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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03)화 (103/220)

102화

파르로시는 심기가 불편한지 연신 짜증을 부렸다.

“대체 왜 이렇게들 행동이 굼뜬 거야? 어떻게 이런 애들을 하녀로 붙여 줄 수 있어?”

페렌츠 영주가 나름 성심성의껏 사람을 골라 붙여 줬음에도 파르로시는 만족하지 못했다.

“황실에서 만났다면 당장 걸어 다닐 수도 없게 만들었을 거야.”

그녀는 드레스를 제대로 매만지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녀에게 화를 내던 중이었다.

“수도가 아닌 곳에서 일하던 하녀들이니 최신 드레스를 얼마 만져 보지 못했을 겁니다.”

혹여 하녀가 매질당하고 끌려 나갈까 봐 베르에티는 파르로시의 기분을 달래 주었다.

“바느질 하나 똑바로 못 하는 것들을 어디에다가 쓰겠다는 건지.”

경멸 어린 눈길로 하녀를 바라본 파르로시는 드레스를 집어 던졌다.

“갖다 버려. 망친 드레스를 입게 할 참이야?”

그녀가 이렇게까지 패악을 부리는 이유는 드레스나 하녀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딴 곳에서 지내라고? 세상에, 이 바닥 좀 봐. 어떻게 하면 싸구려들만 모아서 건물을 지을 수 있지?”

그들이 지낼 곳은 페렌츠의 외곽 지역이었다. 파르로시의 눈에는 건물도 사람도 다 보잘것없어 보여 모든 것이 역겹게만 보였다.

“침대는 또 어떻고!”

일일이 하나하나 짚어 가며 짜증을 부리는 통에 베르에티도 피곤이 쌓여만 갔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시 나오시라고 합니다.”

조용히 속삭이는 것을 보니 파르로시는 모르게 행동하라는 것 같았다.

“잠시 제 방 상태 좀 보고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제 방 또한 상태가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파르로시의 방을 제일 좋은 곳으로 줬다 하니 제 방이야 말할 것이 뭐 있을까.

짜증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뒤로하고 베르에티는 방을 빠져나왔다.

밖에 서 있던 하녀가 안내하는 대로 걸으니 복도 가장 끝에 서서 창문 밖을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딱히 볼거리도 없을 텐데 베르에티가 바로 옆으로 다가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르셨나요?”

베르에티도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보이는 광경이라곤 정원의 끄트머리 정도였다. 아마 파르로시의 방에선 중간 정원이 보여 경치가 좋을 것이다.

“오늘 저녁은 파르로시 황녀님과 저, 베르에티 영애, 그리고 손님들까지 소소한 만찬이 있을 겁니다.”

갑작스러운 약속에 베르에티는 깜짝 놀랐다.

베르에티와 파르로시는 이곳에 도착한 뒤로 누구 하나 본 적이 없었다. 주요 인사나 손님들을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정보를 차단한 것이다.

단순히 베르에티를 믿지 못해서라기보단 이곳에 있는 이들의 정보가 그만큼 중요하리라 여겼었다. 그런데 그런 주요 인사들과 만찬이라니, 갑작스러웠다.

베르에티를 믿는 것일까.

“그러니 황후마마가 시키신 것을 준비하십시오.”

“시론 경…!”

눈이 동그래진 베르에티는 급히 에스토의 팔을 붙잡았다.

“당장 오늘부터라니요. 황녀님께 너무 가혹합니다…!”

파르로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베르에티도 그녀가 합당한 죗값을 치르고 벌을 받아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게 기다려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황후마마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그가 바쁘다는 것은 알았다. 페렌츠에서 베르에티나 심지어 딸인 파르로시도 모르게 주요 인사들을 만나며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이리도 잔혹할 수가 없었다.

“시론 경 제발….”

“영애.”

에스토의 눈동자가 한없이 차가웠다.

이런 자가 마호세르디에선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운 인물이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하일모라가 말하던 에스토와 제가 본 에스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 않는다면 영애의 입을 막기 위해 황후께서 무슨 짓을 할 것 같습니까?”

이미 베르에티는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아 버렸다. 제 목숨을 보전하려면 얌전히 협력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베르에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이런 촌구석에서 무슨 손님이야.”

파르로시는 한껏 꾸민 제 치장을 비웃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할 일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제 어머니의 성정을 아는지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단한 손님이긴 한 모양인지 하녀들이 치장에 공을 들였다. 목욕할 때도 욕조에 엄청난 향유들을 쏟아붓고 마사지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대접이 융숭한지라 파르로시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

“황후마마께서….”

뒤따르던 베르에티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파르로시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겨우 웃음을 띠고 말을 이었다.

“황후마마께서 황녀님이 잘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파르로시도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진짜로 했을지도 모르지만 진심을 담은 건 아닐 것이다. 제 어미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라 그녀도 웃음을 지었다.

