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몰래 황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베르에티는 귀족 영애지, 잠입에 능한 암살자가 아니었다.
“엿듣거나 몰래 들은 것이 아니라면 직접 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정황상 자연스러워. 황후마마가 베르에티 영애에게 누군가에 대해 말했다면 그건 뻔하잖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지엘라를 보고는 하일모라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파르로시 황녀겠지. 영애는 티 파티 때도 파르로시의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잖아. 영애에게 파르로시 황녀 말고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맞아. 황후는 영애에게 황녀를 맡겨 놓았으니까. 그 정도의 신뢰는 있단 뜻이지.”
“그런데 황후의 명으로 영애와 파르로시 황녀가 함께 나갔다며? 위험할 일이 있겠어?”
이 부분은 하일모라도 줄곧 그 모녀를 봐 왔으니 이해할 것이다.
“황후는 파르로시 황녀를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써먹기 좋은 도구 정도로 생각하지.”
“그럼 황후가 황녀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거야?”
“그리고 그런 황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라고 베르에티 영애를 보낸 거라면?”
하일모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엘라도 초조하게 쪽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해석이 정확하게 들어맞진 않겠지만 어쨌든 파르로시가 위험한 건 맞는 듯했다.
황후의 명으로 두 사람이 갑자기 수도를 떠난 것도 그렇다. 만약 파르로시에게 정말 큰일이 생길 예정이라면 베르에티는 어찌해야 할지 묻기 위해 쪽지를 보냈을 수도 있었다. 비록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때 덩치 큰 누군가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체드란.”
마침 필요하던 이의 등장이라 나엘라는 반갑게 그를 맞았다. 현재 움직임이 제일 자유로운 건 그였다.
“주변은 다 둘러보고 온 거예요?”
오자마자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며 나가더니 이제 들어온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체드란이 곧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너를 이렇게 만나는 날도 있군.”
“그러게 말입니다. 편히 대화하는 날이 오긴 오는군요.”
“훗날이 되면 자유로이 만날 날도 올 거다.”
둘에게서 남매 특유의 애틋함이 느껴졌다. 황실에선 편히 반길 수도 없던 상황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더군다나 체드란은 지엘라가 먼 타국으로 시집가는 것을 바라만 봐야 하지 않았나.
“그 날의 제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있을 거다. 막냇동생이 많이 애타하는 중이니 혹여 데테로아 앞에선 그런 말은 말거라.”
지엘라는 옅게 웃고 말았지만, 체드란은 데테로아의 굳은 눈빛을 보았다. 사별한 그녀가 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데테로아가 달려왔음을 알고 있었다. 제국에서 지내라,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다른 이들도 곤혹을 치렀다고 들었다.
조금 처진 분위기를 바꾸려 하일모라가 말을 걸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 꼭 뵙고 싶었습니다.”
정식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 하일모라가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체드란은 아니었다.
“그대가 나엘라에게 이런저런 것을 알려 준 친구라고 들었네.”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아직 그 감정이 생생했다.
“체드란, 하일모라가 내 친구라는 걸 잊지 말아요.”
좋아하는 사람의 순위가 당신보다 높음을, 양자택일을 해야 된다면 하일모라를 택하리란 걸 상기시키자 체드란도 태도를 바꿨다.
“아주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걸세. 앞으로도 나엘라를 잘 부탁하지.”
바람 같은 그 태도에 지엘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체드란은 늘 잦은 암살 위협으로 날이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제 오라비가 어쩌다 저 모양이 되었는지 적응이 안 되었다.
“그나저나 체드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체드란이 한쪽 자리에 앉고 나서야 나엘라는 베르에티의 쪽지를 건넸다.
“그대도 못하는 것이 있군. 그림에는 조예가 없다고 말하지 그랬나.”
“내가 그린 거 아니에요. 베르에티 영애의 쪽지예요.”
“나만 모르는 암호인가?”
“다들 모르는 암호예요. 급히 쪽지를 보냈는데 알아볼 수가 없어서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체드란도 해석을 해 보겠다는 듯 쪽지를 바라봤지만 이해할 수가 없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그를 위해 나엘라가 지금까지 한 추론을 설명했다.
쪽지의 주인공을 파르로시 황녀라 생각하는 이유부터, 그렇게 판단하게 된 경위까지 덧붙이자 체드란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럼 남은 건 한 가지뿐이군. 우리가 왜 파르로시를 구해야 하는지, 그 이유겠지.”
뜻밖의 답변이었다. 당황하는 나엘라를 따라 하일모라와 지엘라까지 입을 다물었다. 체드란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 쪽지의 내용이 정말 파르로시의 위험을 알리는 거라면, 먼저 따져야 할 것이 있어. 현재 우리에게 파르로시를 도울 여력이 있는지, 혹은 그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그 애를 도울 가치가 있는지를 말이야.”
“하지만… 마냥 눈감고 있을 순 없어요. 파르로시가 위험하면 베르에티 영애도 위험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위험하지 않을 거야. 영애가 위험해지면 루부스 후작과도 틀어질 테니까. 지금 황후는 적을 더 만들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네. 그런 위험을 감수하진 않을 거야.”
나엘라는 어딘지 자신을 설득하는 듯한 체드란의 태도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마치 자신이 당연히 파르로시를 구하러 갈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구하러 가겠다고 한 적이 없어요.”
“그랬지. 만일의 사태를 위함이네.”
“제가 파르로시를 왜 구해요?”
“혹시나 하여 말하는 걸세. 그대는 단 한 번도 파르로시 황녀를 직접 공격하지 않았네. 약자는 건들지 않겠다는 신념인가, 아니면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었나.”
