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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96)화 (96/220)

95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번쩍 눈을 뜬 나엘라는 낯선 공간을 인지하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드란은 어느새 일어나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지안과 다른 이들이 아침 단장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체드란은?”

“오늘 약속이 있으시다고 일찍 나가셨습니다.”

나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잠든 건지. 끝까지 물고 늘어졌어야 했는데.

“오전 티 파티라 준비하시는 대로 나가셔야 합니다.”

하녀들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했다. 침대에서 내려온 나엘라는 다른 이들이 매만지는 대로 가만히 따랐다.

몇 시간에 걸쳐 단장하고 나니 시간은 금방이었다.

셔링과 레이스가 가득한 흰색 드레스에, 밑단은 색색의 꽃들이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번지도록 염색되어 있어 더욱 그랬다. 머리는 웨이브를 가득 넣어 끝부분만 살짝 땋아 놓고 꽃장식의 보석들을 달았다.

그 덕에 오늘 나엘라는 봄의 여신처럼 화사하기 짝이 없었다.

화장까지 끝낸 뒤 침실을 나서니 오늘 호위를 담당한 이들이 앞에 서 있었다.

“아침 식사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괜찮네.”

오전 티 타임으로 약속을 잡을 때부터 예상했던 바다. 단장을 하기엔 촉박한 시간이니 어쩔 수 없었다.

기사들을 따라 저택 중앙 현관으로 나오니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오늘따라….”

가기 싫다는 말이 절로 나올 뻔했다.

어제 파르로시가 그렇게 돌아갔으니 황후는 또 뭐라 할지, 에스토는 또 어떻게 봐야 할지….

그녀는 괜히 복잡해지는 머리를 털어 내고 천천히 마차에 올랐다.

*

“이쪽입니다.”

나엘라는 안내해 주는 시종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수도로 올라온 적이 얼마 없으니 황궁은 당연히 낯설었다.

황실 파티 때 한 번 와 보긴 했으나 시간대가 달랐다. 그때는 저녁이었고 지금은 해가 환하게 뜬 시간이니 눈에 비치는 느낌이 색달랐다.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마감재들, 쉬이 볼 수 없는 문양의 대리석들, 햇빛이 반사되지 않아도 빛을 내는 도료들까지.

초기 건국부터 지금까지의 테사 제국 역사를 보다 보면 이 정도의 부유함은 당연한 일이다. 대륙에서도 가장 중앙에 있고, 대륙의 모든 물건은 제국에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온갖 무역의 중심지인 곳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다는 황궁이니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화려함 속의 잔인함이 손끝에 느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이곳에서 홀로 버텼을 체드란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여깁니다. 화원 안쪽에 파티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으니 대기하시면 됩니다.”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는 안내인 때문에 나엘라는 웃음이 나왔다.

휴게실도 아니고 누가 파티 테이블에서 대기한단 말인가. 대기라는 말 자체가 티 파티가 시작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니 아직 도착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홀로 파티 장소를 지키게 생긴 나엘라는 천천히 걸었다. 이런 작은 기 싸움까지 끊이지 않다니. 이곳은 정말 답 없이 피곤하다.

시종이 가리킨 방향으로 걷던 나엘라는 곧 파티 테이블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얀색 레이스 천들과 꽃들로 장식해 놓은 테이블은 쓸데없이 넓었다. 대체 손님을 얼마나 부른 건지 20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다른 각오가 눈에 보여 나엘라는 계속 걸었다. 테이블을 지나쳐 자신이 들어왔던 곳과 반대편으로 나 있는 산책로를 걸었다.

함께 왔던 하녀들이나 기사들이 다른 곳에서 대기하길 권유했기에 오랜만에 혼자 즐기는 산책이었다.

향긋한 꽃내음을 맡으며 걷고 있으니 마음이 잔잔히 가라앉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황궁에서 그나마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러다 보인 벤치에 앉아 바람을 맞고 있으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하일모라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황후가 곧 올 거야.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도착했으니 이만 가자.”

“나밖에 없길래 난 또 나만 부른 줄 알았지.”

“너 창피하라고 일찍 부른 거지, 뭐.”

보통 계급이 낮을수록 일찍 오는 법이니 대놓고 당해 보라 말하는 처사였다. 쉬이 당해 줄 나엘라가 아니란 걸 잘 알기에 하일모라가 찾으러 온 길이었다.

“가자.”

나엘라가 벤치에서 일어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까 보았던 파티 테이블로 향하니 황후와 파르로시만 제외하고 어느 정도 꽉 찬 테이블이 보였다.

다행히 오늘은 에스토가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공손히 말을 높인 하일모라가 비어 있는 자리 중 황후를 마주 보는 자리에 그녀를 안내했다.

자리에 앉으니 서로 눈치를 보며 나엘라를 살피는 게 보였다. 나엘라의 머리, 드레스, 장신구 등 모든 것이 그들의 평가 대상이 될 터다.

어중간하게 입고 평가받을 바에는 차라리 낯선 스타일로 등장하는 것이 낫다는 제니의 의견을 수용했다. 그래서 고급의 상징인 실크 드레스보단 봄에 어울리는 드레스로 입었는데 저들이 또 어떤 평가를 내렸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입을 떼지 않고 앉아 있는 나엘라 대신 하일모라가 그녀를 소개했다.

“대공비 전하십니다. 다들 인사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시지요?”

장례식장에서 봤을지는 모르겠으나 황후나 파르로시 외에 인사를 한 적은 없었다. 몇몇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명목상의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만나서 영광입니다.”

