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아그노멘은 수도 근처의 휴양지임에도 불구하고 수도에서 마차로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에 있다.
황도에서 아그노멘까지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으나 문제는 인파였다. 축제가 열리는 시기라 사교 기간을 맞아 올라오는 귀부인들이 모두 한 번쯤 들르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일찍이 올라온 이들도 꽃 구경을 하러 출석하는 탓에 사람으로 북적였다.
위에서 내려오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통에 정신이 없다지만 그래도 발 디딜 틈 없이 붐비진 않았다. 한 달 동안 열릴 축제기에 암묵적으로 날짜를 정해 오는 탓이다.
지엘라와 하일모라는 함께 오겠다 해서 나엘라는 체드란과 따로 출발했다.
시간이 되면 세레노피 백작도 함께 오라 전했지만, 하일모라가 거절했다. 두 사람 다 부부동반으로 온다면 지엘라 혼자 어색할 거라며 염려한 탓이다. 차마 그 부분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기에 나엘라는 자신의 무심함을 탓했다.
그렇게 아그노멘에 다 와 갈 때쯤,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는 나엘라에게 지안이 말을 걸었다.
“아그노멘에 마호세르디의 별장이 있는 줄 몰랐어요.”
“어머니가 꽃을 좋아하셨거든.”
지안은 단숨에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호세르디가에서 가장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사람을 꼽자면 단연코 공작부인이었다.
그녀가 오기 전 마호세르디령의 정원은 간신히 구색만 갖춘 수준이었다. 하나 꽃을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공작은 정원을 새로 단장했고, 매년 봄이 되면 온갖 꽃이 만개하였다.
수도에 있는 마호세르디 저택처럼.
“그대는 꽃을 안 좋아하나?”
체드란이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좋아합니다.”
답이 뜻밖이라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몰랐군. 대공령의 저택에도 꽃을 가득 채워야겠어.”
“저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아서요.”
나엘라는 그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어렸을 때는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따라 무작정 좋다고 여겼다. 어머니와 같은 것을 좋아하면 어머니처럼 될 줄 알았다.
“어울리네.”
돌아온 것은 체드란의 단호한 어조였다.
“그 누구보다 꽃이 잘 어울리네.”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이 체드란에게로 향했다. 오늘따라 체드란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꽃 같은 사람이 꽃을 좋아해야 어울리죠.”
“내게는 그대도 꽃과 같네.”
나엘라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아버지에게는 줄곧 들었던 말이고 얼마 전에도 들었던 말이다. 분명 똑같은 말일진대 체드란의 말은 다르게 다가왔다.
“제 머리가 검은색임을 잊으셨습니까? 이렇게 까만 꽃이 어딨답니까.”
괜히 민망함이 올라와서 하는 소리였다.
자신도 뻔히 제 이미지가 어떤지 알고 있었다. 마호세르디에 있을 땐 얼굴만 보아도 도망가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자신에게 꽃이라니.
체드란은 부끄럽지도 않은 건지, 아니면 공작에게 팔불출 성미를 옮아 왔는지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밤에 피는 꽃인가 보지. 은하수 속에 피어 있는 꽃 같으니 걱정하지 말게.”
무슨 말을 저렇게 청산유수처럼 이어 가는지, 나엘라는 휙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아까처럼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그녀에게 체드란은 기어코 한마디를 더 뱉었다.
“다음에는 그대에게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꽃들을 선물하지. 그 속에 파묻혀 있으면 본인도 꽃이었음을 느낄 수 있지 않겠나.”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으나 등 뒤에 있는 체드란의 존재감이 크게 다가왔다. 몸 안에서 시작된 열이 얼굴로 옮겨 오기라도 한 듯 볼이 화끈거렸다.
아그노멘의 초입에도 온갖 종류의 꽃나무들이 저를 뽐내듯 활짝 만개해 있었다. 겨우 발을 들였을 뿐인데 벌써부터 꽃 내음이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발끝부터 온몸을 뒤덮듯 퍼지는 향기에 나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이번 나들이에는 꽃 내음이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
대공 부부가 마호세르디 별장에 도착하고 얼마 뒤, 지엘라와 하일모라도 도착했다.
