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00)화 (100/220)

99화

베르에티는 제 배짱이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 상황은 자꾸만 제 담력을 시험에 들게 했다. 그녀는 지금 옆에는 파르로시, 앞에는 에스토 두 사람과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대체 왜 이 사람들과 함께 페렌츠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황후의 명령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제 저택에서 편히 쉬거나 하일모라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아니, 하일모라도 오늘쯤 나엘라와 나들이를 떠난다 했으니 혼자 집에 있었으려나.

창밖을 보며 이 상황이 현실인지 가늠해 보던 베르에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짐 마차에 실려 있는 자신의 가방이 생각난 것이다.

이번 페렌츠행이 극비리에 이뤄진 탓에 여러 대의 마차를 끌고 갈 수도 없었고, 황실의 문장을 달 수도 없었다. 시녀나 하녀도 두고 가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페렌츠에 시중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늘 자신의 수족들을 데리고 다니는 귀족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온갖 것들을 담아야 했던 가방엔 더 말도 안 되는 것이 들어 있었다. 황후의 지시대로 가져오긴 했지만 이게 맞는 행동인지 수십 번도 더 생각이 교차했다.

나엘라가 오기로 한 티 파티조차 참석하지 못하고 이 물건을 받으러 갔다가 더 충격적인 이야기도 들었다.

그 뒤로 하일모라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페렌츠로 가고 있으니 큰일이었다. 이 일을 어찌할지 도저히 판단이 안 섰다.

급한 대로 하녀를 시켜 하일모라에게 쪽지를 전하긴 했다. 누가 볼까 봐 자신의 그림 메모로 전달하는 바람에 거꾸로 알아볼 사람이 없을까 걱정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일모라에게 메모 보는 법을 알려 줄 것을.

그렇게 초조해하던 차에 마차가 멈추고 밖에서 호위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간 마을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기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파르로시가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답답해 죽을 뻔했단 말이야. 대체 왜 이렇게 이동해야 하는지.”

황후가 없어서인지 파르로시의 안하무인인 태도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그렇게 마차에서 내리곤 사라졌다. 베르에티도 따라 내리려는 찰나, 에스토가 말을 걸어왔다.

“황후 마마께서 지시한 것들은 잘 준비됐습니까.”

순간적으로 베르에티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생각하지 못했지만, 황후도 에스토에게 시킨 것이 있을 터였다. 그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 만큼 베르에티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황후에게 전달받은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힘이 풀려 마차 바닥에 주저앉자 에스토가 싸늘하게 말을 건넸다.

“마음을 먹었다면 그게 어떤 일이든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애의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될 테니.”

늘 웃고만 있는지라 에스토가 무표정할 때 얼마나 차가울 수 있는지 몰랐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그가 에스코트를 하려는 것처럼 베르에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참으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에스토의 손을 붙잡았다.

“흔들리지 마세요, 영애.”

베르에티는 천천히 울음을 삼켜 내었다.

*

나엘라는 단번에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알았다.

혹시나 악몽을 꾸는 중일까, 잔뜩 긴장한 것과 달리 꿈속의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호세르디의 연무장을 지나 기사단 숙소 건물로 들어가자 1층 입구 옆으로 펼쳐진 휴게 공간이 눈에 띄었다.

기사들이 편히 앉아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그때, 구석 자리에 혼자 있는 이가 보였다. 마침 그자가 나엘라가 찾던 자라 거침없이 움직였다.

테이블에 종이를 펼쳐 두고 있던 신임 기사는 나엘라가 다가온 것도 모른 채 그림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언뜻 사람 같기는 한데 해괴한 모양새라 그림의 대상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알아볼 만한 것은 검은색의 긴 머리와 보라색의 눈동자 정도?

“설마 그 괴물이 나인 것은 아니겠지?”

화들짝 놀라 그림을 감추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나엘라를 그리고 있던 것이 맞는 모양이다. 나엘라는 단숨에 기사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그 해괴망측한 그림이 나라고 말해 봐.”

진풍경에 휴게실에 널브러져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모였다. 나엘라와 기사를 번갈아 보더니, 기사들의 키득거림이 전체로 번졌다.

“그, 그게…!”

“똑바로 말해. 오늘 여기 있는 기사들 전부 혹한기 훈련에 차출되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곧바로 다른 기사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그림을 그린 건 저놈인데 왜 저희까지 혹한기 훈련입니까!”

“이건 권력 남용입니다!”

“그림을 못 그리는 건 죄가 아니란 말입니다!”

나엘라의 싸늘한 눈빛이 좌중을 훑자 다들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나둘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는 것을 본 그녀는 다시 신임 기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딴 그림을 그린 저의가 뭐지? 날 저주하기 위함인가?”

“아, 아닙니다!!”

“그럼 날 희화화해서 명예를 떨어트리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기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정성 들여 그린 그림이었는데 나엘라의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선물하려 했습니다!”

“누구에게?”

“나엘라 님에게요!”

“왜?”

“좋아하니까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나엘라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멱살 잡았던 것이 풀리며 기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장내엔 고요함만 맴돌았다.

