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아그노멘 영주, 라크델 아그노멘 남작과 마주 앉은 체드란은 천천히 음식을 음미했다. 맛은 잘 모르지만 느긋하게 굴 필요는 있었다.
“음식은 괜찮으십니까?”
“괜찮군.”
남작은 한시름 놓은 듯 표정이 밝아졌다. 갑작스러운 대공의 방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부산을 떨어 댄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좋은 음식을 대접받았군. 갑작스레 약속을 잡아 미안하네.”
“아닙니다. 절대 개의치 마시옵소서.”
남작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간 많은 귀족을 만났다지만 오늘의 상대는 그 범위를 훌쩍 넘어섰다. 무려 노헤스카 대공이 아닌가.
그러니 행동을 더욱 조심하고 스스로를 낮출 필요가 있었다.
“그러지 말고 편히 말하게. 아그노멘에 무슨 문제라거나 필요한 것은 없는가?”
“전혀요.”
너무 단호한 대답이었을까, 제 대답에 스스로 더 놀란 남작은 얼른 다른 말을 찾았다.
“물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문제없습니다.”
“이런…… 감사 인사조차 제대로 못 하게 생겼군.”
남작은 순간 자신이 너무 거절만 했음을 깨달았다. 여러 번 권한다면 한 번은 받아야 예의이거늘, 자신은 대공의 제안을 무려 두 번이나 거절한 셈이다.
“그, 그러니까….”
“사소한 것도 괜찮네.”
눈물을 머금은 남작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하필이면 대공은 덩치까지 커서 더 압박감이 들었다. 마치 사자 목이라고 따고 온 듯한 기세였다.
“아! 그렇다면 노헤스카 대공령의 군수 물품을 조금 거래해 주셨으면 합니다.”
“군수 물품?”
“예. 저희가 요즘 군수 물품의 물량이 모자라서요. 아무래도 관광객이 많이 오가다 보니 대장간이나 무기 판매점도 사람이 바글바글한 편입니다. 시기가 시기라서인지 요즘 그쪽 공급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열심히 얘기하던 남작은 문득 체드란의 표정이 이상함을 느꼈다. 한쪽 눈썹을 올리고 가만히 바라보는 태도에 순식간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제야 자신이 지금 꺼낸 말의 무게를 깨달은 것이다.
“저희가 쓰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팔기만 했습니다!”
군수용품의 조달이 필요하다는 것은 언제나 여러 의심을 불러오는 법이었다. 크게 당황했는지 남작은 두 손까지 내저어 가며 해명했다.
“누가 사 가는 것이지?”
“그건 저희 쪽에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늘 여러 곳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와서요.”
“언제부터 그랬나?”
“몇 년 안 됐습니다.”
그 뒤로도 남작은 한참 동안 해명을 이어 나갔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체드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작을 다독였다.
“남작을 의심하진 않네. 그대의 충심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겨우 한시름 놓은 남작은 손아귀에 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위험 분자가 될 뻔했으니 오늘은 신께 기도라도 올리고 자야겠다고 다짐했다.
“대신 한번 조사는 해 봐야겠군.”
마음을 놓았던 남작은 다시 하얗게 질려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입방정이 결국 일을 친 것이다.
그런 남작을 뒤로하고 체드란은 식사를 마저 이었다. 적절한 명분을 얻은 것에 흡족한 기분을 느끼며 말이다.
페렌츠 조사에 대한 명분은 이것으로 되었고, 시기만 잘 조율하면 될 듯했다.
체드란은 나엘라에게 자랑하고자 얼른 돌아가고 싶어졌다.
*
나엘라는 침실 테라스 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단장한 꽃나무들이 은은한 달빛을 머금어 하염없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 절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 나엘라는 그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설탕물이라도 드셔야 합니다.”
지안이 다가와 컵에 담긴 설탕물을 건네려 했지만, 나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저녁에 먹은 것들을 모두 토해 낸 후였다. 아무래도 얹힌 듯 내내 명치가 아프더니 식사를 끝내고 올라오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 뒤부터는 물조차 입에 대지 않고 꼬박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다른 이들이 애타하든 말든 그녀의 앉아 있는 자세는 곧고 바르기만 했다.
지안이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소리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그 잔을 대신 받았다.
“내가 마시게 하지.”
체드란의 목소리에 나엘라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방 안의 모든 이들이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자 체드란이 설탕물을 내밀었다.
“얘기 들었네. 이거라도 마시게.”
“요즘 제 하녀들이 제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흘리는 것 같습니다.”
“그대의 하녀들이 요즘 나를 보필하느라 내 하녀도 겸하고 있어 그러네. 주인이 둘이 됐으니 어쩌겠는가.”
“그리고 그거 유리잔입니다.”
체드란은 그제야 제 손에 잡힌 컵으로 눈을 돌렸다. 투명한 자태를 본 그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트라우마가 한순간에 나았으니 좋아해야 할지, 지금이라도 놀란 듯 당장 던져 버려야 할지 고민이었다.
“주세요. 먹을 테니까.”