인사 뒤에 이름들을 들려주었지만, 나엘라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황후 측의 중요 인물들은 어차피 모두 외우고 있었고 그들의 인사가 달갑지 않기도 했다.

“반갑습니다.”

간단한 답만 내어 주고는 나엘라는 다시 침묵을 고수했다.

얼마 후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며 황후가 나타났다. 그녀와 함께 파르로시 황녀, 그리고 몇몇 시녀들이 뒤따랐다.

파르로시는 밤새 울었는지 두 눈가가 아직도 붉었다. 화장까지 했음에도 저렇게 티가 나는 것을 보면 눈물을 많이도 쏟은 모양이었다.

“오늘은 반가운 사람이 참석하였으니 좋구나.”

황후가 나엘라를 향해 웃었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난 터라 나엘라도 가볍게 인사를 올렸다.

곧 황후를 필두로 다들 자리에 앉았다.

“비탈리 부인은 한동안 아팠다고 하더니 잘 지냈는가.”

“황후 마마께서 귀한 약재를 보내주시어 금방 쾌차할 수 있었습니다.”

“타티나 부인은 오늘 새 드레스를 입고 왔나 보군.”

“저번에 황후 마마께서 소개해 주신 제단사가 실력이 출중하지 뭔가요. 황후 마마 덕분에 제게 딱 어울리는 드레스를 구했답니다.”

황후는 다정히 귀부인들의 안부를 물었다.

비탈리 부인은 풍채가 좋은 데다 생기가 넘쳤고, 타티나 부인은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을 입고 왔지만 서로 좋다니 다행이었다.

한참을 안부를 묻는 내내 누구도 나엘라에겐 한마디를 걸지 않았다. 나엘라도 그것이 편해 가만히 차를 들었다.

“대공비, 그대가 오늘 참석해 준 것은 반갑네.”

드디어 차례가 온 것인지 황후는 마지막이 돼서야 나엘라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못내 서운한 것이 있어 꼭 물어보고 싶군.”

나엘라는 지엘라 같은 미소를 지으며 편히 말씀하시라 답했다.

“어제 파르로시가 그대의 파티에 참석한 것은 알고 있을 걸세. 그런데 파티에 간 것이 얼마나 됐다고 바로 돌아오지 뭔가. 내 딸아이가 오자마자 눈물을 쏟았는데 무슨 일인지 아는가?”

예상했던 질문이라 나엘라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파르로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아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공께서 아무 말씀도 해 주시지 않아 이유를 듣지 못했는데, 무슨 일이 있으셨군요.”

딸이 울었으면 본인에게 이유를 물어야지 왜 자신에게 묻는가.

나엘라는 파르로시에게 화살을 돌렸다.

“혹시 대공 전하와 대화 중에 마음 상하는 일이 있으셨습니까?”

둘이 따로 대화를 나누던 중 돌아갔음을 넌지시 알렸다. 파르로시가 황후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얼마나 얘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답은 본인이 하게 될 것이다.

나엘라 역시 체드란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했으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중요한 얘기를 나눴다면 언질이 있었으리라.

“그게….”

파르로시는 금세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황후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매가 살짝 날카로워진 것을 보아하니 제대로 된 사정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편히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대공 전하께 서운한 것이 있다면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파르로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체드란이 애틋해서, 그의 평판을 자신의 입으로 상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인 듯싶었다.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정말 몸이 좋지 않아 돌아온 겁니다.”

나엘라에게 하는 대답이라기보단 황후에게 하는 변명 같았다. 쓸모없는 것을 바라보듯 그녀를 훑은 황후가 대신 나섰다.

“이 많은 이들 앞에서 파르로시가 어찌 말하겠는가. 그래도 오라버니니 그의 허점을 말할 순 없지 않겠나.”

“그렇습니까….”

나엘라는 고요히 웃었다. 황후가 체드란의 어머니 행세를 한다면, 기꺼이 응해 주면 그만이었다.

원하는 건 실컷 하시도록.

“어떻게 보면 제가 새언니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황녀님, 만약 무슨 고민이 있거나 대공께서 서운하게 하시거든 주저 없이 제게 와 말씀해 주세요. 저를 편히 여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틈 없는 신경전에 눈동자를 휙휙 돌리는 게 느껴졌다. 나엘라가 쉬이 밀리지 않으니 그들로서도 어느 한 곳에 편을 들기가 모호해진 것이다.

“파르로시가 아직 낯을 가리니 이해해 주게. 아직 어리니 어른으로서 지켜봐 주게나.”

“그럼요. 저는 황녀님을 제 친동생처럼 여길 겁니다.”

만약 여동생이 있었다면 나엘라는 어떤 언니가 되었을까. 그것을 파르로시가 몸소 느끼게 생겼으니 나중에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황후가 가볍게 말을 끊었다. 조금 전의 대화는 별것 아니었다는 것처럼 주제를 바꿨다. 목적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는지 여전히 대화 상대는 나엘라였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네.”

“말씀하세요.”

“체드란과 어떻게 만났나? 그대는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나엘라는 잠시 당황했다. 이것에 관해 체드란과 깊게 말을 맞춘 적은 없는지라 그녀의 순발력이 중요했다.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황후는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중간하게 답했다간 괜한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 나엘라는 더 당황한 티를 내었다.

“그게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워서….”

“괜찮네. 말해 보게나.”

황후는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듯 보였다. 시답잖은 핑계를 대면 주위의 귀부인들이 이때다 싶어 달려들지도 몰랐다.

나엘라는 시종일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전 대공 전하가 스토커인 줄 알았습니다. 하도 따라다니셔서….”

나엘라는 정말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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