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로브에 달린 후드로 환한 금발을 가리고 복면까지 쓴 체드란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이미 해는 지고 있었고 나무가 빽빽한 숲속엔 더 빨리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오가는 수신호에 맞춰 달리던 체드란은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조금 떨어져 있던 기사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소리 낮춰 말을 걸었다.
“이곳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부단장님이 가신 지점인 것 같습니다.”
체드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원을 나눠 페렌츠를 수색하는 것도 벌써 몇 시간째였다. 유력한 네 곳 중 두 곳은 이미 판별했고, 다롱 경이 간 곳과 체드란이 온 곳만 남았었다.
그런데 지금 체드란이 온 곳조차 아닌 것으로 확인됐으니 남은 것은 다롱 경이 간 지점뿐이었다.
“돌아간다.”
그 말에 기사가 양쪽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빠르게 전달한 수신호를 따라 사람들은 일제히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각각 해당 지역을 확인하고 난 후 중간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금방 보고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그노멘 영주와의 약속 시각까지 얼마나 남았지?”
무리해서 움직이고 있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별장을 들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혹시 몰라 갈아입을 옷을 미리 준비해 둬 다행이었다. 방문해 주어 감사하다는 의미로 초대된 식사 자리다 보니 너무 늦는 것은 좋지 않았다.
“일단 빠르게 움직이지.”
이 숲에는 평범한 마을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했기에 그들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빠르게 달리기 시작하자 숲을 빠져나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대공령에 있을 때보다 훈련량이 줄었음에도 체력이 떨어지지 않은 체드란은 숨도 고르지 않은 채 말에 올랐다.
한쪽에 매어 뒀던 말에 모두 오르고서야 기사들은 초조하게 길 반대편을 살폈다.
약속한 시각이 되었으나 다롱 경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누가 지나갈 것을 대비해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롱 부단장님께서 시간 약속에 늦으시는 분이 아닌데 이상합니다.”
기사의 말에 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늦어진다는 건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다. 꼼꼼히 봐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지.”
그와 함께 전장을 돌아다녔던 기사들이라면 다 아는 지식이었다.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 이상해 말을 걸었던 기사를 바라보니 대공령 소속이 아니었다.
“톨레로 상단 소속이군.”
“예. 코더 님의 명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체드란이 데려온 대공령의 기사들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해 다롱 경에게 붙여 줬던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정보전을 경험해 본 이들이 더 능할 것 같아서였다.
“불러 놓고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군. 불편함은 없나?”
“없습니다.”
“그래. 다른 이들에게도 불편한 게 없는지 확인해 보도록.”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깐의 대화가 끝나자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즈음 체드란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기사가 돌아본 곳에는 로브 후드 사이로 드러난 푸른 눈이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대는 내가 아그노멘 영주와 식사한다는 걸 어찌 알았지?”
체드란이 그 이야기를 전한 상대는 다롱 경뿐이었다. 물론 인원을 나눠 따로 움직이는 만큼 제 빈자리를 염려한 다롱 경이 보좌할 이를 선택해 전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체드란은 혹시나 하여 묻는 것이었다.
“그게….”
기사는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했다. 다롱 경에게 전달받았다면 곧이곧대로 얘기하면 될 일인데 왜 말을 못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덩달아 체드란의 시선이 싸늘해지고, 주변에 있던 이들도 함께 긴장하기 시작했다. 대답에 따라 첩자 여부를 의심해야 할지도 몰랐다.
“다른 이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귀가 좋은 자라 저에게도 말해 주었는데, 저도 모르게 걱정되어 입에 올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이?”
“예. 저와 같이 온 자 중에 톨레로 상단 소속 용병에게 들었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네. 서튼이란 용병입니다.”
서튼? 어딘지 익숙한 이름에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문득 나엘라의 기사단 소속이었다던 인물이 떠올랐다.
‘이 서튼 님을 모른다고? 맙소사, 역시 한동안 너무 조용히 산 게 틀림없어. 나 때는 말이야, 위대한 용병 서튼 님을 보면 당장 도망가라는 말이 있었다고.’
나엘라를 따라갔던 곳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분명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용병이나 하는 자라며 신경 쓰지 말라 했었는데….
“그자는 지금 어디 있지?”
“다롱 부단장님을 따라갔으니 부단장님과 함께 돌아올 겁니다.”
“하.”
체드란의 입에서 절로 어이없다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갑자기 마호세르디가 정보전에 능하다던 것과 어디에도 마호세르디의 첩자가 있다던 말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아직 확실한 건 하나도 없고 나엘라가 톨레로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래서 사피오를….”
“예?”
중얼거린 혼잣말에 애먼 기사가 대답했지만, 체드란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서튼과 나엘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기다리던 이들이 보였다. 얼마나 속도를 냈는지 다롱 경은 흙먼지까지 요란히 피우며 체드란의 옆으로 달려왔다.