“식사가 맛있었으면 좋겠네.”

베르에티도 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뒤따랐다.

“그런데 영애는 왜 그런 싸구려 드레스를 입고 있어? 뭣하면 내 드레스라도 빌려주고.”

베르에티의 드레스도 저렴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파르로시에 비하면 화려하지 않을 뿐이었다.

“아쉽게도 제가 황녀님과 체형이 달라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화려함은 제게 어울리지 않아서요.”

황후를 닮아서일까, 파르로시도 화려한 장신구나 드레스들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런 디자인이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본인도 알기에 파르로시는 어쩔 수 없다며 말을 말았다.

“나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어쩔 수 없네.”

파르로시에게는 어찌 보면 처음 생긴 시녀나 다름없었다.

이때까지는 황후의 시녀들이 파르로시까지 함께 돌보아 왔다. 그들은 무엇보다 황후를 우선했고 파르로시의 말 또한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니 나이가 비슷한 베르에티가 더 편하고 처음 생긴 진짜 시녀처럼 느껴졌다. 그녀 또한 황후의 말을 듣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느껴지는 거리감이 달랐다.

“그래서 오늘 손님은 누군데?”

“저도 시론 경에게 들은 것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하, 시론 경은 어마마마를 어떻게 구워삶은 거람.”

황녀가 하는 말치곤 격이 낮았지만, 제지하던 이들이 없었기에 거침이 없었다.

어느새 식당 앞에 도착한 그들은 대기하던 하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스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었는데, 빈 한쪽 상석과는 달리 반대쪽 상석에는 웬 남자가 자리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타국의 외향을 가진 남자는 파르로시 황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눈빛이 무례할 만큼 거리낌이 없어 파르로시가 울컥하는 것이 보였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하인의 안내에 따라 비어 있던 상석에 파르로시가 착석했다. 그 옆에 자리하고서야 베르에티는 다른 이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웃고 있으나 어딘지 냉랭한 느낌의 에스토와 상석에 앉은 사람처럼 타국의 외향을 한 남자가 넷, 가끔 파티에서 봤던 귀족이 둘, 그리고 아예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도 몇몇 보였다.

베르에티는 얼굴을 모르는 남자들을 주의 깊게 보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눈을 깔았다.

“얘기만 듣던 황녀님을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 제가 타국 사람이라 제국의 예의에는 조금 무지하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상석에 있던 남자가 입을 열자 다른 이들이 함께 웃으며 분위기를 맞췄다.

“하하, 져먼 님께서 이렇게 남자다우시니 황녀님께서도 관대히 양허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국에 오신 귀한 손님이신데 말씀 정도는 편하게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파르로시는 황후의 말을 되새긴 듯 겨우 웃으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어마마마께서 중요한 손님이라 잘 대접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편히 말씀하시지요.”

황후의 말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패악을 부렸으리란 어조였다.

“그것참, 다행이로군요. 우리는 틈틈이 친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자들 사이에서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곳에서 대화를 못 알아듣는 것은 파르로시뿐이었다. 그녀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베르에티는 더더욱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녀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베르에티가 준비해 온 것들이 반항하는 파르로시를 안정시킬 약임을 어찌 말할 수 있을까.

황후의 명으로 상처약, 진정제와 수면제를 준비할 때에서야 제가 왜 필요했는지 깨달았다.

황후는 결혼할 상대에게 파르로시가 얌전히 수긍하지 않고 반항할 시 체벌을 하라 명했다. 벌어지는 일과 파르로시의 제어를 베르에티가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자신조차 파르로시를 써먹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베르에티는 마지막으로 에스토를 바라보았다. 하일모라의 이야기 속 따뜻했던 에스토를 기대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눈동자뿐이었다.

마치 흔들리지 말고 제 할 일을 하라는 듯 단호한 눈동자.

“황녀님이 이리 순수하시니 저는 더 기쁩니다.”

남자의 어감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파르로시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 갔다.

남자의 기분을 맞추려는 듯 파티에서 몇 번 보았던 귀족이 추임새를 넣었다.

“싱그러운 꽃이란 황녀님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자 또한, 황후에게 잘 보이려 파르로시에게도 늘 아양을 떨던 남자였다. 그 순간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 파르로시가 선을 그었다.

“어마마마의 손님들이고 타국분이시니 넘어가겠습니다만,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나름 황후를 흉내 내려 했을까, 위엄 있는 태도를 고수하려 했으나 남자들의 눈에는 그저 발악처럼 보일 뿐이었다.

“곧 부부가 될 사이니 좋게 봐주시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파르로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어느새 등 뒤로 타국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앉으시지요, 황녀님.”

새하얗게 질려 가는 파르로시를 바라보며 베르에티는 아찔함을 느꼈다.

이제는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제 손으로 막아 낼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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