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나엘라는 널찍한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다. 분명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평생을 혼자 생활했는데 이리 어색할 수가 없었다.
비록 제 방 침대가 아니라고 한들 전쟁터에 비하면 호화로운 잠자리였다. 어떻게든 체력을 회복하려 어디서든 잠을 청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나약해진 것이 틀림없다.
눈을 꽉 감은 나엘라는 보란 듯이 이불을 팡팡 두드려 펼치곤 반듯하게 누웠다.
어제 단 하루였을 뿐이다. 아니지, 술을 마신 날까지 더하면 이틀이었다. 단 이틀, 체드란과 함께 잠을 잤다.
술을 마신 날은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지만 어제는 아니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떨어질 듯 말 듯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체드란의 웃음소리와 그러다 떨어진다는 말도 들었지만 못 들은 척하며 누워 있었다. 아무리 침대를 같이 쓰기로 했다 한들 손끝 하나 닿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다 잠들어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체드란의 품이었다. 얼마나 기겁하며 일어났는지 모른다.
태연하게 잠을 잘 잤느냐 묻기에 나엘라도 평온을 가장했지만 내심 놀란 차였다.
씻어야겠다며 후다닥 침대를 빠져나오는데 언뜻 웃음소리가 들렸다. 요즘 체드란이 과하게 웃는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쿵쾅대는 제 심장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난 지금, 나엘라는 주인 없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정신적으로 많이 피로했었는데 이리 잠이 오지 않으니 죽을 맛이었다.
한 시간을 더 뒤척이던 나엘라는 결국 이불을 걷어차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래, 난 화가 난 거야.”
제멋대로 함께 침대를 쓰자 해 놓고, 또 제멋대로 각방을 선언해? 이건 누가 봐도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지금 당장 체드란에게 따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란 생각이 들자 나엘라는 주저 없이 움직였다.
체드란의 침실을 나와 방을 나서려던 나엘라는 얼른 발을 돌렸다. 체드란이 방문을 잠가 버렸다는 제니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나엘라가 쳐들어갈 것도 아닌데 방문은 왜 잠갔단 말인가. 그것조차 화가 났다.
달칵, 테라스 문을 연 나엘라는 치렁치렁한 잠옷을 모아 허벅지쯤에서 묶었다. 이 옷을 그대로 입고 난간을 넘긴 힘드니 어쩔 수 없었다.
테라스 난간에 올라 모든 불이 꺼졌다는 걸 확인한 나엘라는 조용히 움직였다. 옆 방의 테라스와 그리 멀지 않았다.
부부 침실의 양 옆방은 제니와 지안이 쓰는 방과 가린의 방이었다. 가린의 방을 지나 있는 방이 각방을 선언하고 체드란이 들어간 곳이었다.
가볍게 뛰어오른 나엘라는 옆 방 난간을 발로 차 테라스에 착지했다. 쿵─, 밤이 너무 고요한지라 착지 소리가 유난히 요란하게 느껴졌다.
너무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서인지 감이 떨어진 것이 틀림없다. 소리 없는 이동은 기본이거늘. 훈련을 소홀히 한 티가 나는 모양이다.
잠시 숨을 죽이고 방 안을 살펴본 나엘라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다시 반대편 난간 위에 올랐다. 한 번만 더 건너뛰면 체드란이 있는 곳이었다.
난간에 올라 작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몸을 날린 그녀는 소리 없이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역시 아직 실력이 죽지 않았다며 씨익 웃곤 테라스 문을 붙잡았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돌리니 아주 작게 덜컥 소리가 들렸다. 체드란이 방문으로도 모자라 테라스 문까지 잠근 것이다.
낭패 어린 기색으로 문을 바라보던 나엘라는 누군가의 기척에 화들짝 놀랐다.
“나엘라 님…?”
나엘라가 얼른 자세를 낮추며 입가에 검지를 올렸다. 테라스로 나왔던 가린도 함께 자세를 낮추며 시선을 마주했다.