“워! 워!”
급히 말을 진정시킨 다롱 경은 바로 보고했다.
“본거지임을 확인했습니다. 군사들의 규모는 더 정확히 확인해 봐야겠지만 대략 2,500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1개 연대 규모입니다.”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군사력이었다.
어느새 이 정도로 군사를 키운 걸까. 새삼 황후의 집요함에 감탄했다.
제스라와 두칸의 협력을 얻어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반란군과 황후에게 붙은 귀족들 사병을 출전시켜 황실군과 맞붙는다면 해 볼 만할 정도다.
황제의 숨겨 둔 패들을 타국의 군사력으로 대처한다면 승전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황후가 정말 이를 갈았군. 타국 군사의 범위는 측정되었나?”
타국인들은 외향이 다르니 파악이 쉬웠다.
“얼마 없는 것 같습니다.”
타국의 귀족을 호위할 정도로만 데려온 것 같았다.
애초에 북쪽 귀족들 중에는 황후와 협력하는 자들이 많았다. 북쪽에 숨겨 두었거나 아직 밀입국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확인이 끝났으니 돌아간다.”
중요한 건 반란군과 황후가 내통했다는 증거다. 황후가 꼬리를 자른다면 의미가 없다.
또한, 이들이 제국에 보고되지 않은 사병인 점과 반란군임을 주장하는 증거도 함께 찾아야 할 터다.
“그런데…….”
다롱 경과 함께 온 자들 중 유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감춘 사람이 있었다. 기억 속의 서튼과 체구도 얼추 비슷해 보였다. 지금 당장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어려운 건 아니나 아무래도 단둘이 따로 보는 게 나을 듯싶었다.
“아니네. 그만 가지.”
체드란이 말을 박차자 말이 움직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 아그노멘 영주를 만나 페렌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지 떠봐야 한다.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니 할 일이 넘쳤다. 본거지를 확인하는 일정만 며칠을 예상했는데 오늘 확인할 수 있었으니 더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엘라도 걱정이었다. 체드란이 도착하자마자 페렌츠의 본거지를 확인하러 움직인 것은 나엘라를 위해서였으니까.
나엘라가 움직이려 한다면 그 전에 본거지를 알아놔야 했다. 위치를 알아야 파르로시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꼭 파르로시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나엘라가 당장 오늘 움직이고자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이뤄 주고 싶어 체드란은 더 빠르게 말을 몰았다.
아그노멘 영주와의 식사를 끝내고 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
지엘라와 하일모라가 함께하는 저녁 식사는 즐거웠다. 이렇게 마음 편히 이야기하고 즐겁기만 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가늠이 안 될 만큼 아득히 다가왔다.
마호세르디에서조차 이 정도로 편하지는 않았었다. 그때는 나엘라가 지엘라를 어려워했으니까.
그래서 나엘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내었다.
“그래서 지엘라 부인을 처음 봤을 때 제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다니까요?”
하일모라가 지엘라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웃었다. 이제는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 있는 추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공비를 남자로 착각하다니요.”
“그런 게 고정 관념이죠. 여자가 검을 들고 갑옷을 입고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겠어요?”
작은 이야기들이 어찌나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나엘라, 너 어디 아파? 왜 이렇게 못 먹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질문에 나엘라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그간의 일정이 너무 고되었나요? 음식이 그대로예요.”
지엘라까지 걱정을 더하자 나엘라는 정말 괜찮다며 대꾸했다.
“오늘따라 너무 좋아서 그래요. 이런 평화가 좋아서요.”
나엘라는 그렇게 웃었다. 무엇을 외면하든 그것은 결국 이들을 위한 것임을, 이런 평화를 위한 것임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훗날에도 이리 맘 편히 만나 웃었으면 좋겠어요.”
진실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곧 다짐이기도 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견뎌 내겠다고, 누군가의 고통을 무시한 대가 또한 자신의 죄니 오롯이 감당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오늘따라 표정 관리를 잘한 덕일까, 하일모라가 나엘라를 보며 방긋 웃었다.
“해산물이 없어서 그렇구나? 좋아하는 게 없으니 이리 못 먹지. 내가 주방장에게 말해 놓을게.”
그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나엘라는 수저를 들었다.
누가 봐도 맛있다는 양 수프를 떠먹고 메인 요리를 개인 접시에 덜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도 실력은 나쁘지 않네.”
그런 그녀의 너스레가 나쁘지 않은지 하일모라와 지엘라도 웃으며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엘라는 부지런히 음식들을 꾸역꾸역 씹어 넘겼다. 평상시에도 음식엔 까탈스럽지 않은 나엘라답게 접시를 비우고 또 비웠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