하일모라는 흰색의 가벼운 원피스 차림이었다. 밝은 하늘색 머리카락을 지닌 그녀는 상대적으로 옷색을 고르는 데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 탓에 중요한 자리에는 남색과 검은색, 기분 좋은 자리에는 하늘색과 흰색을 주로 입었다. 유난히 하얀 그녀의 차림을 본 나엘라는 절로 웃음을 지었다.
그녀들을 마중 나온 나엘라가 지엘라에게도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은 부인께서도 밝은 옷을 입으셨네요.”
지엘라는 사실 모든 색이 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마호세르디령에 들락거릴 때는 황실의 부를 뽐내며 매번 색다른 드레스를 입곤 했었다.
사별 후 재회했을 때는 늘 어두운색만 고수했는데 오늘은 밝은 연두색 차림이었다.
“간만에 나들이니까요. 옛날 생각도 나고요.”
옛 추억을 떠올린 것은 나엘라만이 아니었는지 지엘라도 밝은 표정이었다. 세 사람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으나 그 감정만은 충분히 공유했다. 그러고는 하인에게 짐을 맡기고 자리를 옮겼다.
별장 2층에는 흰색의 가구들로 우아하게 꾸며 놓은 테라스가 있었다. 일반 저택의 테라스들보다 몇 배는 될 크기여서 식사를 하거나 여가를 보내는 것에도 문제가 없었다.
“세상에…. 공작님께서 이런 미적 감각을 소유하고 계셨는지 몰랐는데?”
하일모라는 테라스를 보며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테라스의 난간조차 모두 꽃 모양으로 조각해 넝쿨처럼 얽어 놨으니 하는 말이었다. 심지어 생화를 얼기설기 엮어 난간이 죄다 꽃으로 덮여 있었다.
“이쪽으로 차 좀 가져다줘.”
나엘라의 부탁에 지안과 다른 하녀들이 움직였다. 마호세르디의 별장인지라 보안에 날을 세우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편했다.
나엘라가 테라스 의자에 앉자 지엘라와 하일모라도 함께 착석했다.
“아, 맞다.”
하일모라가 다급히 자신의 하녀를 불러 종이 하나를 받았다. 그러고는 베르에티의 쪽지라며 나엘라에게 전달했다.
“이게 대체 뭐야?”
쪽지를 펼쳐 본 나엘라는 곧 의문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오는 길에 지엘라 부인과 고민해 봤는데 도무지 모르겠어. 베르에티가 급히 전해 주라고 했대.”
“만나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 거야?”
“황후의 부탁으로 파르로시와 급히 수도를 떠났다는데?”
나엘라는 집중해 쪽지를 살폈다. 그렇게 급히 떠날 정도면 중요한 일일 텐데, 문제는 쪽지의 그림들을 전혀 알아볼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림 문자는 총 네 가지였다.
네모난 상자 안에 눈 코 입이 있는 동그라미, 네모난 상자를 가로지르는 구불거리는 선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애벌레, 그리고 여러 동그라미와 겹쳐져 있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차례대로 그려져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나엘라는 해석을 포기했다. 그러고는 다른 방향으로 유추해 보았다.
“일단 첫 번째는 어떤 사람이야. 그렇지?”
하일모라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지엘라는 하녀들이 내온 차를 들었다. 지엘라의 시선도 쪽지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베르에티 영애가 어떤 정보를 급히 전하려 했다면 누구에 관한 이야기였을까?”
“음… 너무 많은데?”
“일단 황후와 파르로시, 나, 하일모라, 지엘라 부인, 체드란, 루부스 후작,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제삼의 인물까지.”
자세히 따지면 더 많겠지만 일단은 이 정도였다.
“일단 루부스 후작은 아니야.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영애는 이런 식으로 전하지 않았을 거야. 파르로시를 따라 수도를 떠나지도 않았을 거고.”
