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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98)화 (98/220)

97화

“저는 정말 서운합니다.”

일어나라고 눈치를 준 것도 아닌데 나엘라의 옆에 있던 한 귀부인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지엘라는 처음부터 초청받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여자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가 아닌가요? 어찌 저를 부르지 않으셨어요.”

에스토가 자연스럽게 황후의 옆에 앉았다. 귀부인들만 모인 자리에 갑작스럽게 웬 남자인지, 아니 웬 에스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심기가 어지러울 터인데 이런 자리가 좋을 리 없지 않겠느냐.”

“그래서 황후 마마의 다정한 말들이 필요한 것을요.”

“그럼 따로 시간을 내달라 하지 그랬느냐.”

“때론 이리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위로가 됩니다.”

지엘라를 본 나엘라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자신이 행동하려고 움직일 때마다 지원군 아닌 지원군이 등장할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엘라가 끝까지 마무리한 경우가 별로 없었다. 왜들 그리 걱정이 많은지 나엘라를 가만두는 법이 없었다.

이것 또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다는 방증이니 그저 감사할 수밖에.

“그래. 그럼 자주 참석하거라. 그나저나….”

황후가 에스토를 보고 싱그럽게 웃었다.

“시론 경과 대공비가 친구였다지? 오늘 대공비 혼자 어색할까 봐 그대를 불렀는데, 대공비를 아끼는 이가 또 있으니 아쉬워서 어쩌겠는가.”

이곳에 있는 것이 어색한 이가 누구인가.

눈치 없이 끼어든 것은 에스토 같음에도 황후의 두둔은 그를 향했다.

“아끼는 이가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나엘라 님께서 이리 사랑스러우시니 황후 마마께서도 아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게 아끼는 거라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다.

아첨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후는 눈꼬리를 접었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론 경은 참 인기가 많겠구나. 이리 여자의 마음을 잘 아니 말일세.”

황후가 나엘라를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

“대공비는 친구에게 왜 말 한마디 걸지 않는 건가.”

나엘라는 문득 황실 파티 날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 되바라진 나엘라의 말들에 황후는 얼마나 이를 갈았을까.

그녀가 오늘 무엇을 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시론 경.”

나엘라의 입에서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낯선 호칭이 나왔다. 에스토와 눈을 마주치니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가 마호세르디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날, 꽤 크게 싸웠던 것 기억합니까.”

순식간에 귀부인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그때의 서운함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대를 보는 게 어색합니다.”

황후가 무슨 이야기냐는 듯 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스토는 설명할 수 없을 터였다. 애초에 싸운 적이 없었으니까.

“혹시 아직도 나를 좋아하고 있습니까?”

에스토는 나엘라를 이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함께 생활했던 나엘라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후가 나엘라를 공격할 무기로 에스토를 선택했다면 그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당신이 준비한 무기가 사실 별거 없다고, 날이 무뎌져 있었다고, 그러니 그 공격은 나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소문을 좋아하는 귀부인들은 오늘 이야기를 퍼다 나를 것이다. 자연히 에스토를 향한 나엘라의 껄끄러움도 정당화될 터.

에스토가 아니라고 한들 과연 이 소문이 가라앉을까.

“나엘라 님….”

에스토가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당했다는 웃음을 지었다. 황후의 얼굴에도 황당함이 자리 잡았다.

“황후 마마.”

나엘라는 에스토에게 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공 전하께서 질투가 많으신지라 이런 자리에서 자꾸 시론 경과 마주하는 것이 달갑진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대공 전하도 알고 계셔서요.”

대신 황후가 배려했던 것을 앞으로 거절하겠노라 전했다.

“그리고 황후 마마께서 지엘라 부인에 대한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아 청을 하나 드리려 합니다.”

지엘라도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지엘라 부인과 잠시 나들이를 다녀오려 합니다. 목적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으나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잠시 봄 내음 정도는 괜찮겠지요.”

황실 안주인에게 허락받는다면 금상첨화, 황후에겐 청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그래… 나쁘지 않겠군….”

황후가 가라앉은 눈으로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오늘 이 티 파티로 나엘라가 얻은 것이 많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을까.

“혹시 저도 같이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하일모라가 나엘라에게 물었다. 둘의 시선은 모두 황후에게 돌아갔다. 나엘라에게 의중을 묻는 듯했지만 결국 황후의 허락이 떨어져야 하일모라도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세레노피 부인도 나이대가 비슷하니 좋은 친구가 되겠군.”

황후의 눈에는 자신의 첩자로 보일 하일모라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저도 상관은 없습니다.”

나엘라의 대답으로 셋의 나들이는 확정되었다. 뒷말이 나온다면 황후도 같이 끌려 나올 것이다.

황후의 허락하에 나간 나들이인데 누가 쉽사리 말할까.

“대공비.”

곱게 끝낼 생각은 없는지 황후가 덧붙였다.

“내가 그대를 참 어여삐 여기는 것을 알고 있나?”

황후는 오늘 파티를 개의치 않은 것처럼 굴었다. 진짜 목적은 이런 사사로운 것들이 아니란 듯이.

“오늘 보고 나는 더욱 확신했네. 그대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나, 황후는 오늘 나엘라를 보고 무언가 결심한 것 같았다.