기사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믿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입을 떠억 벌린 채 삽시간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으니까.

“와우….”

다른 기사 하나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조용히 탄식했다. 신임 기사의 엄청난 용기와 앞으로 펼쳐질 가시밭길에 대한 애도였다.

“날 좋아한다고?”

나엘라가 주저앉은 그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엇…. 어….”

기사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그럼 앞으로 내가 할 말들도 알고 있겠군.”

이때까지 나엘라를 좋아했던 남자가 어디 한두 명이었겠는가. 고백을 받을 때마다 그녀가 했던 답은 한결같았다.

“나를 꺾어라. 실력조차 별 볼 일 없는 이가 과한 욕심을 부린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라.”

어느 순간부터 나엘라의 이상형은 그녀를 꺾는 자가 되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신임 기사만 제외하고.

그렇게 나엘라와 대련을 하게 된 신임 기사는 다섯 번의 대련 끝에 마음을 접겠다고 외치게 되었다. 마호세르디에 널리 퍼진 유명한 이야기였다.

“체드란이 내 이상형이었네.”

번쩍 눈을 뜬 나엘라는 꿈의 여운에서 헤매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오늘도 체드란의 품 안에서 깨어났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자신을 감싸 안고 있던 팔이 크게 움찔거리기에 나엘라는 고개를 들었다. 며칠째 함께 아침을 맞고 있으니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매번 보는 이 얼굴은 낯설기만 했다.

더 의문인 것은 분명 멀찍이 떨어져 잤는데 눈을 뜨면 체드란의 품 안에 있다는 점이다.

미동 없이 숨만 쌕쌕대는 얼굴을 유심히 뜯어 보았다. 속눈썹조차 백금색인 그는 가지런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안 자는 거 알아요.”

모른 척하기에는 그의 팔이 너무 크게 움찔거렸다.

‘끄응’ 하고 낮게 소리를 낸 그가 서서히 눈을 떴다.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푸른 눈동자에는 잠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나엘라가 눈을 뜨자마자 뱉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의문인 모양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애써 눈을 감고 있던 그를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엘라는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예전에 저한테 고백했던 기사가 떠올라서요.”

“그와 만났었나?”

“연애했느냐 묻는 거면…… 아니죠, 당연히.”

“그럼?”

“두고두고 기사단 사이에서 놀림감이 됐습니다. 제가 결혼하는 날까지 놀림받은 거로 알아요.”

그 뒤로 다른 여자들에게도 고백했지만 연달아 차이는 바람에 더 그랬다.

남자다운 매력이 없는 것일까. 다른 곳에선 마호세르디 기사단이라 그러면 여자들의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그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으니 문제였다.

그 기사가 아직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하고 나엘라의 저주라며 울부짖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악몽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갑자기 이런 꿈을 왜 꿨는지 모르겠네요.”

나엘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체드란도 침대를 빠져나왔다.

“나는 또 나한테 압박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무슨 압박이요?”

“고백하라는 압박 말일세.”

나엘라의 입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침부터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체드란도 농담이 많이 늘었네요.”

하녀들을 부르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나엘라는 체드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린 채 불만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 둔치 대회, 이런 건 없나 모르겠군.”

“아침부터 왜 시비예요?”

“그대에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니네.”

“거짓말.”

“들켰군.”

체드란은 나엘라를 지나쳐 응접실로 향했다.

“그래도 그대에 대한 불만은 아주 조금이네.”

“그럼요?”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 훨씬 크니 걱정하지 말게.”

체드란이 스스로에게 불만이 많다고? 의외의 이야기라 나엘라는 남아 있던 잠기운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 할까.

나엘라의 고민을 눈치챘는지 질문을 받기도 전에 체드란이 먼저 대답했다.

“그대가 준비되는 날이 오면 내가 먼저 얘기하도록 하지. 이 고민마저 그대에게 상담하면 자존심이 많이 무너질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엘라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뿜는 분위기만 보아도 나엘라가 해결해 줄 수 없는 고민 같았다.

“나들이 준비는 다 했나?”

나엘라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지엘라, 하일모라까지 함께하기로 한 나들이 날이다.

“그럼요. 제니가 색별로 맞춘 모자까지 사 왔어요.”

이번 나들이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마호세르디 때의 생각이 나 자꾸만 설레었다. 그때는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지엘라와 하일모라에게 끌려다녔는데 그러지 말 것을 그랬다.

“나는 매우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만 알아주길 바라네.”

“대체 뭐가요?”

“내 소원으로 가는 나들이에 불청객이 많아서 말이야.”

인원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을 본 체드란은 당일인 오늘까지 불안에 떨었다. 인원이 더 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말이다.

“체드란은 가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 거 알죠?”

애초에 명분은 나엘라와 지엘라의 나들이다. 상대적으로 시선을 덜 받을 체드란이 책임지고 움직여야 했다.

페렌츠에 반란군이 실재하는지, 있다면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누가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연히 체드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예정이었다.

“최악이군.”

체드란은 소파에 앉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이 심통 난 어린아이 같아 나엘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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