나엘라가 잔을 뺏어 들자 체드란은 트라우마가 일시적으로 고쳐졌다 생각하기로 했다. 설탕물을 거부하던 그녀가 단숨에 마실 정도로 자신을 걱정했으니 말이다.
“잠시 산책은 어떠한가?”
“저는 아플 때 누가 산책하자 권하면 기겁하는 병이 있어요.”
“없는 트라우마 만들지 말고 일어나게.”
“진짜예요. 제가 일곱 살 때 오라버니들이 했던 짓을 아셔야 하는데.”
체드란이 손을 내밀고 꿈쩍도 하지 않자 나엘라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을 잡고 침실에서 나가니 대기하던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갔다 와서 바로 잘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쉬어.”
“하지만….”
“체드란이 내 시중들 거야.”
옆에서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엘라는 가볍게 무시했다. 억지로 산책까지 끌고 나가는 사람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걸음을 옮긴 둘은 저택 1층으로 내려와 별관으로 향했다.
사각형의 모서리처럼 생긴 본관과 별관이 정원을 품은 듯 조성돼 있어 어딜 가나 정원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별관 쪽의 경치가 더 좋아서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언제 정원까지 나와 보았나?”
“오자마자 정원을 둘러보았습니다. 하일모라와 지엘라 부인이 오기 전에요.”
“그대가 꽃을 좋아한다는 것을 깜박했군.”
갑자기 아그노멘으로 올 적에 마차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나 나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세상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매우 곤란해지니 말이다.
어느새 별관 앞에 도착하니 정원 한가득 심어 놓은 흰색의 꽃들이 보였다. 정원의 뒤, 별장 너머로는 아그노멘의 꽃나무들이 색색의 꽃을 피운 채라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흰 꽃들 사이로 이어진 길을 걷자 아찔한 꽃향기들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생각해 봤나?”
갑작스러운 체드란의 질문에 나엘라는 고개를 돌려 그와 마주 봤다. 무수한 흰 꽃들 사이에 선 체드란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백금발은 화사한 꽃들과 퍽 잘 어울렸다. 어쩌면 반사되는 달빛들이 은은한 분위기를 주어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고.
“뭘요?”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질문했지 않았는가.”
대체 언제 적 이야기란 말인가. 수도로 오기 한참 전에 받은 질문이었다.
이런 질문을 하기 전에는 언질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오래전 질문을 되짚어 볼 생각도 않은 것에 양심이 찔려 나엘라는 최대한 돌려 말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라 할 줄 알았던 그는 의외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알았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나엘라의 머리를 흩트렸다. 꽃들이 바람 따라 한쪽으로 기울고 꽃잎들이 하나둘 몸을 던졌다. 색색의 꽃잎이 어두운 밤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날린 머리카락에 쓸려 한쪽 눈을 깜박인 나엘라는 이상한 감정들을 뒤로하고 물었다.
“어떻다는데요?”
“쉽게 알려 주고 싶지는 않네. 그대가 왜 아직도 모르는지 의문이군.”
“힌트라도 주세요.”
“세상엔 모두 불같은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네. 어떤 사랑은 타오르다 사라질 것처럼 정열적이면서 허망하고, 어떤 사랑은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 나고, 어떤 사랑은 편하고 그저 덤덤하지.”
“제각각이네요.”
“다들 제각각의 사랑을 하고 제각각의 삶을 사는 것처럼 앞으로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겠나.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갈 테니.”
나엘라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예전에도 체드란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하일모라가 하는 사랑을 봐 왔기에 불같은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엘라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자 체드란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사랑을 잘 모르면 어떻고 조금 늦게 알면 어떠한가.
“그대는 늘 하던 것처럼 앞을 향해 나아가고, 나는 그저 그대를 따라 걷고─.”
어두운 밤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지 무수히 많은 별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였다. 이런 밤이야말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많은 이들에게 잠시 위로가 되는 그런 순간이 아닐까.
“가끔 그대가 뒤를 돌면 나는 언제나 그곳에 있겠네.”
이런 사랑도 있는 거라고 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자수정보다 더욱 빛나고, 별보다 더욱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하지만 체드란은 그 말은 시간이 더 흐른 뒤에, 나엘라가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면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답게, 그대의 할 일을 하게.”
“뭘 하라는 건가요?”
“에스토 시론, 말리러 가고 싶은 거 아닌가?”
나엘라의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다른 이들이 그것까지 얘기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잃을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뒷수습은 원래 내 담당 아닌가. 내게 맡기게.”
“그래도….”
“조금 돌아가는 것뿐이네. 황후는 꼬리를 자를 테고 타국과의 연결고리도 놓칠 가능성이 높지만, 원래 그대는 어려운 길을 택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또 방법을 찾아낼 걸세.”
나엘라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체드란의 표정이 너무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그대가 그대로서 존재하도록 노력하겠네.”
신념을 꺾지 않는, 옳은 길을 가는 나엘라. 체드란은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
아직 제 마음을 밝힐 순 없으나 뒤를 받치는 건 할 수 있다. 그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지하는 법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나엘라는 울 것처럼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자신은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