“언제든 할 말이 있으면 내게 오게나. 나들이 전이라면 더 좋고. 나들이용 모자 정도는 선물하겠네.”

아무래도 나들이 때 무슨 일이 있을 모양이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나엘라도 비슷한 생각 중이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황후 마마.”

나엘라 또한 황후를 빨리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나들이 때 황후가 숨겨 둔 것을 쳐 낼 것이다.

“꽃이 지기 전에 움직여야 하기에 며칠 내로 나들이를 떠나려 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이를 어쩐담. 황후에게 용서를 빌 날은 없을 것 같았다.

“나들이를 다녀오면 꽃을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황실을 떠나시지 못하시니 꽃으로나마 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끝을 상징하는 꽃이 없는지 찾아봐야겠다. 황후처럼 저물어 갈 꽃이라면 더더욱 좋을 터다.

“고맙네.”

독을 숨긴 황후가 웃었다. 그녀만큼 화려한 꽃에 잘 어울리는 여자는 없었다.

*

황후궁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 뒤로 에스토가 천천히 따랐다.

“대공비를 좋아했다니, 그거야말로 웃기는 이야기군.”

황후가 피식 비웃음을 흘리자 에스토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제 이미지를 깎겠다는 의도 아니겠습니까. 미리 대비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남녀 관계만큼 흥미를 끄는 이야기도 없다.

“대공비가 참으로 똑똑하단 말이지.”

자신에게는 왜 그런 사람이 없는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 황후의 눈에 파르로시가 들어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따라오는 모습이 얼마나 거슬리는지 영 쓸모없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패악질만 부릴 줄 알지, 머리 굴릴 줄은 모르는 아이였다. 그래서 일부러 루부스 후작 영애까지 붙여 놓았거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모양이다.

“시론 경, 내 그대에게 부탁 하나를 해도 되겠나.”

파르로시를 타박할 줄 알았더니 황후는 뜬금없는 부탁을 전해 왔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그대가 검은 방패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고 했지. 그럼 기사들의 훈련 또한 잘 알고 있겠군.”

“다나한 경을 도와 경험은 있습니다.”

“페렌츠로 가게.”

그들은 어느새 서재 앞에 도착했다. 황후가 안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소파 상석에 앉자 시녀들이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파르로시와 에스토만 남았다.

“페렌츠 말씀입니까?”

“그곳에 내가 아끼는 이들이 있어. 그들을 좀 부탁하지.”

아끼는 이들이라….

황후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에스토는 무조건 승낙을 하진 않았다.

“황후 마마, 제가 처음 찾아왔을 때 드렸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왜 기억을 못 하겠나. 황제를 죽여 달라 말했지.”

“제 부친이 숙청당했습니다. 황제를 죽이는 과정에 마호세르디 또한 처리해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숙청이라…. 마호세르디의 손에 죽었으니 숙청이 맞고, 황제를 죽이기 위해선 마호세르디가 거슬리는 상대인 것도 맞지. 그래서?”

“페렌츠로 가는 것이 그 목적에 한 걸음 다가가는 일이 맞습니까?”

혹시나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은 아닌지, 에스토는 그리 물었다.

“시론 경.”

황후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황제도 칼에 맞으면 죽는 평범한 사람임을 어찌 모르는가.”

“그 과정이 험난하니 걱정이 됩니다.”

“나는 말일세. 이 제국의 이름이 테사가 아니라도 상관없다네.”

누군가 들었다면 당장이라도 도망쳤을 반역의 말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거리낌이 없었다.

“황실 핏줄이 다 죽어도 상관없고 대륙 지도에서 제국 자체가 사라져도 상관없는 사람이야.”

황후의 눈동자는 에스토를 넘어 더 먼 곳을 바라봤다.

이 순간 왜 과거가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다. 자신을 무시하던 이복 언니 바로아 살라만, 욕구의 대상으로만 보던 남자들,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하는지도 의문인 황제까지.

“대공비가 무례하게 굴어도 왜 참았는지 아는가.”

에스토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다 없어져 버릴 테니까.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나뿐일걸세.”

그때가 되면 지긋지긋한 황제도, 자신을 옥죄던 모든 것들도 사라졌을 터. 결국 승자는 바테니 테사, 자신이다.

“그러니 페렌츠로 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그대 하나는 살려 줄지도 모르지.”

애초에 자신에게 찾아왔을 때부터 에스토는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황후는 아무렇지 않게 요구했다.

페렌츠가 시작이다. 그곳에서 퍼지는 모든 것이 결국 이 제국을 잡아먹을 것이다.

“파르로시를 데려가. 이 아이가 그곳에서 할 일이 있네.”

갑작스러운 호명에 파르로시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말렴. 이 어미가 너를 어디까지 봐줘야 할지 모르겠으니.”

황후는 한없이 자애롭게 웃었다.

제 젊은 날과 하나도 닮지 않은 아이였다. 적어도 자신은 이리 멍청하게 굴지 않았다.

지금 황후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시론 경이 잘해 줄 것이라 믿네.”

에스토가 잘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곳에는 다른 이들이 가득했다. 그저 반만 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었다.

황후는 그리 생각하며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 화려한 황궁에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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