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에스토는 머리가 아파 와 반사적으로 관자놀이에 손이 갔다. 그러다 문득 이곳이 황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연스레 내렸다.
황후의 부탁대로 조금 늦게 티 파티에 도착하도록 기다리던 중이었다.
얼추 시간이 되어 티 파티가 열리는 정원으로 움직였다. 황후궁의 안쪽에 있기에 황후궁을 지나쳐 가야만 했다.
코를 찌르는 것 같은 진한 꽃향기들 때문에 이곳만 오면 머리가 아팠다. 진한 향기는 악취를 감추기 위함일까.
꽃냄새보단 쇠 냄새가, 귀부인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보단 우렁차게 구호를 외치던 기사들의 목소리가 가득했던 마호세르디가 스쳐 갔다.
어린 시절부터 평생을 지내온 곳, 어느새 더 제집 같았던 마호세르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을 생각하다 이내 떨쳐 버렸다. 내내 황후에게 시달렸더니 별생각이 다 드는 모양이다.
황후는 피곤한 사람이었다.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눈에 훤히 보이는 아첨에도 기뻐했다.
어떨 때는 겨우 이런 여자에게 당한 이들이 안타까웠고 어떨 때는 속에 감춰 놓은 지독한 악의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그런 방법밖에 모르는 여자처럼 누군가를 음해하고 자신보다 아래로, 밑바닥까지 밟아 놔야 속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에스토는 황후를 대하기가 피곤했다.
“황후 마마의 티 파티에 가시는 건가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자신과 같은 곳으로 향하던 길인지 이곳으로 걸어오는 지엘라가 보였다.
“또 뵙습니다, 황녀님.”
“저도 반가워요, 시론 경.”
마호세르디에서는 꽤 친했었건만 이제는 더없이 어색해져 있었다.
“오랜만에 에스코트를 부탁해도 될까요?”
단숨에 추억의 일면을 끌어 올리는 부탁이었다. 부드럽게 웃으며 팔을 내밀자 그녀가 팔짱을 껴 왔다.
“마호세르디에선 대공비 대신 시론 경이 제 대화 상대가 돼 주곤 했었죠.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는군요.”
그녀도 같은 것을 생각했나. 집주인인 나엘라는 훈련 때문에 움직이질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에스토가 지엘라의 옆을 지켰다.
그때의 이야기들은 의미 없는 것을 알기에 에스토는 억지스럽게 말을 돌렸다.
“황후 마마께서 황녀님을 초대하셨는지 몰랐습니다.”
“호칭은 그때와 같은데 우리 사이는 그때와 다르군요.”
에스토는 가만히 눈을 내렸다.
다나한을 좋아해 그를 따라다니던 지엘라이니 부단장이었던 에스토와 어찌 친하지 않았을까.
다나한이 에스토를 아꼈기에 지엘라도 같은 마음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 이야기는 불편한가 보군요. 미안해요. 오늘 다나한 경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대의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에요.”
몇 년 만의 편지였다.
지엘라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필체를 보고 또 보았다. 여전히 애정 어린 말 한마디 없는 그는 편지에 나엘라의 안부를 잔뜩 물었다. 참 멋이 없는 남자인데 왜 눈을 떼지 못했는지, 왜 또 울었는지.
지엘라는 스스로가 바보 같다는 걸 알았다.
여러 사람의 안부를 묻던 그는 마지막에서야 지엘라의 안부를 물었다. 아니지, 안부를 물은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