나엘라는 조용히 수신호를 보냈다.
‘문이 잠겨 있어.’
눈치 빠르게 알아챈 가린이 살금살금 다가와 머리카락을 뒤적거렸다. 그 안에서 실핀 하나를 꺼내곤 손을 길게 뻗어 건넸다.
손에서 실핀의 무게가 사라지자 가린은 양손으로 무언가를 흉내 냈다.
‘이렇게 돌려서 실핀의 다른 한쪽을 넣고 서로 맞물리도록 고정.’
예전에 가린에게 배운 적이 있는 손기술이었다.
테라스 문 따는 법. 나엘라도 혈기왕성하던 시절에 많이 써먹었던 방법이다. 나엘라는 곧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라는 실핀을 벌려 문고리 구멍 사이로 집어넣었다.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며 실핀들을 이리저리 돌리자 순간 달칵,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돌아갔다. 안쪽 홈이 맞물리며 문이 열린 것이다.
나엘라는 가린에게 엄지를 한 번 치켜들고는 방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문을 살살 열며 소리를 최소화했다.
테라스 커튼이 쳐져 있어 당장 안이 잘 보이진 않았다. 시야를 확보하려 커튼을 완전히 젖히자 어두웠던 곳에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슬쩍 한 걸음을 내디디며 몸을 집어넣는데, 그제야 느껴지는 존재감이 있었다. 더불어 목 아래 바짝 붙은 검의 느낌도.
“누구냐, 어디서 보낸…… 나엘라…?”
화들짝 놀라 검을 치운 체드란은 커튼을 완전히 걷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암살자인 줄 알았더니 숨어들어 온 이가 자신의 부인이었다.
어디에다가 말하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무슨 말을 뱉어야 할까.
“실력이 암살자라 해도 믿겠군.”
“워낙 출중해서….”
너무 출중한 나머지 암살자에 비견됐다며 나엘라는 스스로의 재능을 한탄했다.
“대체 잠옷은 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잠옷을 바라보던 체드란은 친히 매듭을 풀러 원상태로 되돌려주었다.
“화가 나서 따지러 왔습니다.”
“화가 나서 암살을 시도한 게 아니고?”
“그것도 고려해 보죠.”
분노의 총량만 따지자면 암살도 충분히 타당한 이야기였다. 체드란에게 오죽 화가 났으면 이랬겠는가.
“하… 조금 알 것 같으면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지고, 또 조금 알겠다 싶으면 예측하지 못하게 움직이는군.”
“그래서 방문을 잠가 놨습니까?”
“그건 잠입을 예상했지.”
“테라스 문도요?”
“워낙 많은 암살자에게 시달렸잖은가. 테라스 문 잠그는 건 습관이네.”
건드려서는 안 될 부분을 건드린 건 아닌지 나엘라는 힐긋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당연한 행동인데 고려하지 못했다.
“혹시 커튼도 그래서 쳐 놓는 겁니까.”
인제 와서 생각해 보니 체드란의 방은 늘 어두웠다. 모든 창에 커튼을 쳐 놓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닫힌 커튼 뒤로 내 모습은 감춘 채 달빛에 비친 암살자를 확인할 수 있지.”
체드란은 단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탁자 위에 놓았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엘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잠든 거 아니었어요? 내가 들어온 건 어떻게 알았어요.”
“원래 푹 잠들지 못하네. 조그만 소리에도 잘 깨는 편이고.”
“그럼 누군가랑 함께 자면 더 힘든 것 아니에요? 왜 나랑 자요?”
체드란의 눈이 가늘어지며 나엘라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잊었던 것을 건드려 온다.
그 이유를 설명해 줘야 아는 걸까? 대체 눈치 빠르던 그 나엘라는 어디로 갔나.
대공령에 두고 왔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있는 건 천하의 둔치였다.
“……그러니 오늘 각방을 쓰지 않나.”
“잠을 잘 못 자서 각방 쓰는 거예요?”
“오늘부터 그러려고 생각 중이네.”
