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톡. 톡. 톡.
검지로 소파 손잡이를 두드리던 나엘라는 다가오는 지안을 보곤 고개를 들었다.
“드레스를 갈아입으셔야 해요.”
외출에서 돌아온 뒤, 드레스도 갈아입지 않았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점심은 가볍게 준비할까요?”
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침도 건너뛰었으니 점심은 챙겨야 할 것 같아 방 안에서 가볍게 먹겠다고 일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셨어요?”
“에스토와 황후 생각.”
그리고 파르로시 생각도 조금.
티 파티에서 좋지 않은 사람들과 가득 만났음을 깨달은 지안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에스토는 나와 하일모라가 친구인 걸 왜 말하지 않았을까.”
“이미 말했을 수도 있죠.”
“그렇다기엔 황후는 진짜로 모르는 태도였어. 알고 있었다면 하일모라가 함께 나들이 가는 걸 흔쾌히 허락하지 않았겠지.”
한통속인 사람들을 똘똘 뭉쳐 놓으면 아무 소용없다. 황후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얘기다. 분명 말이 나왔을 때 의심의 빛을 비췄을 터였다.
“아그노멘에 간다는 이야기도 아직 못 들었을지 몰라.”
황후가 우리가 아그노멘으로 나들이 가는 것을 모른다면 핵심 정보를 놓치는 거다.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생겨 아그노멘에 조사대가 파견되면 바로 붙어 있는 페렌츠도 위험해진다.
“황후에겐 부담이 클 텐데. 나와 지엘라 부인만 처리한다고 해도 그렇고.”
지금 이들을 건들면 황실, 마호세르디, 노헤스카까지 조사에 참여할 것이다. 페렌츠에 몰래 모은 정병을 숨겨 두었더라도 그 모든 이를 상대하긴 어렵다.
물론 하일모라가 나엘라와 친구라는 걸 알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나들이에서 나엘라와 하일모라까지 함께 처리할 생각일 수도 있다.
배신의 대가를 치르기에 목숨만 한 것은 없는 법. 그런 면에서는 이번이 기회이기는 했다.
지엘라와 나엘라, 하일모라까지 셋을 한 번에 처리할 기회니까.
“황후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혼잣말로 생각 정리 중인 나엘라를 지안은 아무렇지 않게 드레스를 갈아입히고는 식탁에 앉혔다.
나엘라는 자신이 식탁에 앉은 것도 모르고 추론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어쨌든 황후는 아직 우리가 친구인 걸 모르는 건 확실해. 만약 하일모라가 첩자라는 걸 알았다면 파르로시 옆에 베르에티를 붙여 놓지 않았을 거야.”
만일 그 사실을 알았다면 하일모라와 친분이 있는 베르에티조차 의심받아야 마땅했다.
대리석 식탁을 두드리던 나엘라는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식탁을 두드리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분명 황후는 나를 처리하려고 마음먹었어, 바로 오늘.”
뭘 보고 그런 마음을 먹었을까, 나엘라가 생각보다 강해서?
노헤스카와 마호세르디를 신경 쓰지 않고 움직일 만큼?
지엘라와 하일모라가 동행함에도 그런 생각을 품었다고?
그 위험을 감수함에도 처리해야 할 정도로 나엘라에게 화가 났다고?
아니다, 황후가 절대 의심받지 않을 무언가가 있는 거다.
그때 문득 살라만 부인이 스쳐 지나갔다.
살라만 부인은 무엇을 믿고 돌아왔을까? 분명 황후에게 대응할 무언가가 있었을 거다. 방비에 자신이 있었던 건데……. 그게 과연 뭘까?
자신을 지켜 줄 거라 살라만 부인이 믿었으나 알고 보니 황후에게 별거 아니었던 것. 그래서 살라만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
나엘라와 지엘라를 처리하고도 황후가 의심받지 않을 만한 범인들.
“설마.”
나엘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가 아무리 반란군을 모은다 한들 황제와 마호세르디, 노헤스카를 상대하기엔 턱도 없다.
