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체드란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그를 따르는 두 명의 기사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점심 전에 도착해 황제를 알현하려면 말이다.
아그노멘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을 때, 지엘라는 먼 곳을 바라보았고 하일모라는 얼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에게 먼저 계획을 알린 이유는 정신없이 터질 사건에 대비하란 의미에서였다.
지엘라의 요반나 복귀를 막고 세레노피 가문 또한 언제든 황후에게서 발을 뺄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충격적인 이야기여서 그랬을까, 어두운 표정이던 둘은 더 볼 것도 없다며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체드란은 그길로 황궁으로 내달렸다.
그가 황제를 알현할 동안 남은 이들은 아무 일도 없는 척 축제를 즐길 것이다. 페렌츠의 반란군들을 치는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은 은밀히 다뤄질 예정이었다.
“제가 먼저 가서 성문을 열겠습니다!”
뒤에 달리던 기사가 속도를 높였다. 바로 앞에 수도 성문으로 달려가 문을 지키는 호위병들에게 아그노멘가의 기사라 전했다. 수도를 지키는 이들도 믿을 수 없어 모두의 신원을 감추었다.
곧 성문이 열리고, 후드로 전신을 가린 체드란은 영주에게 빌려온 가문 패로 신원을 대신했다.
수도 입성 허락이 떨어지자 체드란은 다시 말을 달려 그대로 황궁으로 향했다.
*
사각사각─.
만년필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 퍼져 나가는 적막한 공간, 그 고요를 깨며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폐하.”
문밖에서 들려온 시종의 목소리에 황제 스테라인 테사가 벽안을 들어 올리자 옆에 있던 단제가 대신 나가 보았다.
일찍이 논의되지 않은 알현이다. 예정된 일이 아니니 순식간의 집무실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행위 중 하나가 일정이 틀어지는 것이다.
단제가 문을 열고 나가 시종과 이야기하는 사이 황제는 탁, 소리와 함께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커다란 체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문을 바라보자 곧이어 단제가 다시 들어왔다. 문을 닫고 빠르게 황제의 앞에서 선 그는 시종의 말을 전했다.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이 비밀리에 알현을 청했다 합니다. 긴급 사안이랍니다.”
황제의 눈썹이 찌푸려지자 호위 기사들이 허리를 바짝 세웠다. 기분이 안 좋은 만큼 자신을 방해한 이들에게 잔인하게 구는 이였다. 대공이 무슨 일로 방문했는지는 몰라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자식이라도 예외는 없으니.
“들라 하라.”
단제가 다시 문밖으로 나가 전하자 체드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급히 달려왔음을 알리듯 대공이 입어야 하는 황실 정복도 갖춰 입지 않은 채였다.
단제가 시종들을 물리고 기사들을 배치해 주변 경비까지 단단히 마치고서야 체드란은 황제의 앞에 다가갔다.
“내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목을 긁고 나오는 목소리가 짚지 않아도 체드란은 잘 알고 있었다. 황자에게 무슨 문제가 생겨도 제 일에 방해된다며 모두 방치했던 자니까.
집무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냉랭해지는 분위기를 느낀 호위 기사들이 일제히 체드란을 바라보았다.
지금 말 한마디라 잘못 내뱉는 순간 저들의 칼이 체드란에게로 향할 것이다.
황제가 불편한 심경을 내비치며 앉은 자세만 고수하자 체드란은 책상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슴 한쪽에 손을 올려 예를 올리고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페렌츠와 이어진 산맥에 수상한 병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수상한 병력?”
황제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체드란을 훑었다.
“전날 아그노멘 영주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근 몇 년간 관광객들의 군수 물품 소비가 급격히 많아졌다는 보고였습니다. 저는 좌시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아그노멘은 관광객들이 많으니 자주 오가는 이가 있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분명 그를 이용할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주변을 조사하였고 페렌츠에서 수상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단 하루 만에?”
체드란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 관리에 큰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그노멘 영주와 식사를 한 것은 어제저녁이다. 아직 점심도 되지 않은 시간이니 그새 수상한 병력을 확인했다는 의미였다. 타인의 눈엔 당연히 이상하게 보일 터다.
“부하들에게 조사를 명하고 다른 일을 하려 했으나 급히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이후부터는 체드란이 알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짜 맞추는지가 관건이었다. 나엘라라면 어떻게든 황제에게 납득시켰겠지. 이 와중에도 나엘라를 떠올리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탐문 결과, 페렌츠에서 수상한 이들이 자주 목격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심 가는 지역들을 조사하다 수상한 곳을 찾았는데….”
관광객이 워낙 많으니 목격자를 찾는다 한들 짧은 시간 내엔 가능할 리 없다. 그사이 결과로 입증하면 그만이다.
황제가 이런 말에 넘어가진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체드란의 부하가 무엇을 봤는지다.
“그곳에서 수상한 병력들과 더불어 파르로시 황녀를 보았습니다.”
황녀가 얽혔다면 황실이 나설 수밖에 없다.
다른 이도 아니고 대공의 부하가 확인한 것이었다. 그것을 어찌 의심할까.
체드란의 보고를 들은 황제는 한참 침묵을 고수했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지만, 체드란은 보지 못했다.
“그것참 유능한 부하로군.”
그 순간 체드란은 다시 한번 비정함을 느꼈다. 파르로시가 왜 그곳에 있는지 황제는 묻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가 사실인지도.
