만 나엘라는 그저 다음에 뵙자며 그를 보냈다. 그럼에도 궁금해하는 이들을 위해 결국 지엘라와 나들이를 가기로 한 이야길 전해야 했다.
아직 지엘라의 의견은 듣지 못했지만 어쩌겠는가. 제 동생이 일을 벌였으니 누이가 책임져야지.
이렇게 지엘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그노멘으로의 나들이가 확정되었다.
“나엘라, 오늘 정말 수고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뒤 공작이 나엘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옆에 있던 체드란에게도 인사를 건넨 그가 마차에 올라타자 그녀가 얼른 손을 흔들었다.
“내일 티 파티도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걱정하지 마세요.”
파르로시 황녀의 모습이 또다시 뇌리를 스쳤지만 나엘라는 그저 손만 흔들었다.
함께 파티를 마무리하던 체드란은 삐졌다던 말이 무색하게 행동했다. 누가 봐도 다정하기 짝이 없어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마지막 손님까지 배웅하고 나자 나엘라는 맥이 탁 풀렸다. 얼마나 웃고 다녔는지 볼이 떨리는 기분이었다.
황후의 앞이었다면 실컷 비웃어 주었을 텐데. 오늘 온 이들은 친목을 다져 놔야 하는 사람들뿐이라 성의 없는 웃음을 지을 수 없었다.
“체드란도 오늘 수고했어요. 우리도 침실로 돌아가서 좀 쉬고….”
무의식중에 대화를 걸었던 나엘라는 기가 막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대화할 대상이 저만큼 걸어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쌩하니 가 버린 체드란은 어느새 로비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오리알처럼 현관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나엘라를 향해 다른 이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 시선에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잠깐만요!”
나엘라는 황급히 뛰는 속도와 맞먹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두 사람의 보폭 차이가 꽤 큼에도 불구하고 금세 따라잡았다. 그녀가 하이힐을 신었다는 걸 감안하면 진기명기와 다름없었다.
“체드란?”
보는 이가 많아 이를 악물고 그를 따라잡은 나엘라는 연신 말을 걸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도 그는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왜 이래요? 아까 삐졌다고 하더니, 그거 때문이에요?”
이를 악물어 발음이 샜을지언정 나엘라의 분노를 표현하기엔 더 없었다. 대답 없는 체드란의 모습에 그녀의 분노는 더욱 쌓여 갔다.
“오늘 서로 힘들었잖아요. 힘 빼지 말아요.”
“누가 보면 내가 힘들었을 때 그대가 배려한 줄 알겠군.”
겨우 나온 대답은 전혀 협조적이지 않았다. 여전히 앞만 바라본 채로 말만 툭툭 내뱉고 있어 문제였다.
“체드란이 힘들었을 때요?”
“꼭 고된 훈련이나 시찰을 갔다 오면 그대는 사고를 치고 있었지. 날 배려했나?”
“그때는…. 그래요. 내가 미안해요. 근데 오늘은 왜 이러는지 진짜 모르겠어요.”
“잘 알아보게. 머리 좋은 그대 아닌가?”
나엘라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한 번 참아 내었다. 이유는 몰라도 그의 심기가 뒤틀린 것 같으니 한 번 정도는 인내했다.
“체드란이 알려 주면 더 쉬울 것 같은데요.”
“인생을 쉽게 가려 하다니 나약하군.”
뱉은 말에 책임을 진다는 건 이런 것인가.
나엘라는 억 소리와 함께 뒷목을 잡으려다 체통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인내심을 부여잡았다. 아무래도 움직이면서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았다. 침실에 들어가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침실에서 멈추리라 생각한 것과 다르게 체드란은 방을 휙 지나쳤다. 급히 그의 팔을 붙잡으니 단호한 푸른 눈이 따라왔다.
“지금 어디 가요?”
이 시간에 집무실을 갈 리도 없고, 심지어 아래층에 있다.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되돌아갈 일도 없었다. 게다가 침실을 지나치면 하녀들의 방과 임시로 마련해 둔 빈방뿐이라 체드란이 갈 만한 곳도 없었다.
“침대가 하나뿐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무슨 소리예요?”
오늘 참 무슨 소리냐는 말을 많이 한 것 같다. 오늘따라 체드란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늘부터 각방일세.”
체드란의 팔에서 손이 툭 떨어져 나갔다. 침대를 함께 쓴 지 하루 만에 각방이 선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