하일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삼의 인물도 아니야. 우리가 아예 모르는 인물이라면 이 쪽지 자체가 의미가 없어. 영애도 우리가 쪽지를 못 알아볼 걸 걱정했을 테니까 그림으로 설명할 수 없었을 거야.”
“그럼 우리가 아는 인물이거나 우리일 가능성이 크겠네?”
“영애는 우리가 아그노멘에 나들이 온다는 걸 알고 있어.”
티 파티 바로 다음 날 빼도 박도 못하도록 나들이에 관한 소문을 퍼트렸으니 베르에티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급히 전해야 하는 쪽지라면 어떤 위험에 대한 경고겠지. 그림은 네 가지니까 각각 한 단어씩 네 단어라고 생각해 보자. 일단 첫 번째는 사람이니까, 위험에 처한 사람이거나 계략을 꾸미는 사람이겠지?”
나엘라의 해석에 지켜보던 지엘라도 제 생각을 추가했다.
“이런 걸 해석할 때는 가장 가능성 큰 걸 먼저 생각하는 게 좋아요.”
“그렇죠. 네 단어로 무언갈 전달해야 한다면 위험에 처한 사람을 말하는 게 보통이죠.”
사람 그림은 하나밖에 없으니 지칭도 하나다.
그렇다면 ‘누가 계략을 꾸미려 한다’기보다는 ‘누군가 위험하다’란 의미를 전달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그럼 나머지 세 단어는 어디서, 어떻게 위험한지를 표시한 건가?”
하일모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나엘라는 그림 문자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어쩌면 위험, 그 단어 자체가 들어갔을 수도 있어. 예를 들면 ‘나엘라, 위험, 아그노멘, 암살자’같이 말이야.”
“오!”
하일모라가 맞는 것 같다고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에 대한 경고인 것 같은데? 나들이 얘기 꺼냈을 때 가만 안 두겠다는 눈빛이었잖아.”
나들이를 가기 전에 할 말이 있다면 찾아오라던 황후의 말을 다들 들었다. 티 파티에서 대놓고 한 말이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걸 다들 예상하고 온 모양이었다.
“혹시 황후가 너한테 뭐 시킨 거 있어?”
하일모라에게 따로 시킨 것이 있는지 묻자 바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디 있는지, 어딜 갈 건지, 일정을 계속 알려 달라고 했어. 내가 데려온 하녀 중에 황후의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 정보를 별장 밖,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기로 했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하녀의 이름이나 생김새를 알려 줘. 혹시 모르니까 조심은 해야지.”
“응.”
둘의 대화를 듣던 지엘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엘라와 하일모라가 놓친 부분을 짚었다.
“우리에 대한 경고는 아닐 거예요.”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황후는 늘 여러 명의 시녀와 하녀들을 데리고 다니죠. 부부는 닮는다더니 의심도 닮은 모양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호위들은 더 많고요. 파르로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엘라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베르에티 영애가 우연히라도 그들의 계획을 들었을 리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직접 듣기에는 아직 신뢰가 덜 쌓였을 테고요.”
“네, 만일 황후가 우리 중 누군가를 처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그걸 파르로시에게 알려 줬을 리가 없어요.”
납득이 가는 추론이었다. 만에 하나 베르에티가 우연히라도 계획을 들었다면 감시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황후를 호위하는 누군가가 베르에티가 엿들었음을 전했을 테니까.
그럼 이 쪽지조차 전달받지 못했을 터.
“그럼 이건 무슨 내용일까요?”
하일모라가 황당하다는 듯 쪽지를 흔들었다. 지엘라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고, 나엘라는 생각에 잠겼다.
계속 쳐다보면 답이 나올 것처럼 쪽지에 집중하던 하일모라가 결국 포기를 선언했을 때 까닥이던 나엘라의 검지도 멈췄다.
“어떻게 위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위험한지는 알 것 같아.”
나엘라의 말에 둘의 시선이 모였다.
“누구? 누군데?”
하일모라가 빨리 말하라며 재촉하자 나엘라는 조심히 말했다.
“파르로시 황녀.”
정체를 알게 됐으나 되레 골이 아파 왔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복잡해진 나엘라는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하나씩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