다시 자려는 건지 체드란이 침대로 향하자 나엘라도 그 뒤를 쫄래쫄래 따랐다.
“내게 화가 났다지 않았나?”
“그럼요. 따지러 왔어요.”
“따져 보게.”
체드란이 침대에 털썩 앉자 늘 익숙하던 그들의 시야가 반전되었다. 나엘라가 그를 내려다보고, 그가 나엘라를 올려다보는 구도는 낯선 것이었다.
“멋대로 침대를 없애더니, 이번엔 멋대로 각방이요? 이건 나를 무시하는 처사예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사과하지.”
뻔뻔하게 나올 거라는 예상이 빗나가자 나엘라는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바로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
“그, 그리고 방문을 잠근 것도 나를 우습게 본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것도 사과하지. 그런데 정말 잠입하지 않았나? 내가 방문을 안 잠갔다면 그대는 방문으로 들어왔겠지.”
맞는 말이잖아? 나엘라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나는 체드란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를 들어야겠어요.”
해결되지 않은 일이 있으면 잠을 못 잔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대의 무신경함에 상처받았다고 해야 하나.”
제대로 말할 생각이 없는지 체드란은 영문 모를 소리만 해 댔다.
“무신경함이요? 당신이 먼저 얘기할 줄은 몰랐군요. 부부가 된 첫날, 마차 안에서 당신이 뭐라 했죠?”
결혼식이 끝나고 대공령으로 오던 날, 체드란은 나엘라의 신체에 이상이 없는지부터 물었다. 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무신경한 것은 체드란도 지지 않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군. 이 말은 철회하지.”
“그럼 제대로 얘기해요.”
“그대는….”
무심코 말을 꺼내려던 체드란은 숨이 턱 막혔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회의감이 들었다.
자신은 그저 나엘라에게 강요했을 뿐이었다. 깨달은 감정이 기뻐 상대의 마음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엘라에게 제 감정을 강요하고 왜 눈치채지 못하는지, 왜 공감해 주지 않았는지 화를 낸 것이다. 오늘 파티가 어떤 의미였는지, 얼마나 중요했는지 뻔히 알면서 말이다.
“하….”
말을 하다 말고 한숨만 쉬는 체드란 때문에 나엘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얼른 말해요.”
체드란은 방 안에서 홀로 빛나는 나엘라를 응시했다. 발화라도 하듯, 혹은 달빛을 혼자 다 받기라도 한 듯 나엘라는 홀로 반짝였다.
이 순간조차 감정이 요동치니 웃음만 나왔다.
“그대는 정말 화가 나서 온 건가?”
나엘라는 기가 막혔다. 정말 화가 나서 왔냐니, 그럼 뭐겠는가.
“당연하죠.”
“나 참….”
체드란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오밤중에 대체 뭐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런 사람을 상대로 날을 세웠다는 것도 할 말이 없었다.
“화가 났다면 사과해야지. 미안하네.”
나엘라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사과를 받았는데 더 찝찝한 기분은 뭘까.
“나는 왜 그랬는지 궁금한 거예요.”
“그만 자야겠네.”
“이대로 잔다고요?”
“그대도 내일 티 파티를 가려면 자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체드란은 절대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며 방방 뛰는 나엘라를 붙잡았다. 무술 기술처럼 허리를 잡은 채로 침대에 눕혔다.
행동이 얼마나 재빠른지 그대로 이불까지 덮게 된 나엘라는 저번처럼 꽁꽁 싸매진 채 체드란의 품에 안겼다.
“잘 자게. 오늘 푹 자야 내일 피부 상태도 좋을 테니.”
여전히 씩씩거리면서 뭐라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체드란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그녀를 가만히 토닥였다.
한참을 바동대다 지쳐 버린 건지 나엘라가 잠들자 체드란은 못다 한 사과를 전했다.
“아직 준비 안 된 그대에게 내 감정을 강요해서 미안하네.”
낮게 전한 그 사과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방 안엔 곧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