그런데 만약 그 힘을 제국이 아닌 외부에서 끌어온다면?
제국의 북쪽은 바다와 맞닿아 있다. 물살이 유독 잔잔한 바다를 건너면 왕국 하나가 나온다.
……그래, 바다다. 북쪽을 지키는 해상 제독의 가문이 이미 황후와 손을 잡은 것은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럼 북쪽을 통해 모종의 거래를 한 게 아닐까?
바다가 있으니 무역선을 가장해 타국의 군사들을 들여오기도 쉬웠을 것이다.
또한 그 왕국은 살라만 부인이 시집을 갔던 곳이었다.
만약 살라만 부인이 결혼했던 가문의 군사력을 장악했다면?
황후와 타국의 군사력을 담보로 협상하려 했다면?
그런데 황후는 이미 그곳과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었다면?
살라만 부인의 군사력은 고작 가문의 기사단 정도고, 황후와 내통한 곳이 왕실 정도의 규모라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살라만 부인이 기껏 협상하려 가져온 패가 황후가 숨기고 있던 것에 비하면 별거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죽음이었을 터.
여기까지 생각했던 나엘라의 머리를 스치는 사실이 있었다.
지엘라도 그곳의 왕족과 결혼했다. 그런 자들이 만약 이미 들어와 있다면…… 지엘라는 애초에 희생양이었던 게 아닐까?
지엘라를 죽이고 그녀의 죽음을 그 왕국의 정치 싸움으로 몰아 덮어 버리면…… 증거로 타국에서 들어온 비밀 군사 몇 명까지 잡힌다면 더 빠르게 처리될 터.
그 일에 휘말려 나엘라도 죽은 것으로 꾸미면 그만이었다. 노헤스카와 마호세르디가 의문을 품는다 한들 북쪽에서 조사에 제대로 응하지 않을 테니 난항을 겪을 것이다.
그럼 자연히 시간을 벌 수 있다. 황제와 두 가문을 한꺼번에 처리할 시간.
그렇다면 하일모라는? 과연 황후는 하일모라를 어떻게 할 생각일까?
황후가 무엇을 알든 모르든 하일모라는 이번에 제거될 가능성이 컸다. 그녀가 후환을 남길 리가 없을 테니까.
“나엘라?”
방 안으로 들어오던 체드란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응접실 식탁 앞에 멈춰 선 나엘라의 모습에 의문을 가진 듯했다.
“나엘라, 무슨 문제 있나?”
티 파티를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걸음을 재촉해 온 길이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을 자리이니 그녀의 기분을 염려한 것이다.
“조용!”
나엘라가 손바닥을 척 내밀자 깜짝 놀란 체드란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뻗어진 손에서 검지만 무언가를 두드리듯 움직였다. 허공을 두드리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나엘라는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오래된 버릇이라 제 손가락의 움직임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 모습에 멋쩍어진 체드란은 살며시 손을 내려주자 곧 손가락은 식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황후가 외부의 힘을 빌렸다면 과연 한 곳에만 도움을 청했을까….”
나엘라의 손가락이 뚝 멈췄다. 멍한 보라색 눈동자가 체드란을 바라보았다.
“황후가 제국을 끝장내려 한다면… 노헤스카와 마호세르디를 동시에 상대할 방법은….”
체드란은 나엘라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중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있어 재빠르게 잡아챘다.
“제스라 왕국과 두칸이군.”
체드란의 답이 맞았는지 나엘라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로지 황후라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제스라 왕국과 맞닿아 있는 마호세르디, 두칸과 맞닿아 있는 노헤스카.
두 곳이 동시에 전쟁을 걸어온다면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는 발이 묶인다. 그사이에 황후가 황제를 쳐 버리고 황궁을 장악한다면 모든 것은 끝이었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는 황도에서 움직이는 황후까지 감당해야 한다.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요. 이 모든 것은 가정입니다.”
