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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04)화 (104/220)

103화

테라스에서 오랜 티 타임을 끝낸 나엘라는 방 안으로 들어와 가만히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한 장의 쪽지가 올려져 있었고 나엘라는 소파 손잡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어느새 다가온 저녁 시간에 보다 못한 제니가 쪽지를 가져가 버렸다.

“그만 보세요. 파르로시 황녀의 일은 덮기로 하셨잖아요.”

“혹시 모르잖아. 베르에티 영애가 위험해질 수도 있고.”

“핑계인 거 알아요. 찝찝해서 그러시잖아요.”

“영애에 대한 걱정도 맞아. 그리고 이런 건 해결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결국, 제니는 한숨을 쉬며 쪽지를 감췄다. 나엘라의 성격을 알지만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그녀는 누군가를 걱정하며 도울 때가 아니었다.

“저녁 식사는 1층 식당에서 하자고 연락받았습니다. 다들 그곳에서 식사하실 거예요.”

별장의 가장 고층에 있는 주인 방은 나엘라와 체드란이 사용하기로 했고, 지엘라와 하일모라는 아래층 손님 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아마 시간 맞춰 내려가다 보면 다들 마주칠 것 같았다.

“체드란은?”

“아그노멘 영주님과 식사하시기 전 잠시 확인할 게 있으시다고 나가셨습니다.”

대공이 방문했으니 영주의 식사 초대는 당연한 일이지만 당장 오늘 움직일 계획은 없었다. 나들이로 온 이들이 뭐가 급하다고 여독도 풀지 않은 채 움직이겠는가.

하지만 정세 파악은 빠를수록 좋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고, 체드란은 결국 움직인 듯싶었다.

그 와중에 뭘 또 확인하겠다고 나갔는지 모르겠다.

“옷도 갈아입으셔야 하니 어서 일어나세요.”

무슨 옷을 시간마다 갈아입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엘라는 놀러 와서까지 그래야 하냐며 불평을 했지만, 하녀들에겐 전혀 먹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하녀들의 손길에 따라 몸을 맡겼다.

“그런데 황후 말이야.”

“생각하지 마시라니까요.”

“그냥 좀 이상해서.”

팽팽한 고집 대결에서 진 건 결국 다른 이들이었다. 이럴 땐 나엘라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좋다는 걸 알기에 경청하기 시작했다.

“뭐가 이상하신데요?”

“파르로시가 체드란에게 가진 마음이 뭐라고 생각해?”

“뭐… 유일한 구원자가 아니었을까요? 파르로시 황녀는 황제의 무관심과 황후의 학대 속에서 자라 왔으니까요.”

그녀의 친 오라버니인 페트론 황자는 황태자가 되지 못할 거란 질투와 압박감을 다른 이들에게 풀 정도로 야비한 성정이었다. 그러니 파르로시에게 애정을 주었을 리는 만무했다. 그것은 곧 그녀의 고립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나타난 것이 체드란.

“그런 감정이 깊어져 집착으로 변했다는 건 이해가 돼. 그런데 이상한 건 황후야. 체드란을 싫어하면서 파르로시의 감정이 자라는 건 왜 내버려 뒀지?”

드레스를 갈아입히던 이들은 대체 나엘라의 고민이 왜 거기까지 이어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베르에티의 쪽지를 고민하다가 황후까지?

하녀들의 의아한 표정을 읽은 것인지 나엘라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냥 파르로시가 어떤 위험에 놓였는지 고민하다 보니 황후의 태도가 이상해 보여서.”

딸을 어떻게 위험으로 내몰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둘의 관계를 고민하며 이상했던 점들을 이해해 보려는 것이고.

“저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지안이 대답하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갑작스러운 관심이 멋쩍었는지 지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는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제가 태어난 빈민촌에선 의외로 흔한 경우에요.”

빈민촌에선 부모와 아이가 사이좋은 경우를 찾기가 더 어려웠다.

사랑은 금전적인 여유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그 전제의 산증인 같은 이들이었다. 돈을 위해서라면 자식 정도는 기꺼이 팔아넘길 수 있는 이들이 수두룩했으니까.

“그럼 황후는 황녀에게 무슨 생각일 것 같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저라면…… 질투일 것 같아요.”

“질투?”

나엘라는 고개를 기울였다. 전혀 예상 못 한 뜻밖의 이야기라 더 그랬다.

“네, 질투요. 황후의 어린 시절은 핍박과 학대의 연속이었죠. 살길을 찾기 위해 여러 남자와 만나다 황제가 어떤 사람인 줄 알면서도 그를 붙잡았을 정도로요.”

“그럼 자신의 어린 시절에 비하면 파르로시는 평탄한 것 같아서란 소리야?”

“그런 것도 있겠죠? 한데 전 그것보다도 대공 전하를 좋아하게 내버려 뒀다는 점이 더 소름 돋아요.”

“왜?”

“그건 질투 같은 감정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더 음습하고 더러운 악의니까요.”

“악의?”

“어쩌면 증오와 비슷하겠네요.”

나엘라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황후는 자신의 삶과 다른 파르로시를 질투했고 그래서 그녀를 학대했다. 파르로시가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서.

그런데 체드란을 좋아하는 것을 왜 방관했을까.

살기 위해 여러 남자를 만나야 했던 황후와 오로지 체드란만을 좋아한 파르로시.

황후가 가진 감정은 악의와 증오. 증오를 가졌다면 파르로시가 불행하길 원할 것이고, 체드란만을 좋아해 온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불행이란…….

“황후는 타국의 군사력을 빌려야 했어.”

나엘라가 나지막하게 그리 중얼거렸다.

“힘을 얻고 신뢰를 쌓기 위해선….”

제국의 황녀 파르로시, 그녀만큼 좋은 거래 조건이 있을까.

이제야 파르로시가 처한 위험이 뭔지 깨달았다.

지엘라만 보더라도 답이 나왔다. 화합을 다지고 서로를 묶을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결혼이었다.

“하! 결혼이었네. 타국과 혼인으로 묶으려는 거야.”

나엘라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 같은 표정이던 지안은 차가운 비유를 곁들였다.

“거래를 하기 전 거래 물품을 먼저 공개하는 거랑 같은 거네요. 파르로시가 어떤지 보여 주는 거죠.”

더없이 냉정한 말이지만 틀린 표현도 아니었다. 황후에겐 파르로시는 물건일 테니까.

“페렌츠로 갔겠네.”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으나 페렌츠로 갔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황후의 계획을 일정 부분 공유하고, 맛보기로 군사력을 조금 빌릴 겸 파르로시도 선보일 겸 타국의 왕족이 직접 방문했을 거다.

그때, 방 밖에서 들린 노크 소리에 가린이 나가 보았다. 은밀하게 전해진 쪽지를 건네받은 가린은 복도에 다른 사람은 없는지 확인한 뒤 안으로 들어왔다.

“클로에가 쪽지를 보냈어요.”

나엘라의 기사 단원이자 지금은 황실 하녀로 잠입한 이였다.

“갑자기?”

황제를 믿을 수 없으니 먼저 연락하지 말라고 전한 상황이었다. 누구보다 충실히 지킬 사람인데 이상한 일이다.

쪽지를 건네받은 나엘라는 황급히 펼쳐 보았다.

『아이스크림, 인형과 함께 황궁을 은밀히 벗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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