“원하는 것은?”
“병력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또한, 파르로시 황녀가 납치인지 자의로 있는 것인지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황실 근위대와 이번 출전의 지휘권을 주신다면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근위대는 불허하네. 불순한 무리가 있는데 근위대가 황궁을 비울 수 없지.”
체드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마주한 황제의 표정은 무언가를 탐색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틀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내뿜는 불쾌한 감정들과 압박감 속에서 체드란은 고요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수도방위군의 출전을 허락하지. 지휘권 또한 허락한다.”
생각보다 쉬운 승낙이었다. 거절당할 것도 염두에 두었던 체드란은 그런 황제의 속내가 가늠되지 않았다.
과연 황제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그의 의도가 들어 있었을까.
황제는 자세히 묻지도 않았다. 본인이 알고 있음을 체드란에게 시사하는 것일까.
결국, 황후도, 파르로시도, 체드란까지 모두 그에 놀아나고 있음을 말이다.
“그런데 너에게 새로운 조언자가 생겼나 보군.”
황제는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를 더 낮게 깔았다.
“이런 건 너의 스타일이 아닌데 말이지.”
그 말에 담겨 있는 의심과 감정이 얼마나 음습하고 솜털이 쭈뼛 서게 만드는지. 체드란의 눈에는 황제가 앉아 있는 자리만 유독 어두워 보였다.
그러나 체드란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다름없이 한결같이 무감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무지한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대화를 누가 부자지간의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서로를 단 한 번도 가족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두 사람은 서로의 목적을 향해 나아갔다.
“나가서 대기하라. 시종을 통해 임명장과 서한을 받아 가도록.”
일이 쉬워지도록 지휘권 임명장과 해당 내용을 담은 서한을 써 준다는 말이었다.
무엇을 위해 제안 하나 없이 허락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체드란은 예를 올리곤 고개를 숙였다.
“나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체드란이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어느새 소리 없이 열린 문으로 나가려는데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호세르디 경.”
체드란이 아닌 단제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대의 여동생이 사랑받는 아내가 된 모양이지.”
지독히 역겨운 버릇이었다.
황제는 늘 마지막에 지키고자 하는 대상을 입에 올리며 상대를 압박했다. 언제고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되새겨 주듯이.
남의 목을 움켜쥐고 흔들고자 하는 협박이니 이보다 더 역겨운 버릇이 있을까.
체드란은 흔들림 없이 천천히 집무실을 벗어났다.
“나엘라는 늘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나지막한 단제의 목소리를 끝으로 문이 닫혔다. 그들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자 걸음을 옮겼다. 대기 중인 시종을 찾아 황제의 명을 전해야 했다.
황제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나엘라는 단장을 마치고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하일모라와 지엘라가 그녀를 반겼다.
“어서 가자. 조금 있으면 축제 시작이야.”
“중앙 거리는 혼잡할 테니 마차를 세우고 걸어가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호위 기사들이 반기지 않을 것이다. 인파가 북적거리면 호위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테니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잠깐 얼굴만 비추고 한적한 곳에서 축제를 즐겨야겠습니다. 거리를 구경할 수 없다는 건 조금 아쉽네요.”
나엘라도 아쉬움을 표했다. 당장 많은 일을 앞둔 지금 안전에 가장 유의해야 할 때다.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축제 개최 공연 정도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이 열리는 무대 근처에 고급 살롱이 있다. 귀부인들만 입장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곳 테라스에서 구경하면 될 터.
“이럴 땐 친구가 대공비인 게 좋네. 가장 좋은 자리를 맡아 뒀다면서?”
빠지게 된 것에 미안함을 느꼈는지 체드란이 미리 사람을 보내 자리를 맡아 두었다고 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먼저 앉아 있던 사람의 자리를 빼앗는 셈이 되니 미리 움직인 것이다.
나엘라는 남의 자리를 빼앗으면서까지 공연을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잘 알기에 체드란은 발 빠르게 움직여 거절하지 말라고 전해 왔다. 그러니 나엘라로선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한산할 때 조금 일찍 나와서 살롱으로 가려 했는데 늦어 버렸네.”
나엘라가 할 이야기가 있다며 시간을 잡아먹은 결과였다.
“조금 늦으면 어때. 살롱 바로 앞에 내리면 거리는 더 구경하기 어렵잖아.”
하일모라가 연신 분위기를 띄우며 웃었다. 그 덕에 나엘라와 지엘라도 풀어진 분위기로 창문을 바라보며 꽃나무들을 구경했다.
아그노멘은 꽃나무뿐만 아니라 길가에 핀 꽃들도 다양해 사방이 꽃향기로 진동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꽃으로 만든 화관과 화려한 무늬의 옷을 입었다. 온갖 소품을 꽃으로 장식한 것도 모자라 거리도 온통 꽃들로 넘실거렸다.
“세상이 꼭 꽃에 파묻힌 것 같아.”
하일모라의 감탄을 듣던 나엘라는 어쩐지 체드란이 떠올랐다.
“다음에는 그대에게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꽃을 선물하지. 그 속에 파묻혀 있으면 본인도 꽃이었음을 느낄 수 있겠지.”
어째서 그때의 말이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지.
나엘라는 이유 모를 감정에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다음에는 체드란과 함께 이 꽃들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