대화의 방향이 이상한 곳으로 새는 기분이었다. 어떠한 반박이 입안에서 굴러다녔으나 나엘라는 꾹 삼켰다. 지금은 논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다급한 사안이 코앞에 있지 않은가.
나엘라는 파르로시와 베르에티가 어디로 향했는지, 어떤 위협과 마주했을지 모르는 이 상황에 도박할 마음은 없었다.
“이 얘기는 그만해요. 어쨌든 베르에티 영애는 위험하지 않은 것 같으니 넘어가죠.”
나엘라는 체드란의 손에 있던 종이를 뺏어 들고 지안에게 건넸다. 여러모로 찝찝함이 남아 있었지만, 그의 말대로 파르로시를 구하러 가기에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아그노멘으로 온 목적조차 중대한 사안이다. 파르로시를 위해 뺄 인력도 없고, 목적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축제에 얼굴을 비춰야 한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파르로시를 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황후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린다손 나엘라가 손 뻗을 이유는 없다. 그녀는 적이다.
베르에티가 무사하다면 되었다고 되뇌며 나엘라는 화제를 돌렸다.
“나들이를 왔으니 일정을 정해야 할 텐데요.”
묵인하겠다는 뜻을 받아들였는지 다른 이들도 곧 화제를 돌리며 맞춰 주었다.
“축제는 내일부터이니 오늘은 쉬어도 되겠지.”
“축제 개최 공연을 보면 되겠네요. 폐막 공연은 한 달 뒤에나 할 테니 힘들겠지만요.”
“일정표를 받아 왔어요. 공연 시작은 10시고, 12시에 끝나요. 그 뒤부터는 본격적인 축제 기간이고요.”
“점심은 축제 거리에서 해결하죠.”
여러 이야기를 나눈 끝에 점심 전후로 축제 구경을 하고, 저녁 시간 전에는 저택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저녁 야시장이나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싶다면 늦게까지 남아 있어도 되지만 이들 중에는 딱히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더군다나 별장에서도 불꽃놀이를 볼 수 있기에 상관없기도 했다.
“불꽃놀이는 첫날과 매주 마지막 날에 한다네요.”
“첫날이랑 이번 주의 불꽃놀이는 보고 가겠네요.”
나엘라가 일단 놀러 왔으니 실컷 즐기겠다고 선언했다.
“체드란은 열심히 일해요. 우리의 목적 알죠?”
“셋은 열심히 놀겠군.”
“당신은 아그노멘 영주랑 식사하러 갈 거죠? 오늘 저녁은 우리 셋이서 먹을게요.”
“내 소원…. 내 나들이인데 말이지….”
지엘라가 싱긋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대공 전하 덕분에 잘 놀다 가겠네요.”
이들 중 착잡한 표정을 한 이는 체드란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즐거우면 됐지….”
페렌츠에 가 반란군 본거지임을 확인하면 처단할 계획까지 세워야 하는 체드란은 어딘지 기운이 빠졌다. 할 일이 가득 쌓여만 갔다.
*
귀부인 셋이 편히 이야기하도록 테라스를 빠져나온 체드란은 다롱 부단장과 일부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별장 한곳에 모여 이번 일에 대해 상의하던 이들은 그에게 정한 것을 보고했다.
“페렌츠에 잠입할 기사들을 정했습니다. 지도도 확보해 의심 가는 곳을 표시해 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체드란은 다른 지시들을 확인했다.
“페트론 황자의 죽음은 확인해 보았나?”
체드란이 따로 붙여 줬던 자들이 있었다. 소속은 알 수 없었으나 생각보다 행동이 재빠른 자들이 많아 정보 수집에 용이했다.
그러나 체드란이 원하던 정보는 결국 얻을 수 없었다.
“마호세르디 공작부인과 페트론 황자의 연관성은 찾지 못했습니다.”
“황후와의 연관성은?”
“그것도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체드란은 인상을 찡그렸다.
다나한은 분명 공작부인의 죽음과 체드란이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정확히는 페트론 황자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했으니 그쪽을 알아본 것이다.
애초에 마호세르디에서 정보를 줬다면 쉬웠을 일인데. 정작 갖고 있는 사람은 주지 않은 데다 다른 쪽 정보도 함께 확인하다 보니 늦어지고 있었다.
“나엘라와의 연관성은?”
혹시 모르니 확인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건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다롱의 말에 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 만큼 시간은 더 걸릴 터. 조급한 마음이 들지언정 재촉해선 될 일도 안 되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행동이 재빠른 몇 명을 준비시키도록.”
“따로 확인할 곳이 있으십니까?”
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정해지진 않았지만, 파르로시의 일을 대비해야 했다. 나엘라는 워낙 어디로 튈지 몰라서 준비하는 이유도 있다.
더불어 황후에 대해 잘 모르기에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체드란은 알 것 같았다. 황후가 타국과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생각했던 가정이기도 했다.
상황을 눈치챘으나 체드란은 나엘라에게 언질하지 않았다. 나엘라라면 황후의 속내를 깨닫는 순간 적지 않게 심란해할 터였다.
나엘라는 그런 사람이니까.
“사람을 빼 와야 할 수도 있다. 일단 준비는 해 두도록.”
“네. 알겠습니다.”
지시해 놓았음에도 착잡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상황이 정말 제 예측대로 흘러간다면, 파르로시가 처한 위험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피해도 상당할 것이다.
위험도가 높은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제발 나엘라가 같이 간다고 하지 않기를, 체드란은 그렇게 바랐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