나엘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이 추측만큼은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체드란은 되레 그녀의 가정에 힘을 실었다.
“황후가 제스라와 두칸에게 제국을 나눠 주겠다고 약속했다면 가능성 있는 이야기지. 그럼 출혈을 감수하고도 두 곳은 전쟁을 걸어올 것이다. 황후는 제국을 갈가리 찢어 버릴 작정인 거야.”
“그렇다면 황제는요? 황제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황제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요?”
나엘라의 말에 체드란도 고민에 잠겼다.
그녀의 말대로 황제는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얼마 전, 톨레로 상단에 접촉한 것을 보면 황후의 일거수일투족도 감시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황제는 왜 그녀의 움직임을 제지하지 않을까.
“머리가 다 아프군.”
체드란의 말대로 나엘라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록 하나의 가정을 세웠다고 한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가득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음식을 담은 트레이가 들어왔다. 나엘라의 점심을 위해 주방장이 급히 만든 음식들이었다.
“일단 점심부터 먹지.”
하나씩 세팅되는 음식을 본 체드란이 자리에 앉았다.
“체드란도 아직 식사 안 했어요?”
“나도 이제 막 돌아온 터라.”
아침 일찍 어디 갔다더니 이제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엘라의 눈이 가늘어지며 의심을 품고 체드란을 훑어보았다.
“왜 그렇게 바빠요?”
“알아볼 게 있어서.”
“뭘 알아봤는데요?”
“범죄 조직들에 관해서.”
나엘라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본인이 범죄 조직의 수장이면서 대체 무엇을 알아봤단 말인가.
“그대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 잡아야 하지 않겠나.”
나엘라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당연히 황제나 황후라 생각하여 둘 다 처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체드란은 둘 중 누구인지 제대로 잡겠다고 말한 것이다.
“황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유는?”
“황제라면 아버지가 참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황제는 약점을 쥐고 있는 스타일이지, 죽이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 말을 뱉는 순간 더 커질 수 없을 듯하던 나엘라의 눈이 더 크게 벌어졌다.
그래, 황제는 약점을 쥐고 있는 스타일이다.
나엘라는 당연히 황제가 단제에게 무언가를 약점으로 잡고 시론 후작을 쳐 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제는 왜 시론 후작을 쳐 내려 했을까? 시론 후작에게 무언가 있었다면 그걸 빌미로 마호세르디를 협박하는 것이 그의 방식 아닌가?
아니면 협박을 했을 때 무언가 잘 안된 것일까?
또다시 움직이려는 나엘라의 손가락을 체드란이 잡아 멈췄다.
“그대에게 선물을 주려 했는데 그새 다른 생각을 하는군.”
생각에 잠겨 가던 나엘라의 정신이 돌아왔다.
“아… 아무튼, 범인은 아마 황후일 거예요.”
“그럼 이유라도 알아야지.”
“황제의 세력을 줄이려 한 게 아닐까요? 그 시기에 단제 오라버니가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거든요. 적이 되기에 마호세르디는 너무 굳건하니까요.”
“그럼 단제 경이나 공작을 노렸어야지. 왜 공작부인을 노렸지?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둘은 검은 쓰니까 어려웠을 거예요. 경고의 의도라고 봐요.”
체드란은 석연치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황후는 그때 자신에게 암살자를 보내고 있었고, 페트론을 재촉하느라 바빴다.
그렇다고 마호세르디가 황자 중 누군가를 지지한 것도 아니었으니, 마호세르디를 견제하는 일은 당장 급한 것이 아니었다.
“음식을 앞에 두고 또 말이 길어졌군. 일단 식사를 하지.”
체드란의 말에 나엘라도 스푼을 들었다. 일단은 뭐라도 먹어야 머리가 더 잘 굴러간다. 지금은 식사에 열중할 때다.
“어제 왜 삐져서 각방 쓰자고 했는지 변명 준비해 놔요. 식사 끝나면 물어볼 테니까.”
아쉽게도 체드란은 식사에 열중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