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09)화 (109/220)

108화

중앙 광장과 분수대, 그리고 축제용으로 만들어 놓은 연극 무대까지, 사람들은 이미 북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연극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 살롱이었다.

살롱엔 귀부인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커다란 테라스가 있다. 그곳에는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그중에서도 제일 앞에 있는 테이블이 나엘라와 일행을 위한 자리였다.

그들의 자리는 시선을 끌 만큼 많은 기사가 대기 중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경계하고 있는 기사부터 테라스 벽에 대기한 기사까지.

과한 경비라며 수군대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주인공이 대공비라 하니 다들 넘어가는 눈치였다. 체드란이 과하게 나엘라를 아낀다던 소문이 도움되었다.

“이제 시작하나 봐요.”

무대 한쪽에 위치한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곧이어 공연을 준비한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고 대사가 시작되었다.

“오, 세상이 색색의 꽃으로 물들었는데 이 허망한 마음은 무엇인가.”

사전에 안내받기로 개최 공연은 아그노멘의 유명한 설화 중 하나라고 들었다.

아름다운 아그노멘에서 늘 사랑에 실패하던 남자가 평생의 반려를 찾게 된다는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관광지에는 항상 사랑 이야기가 뒤따르기 마련 아니겠나.

속이 시끄러운 사건을 앞둔 만큼 어딘지 시큰둥한 기분이던 나엘라는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귀를 파고든 남자 배우의 발성이 나쁘지 않았다.

남자 배우의 독백 후 여자 배우가 등장하더니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듯 대사가 이어졌다. 여자는 아그노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설레는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의 사랑의 첫 문장이 시작되리라.”

그녀가 꿈꾸는 사랑은 남자와는 너무도 다른 형태임을 대조시켰다.

“아, 불꽃과도 같은 사랑이 나를 삼키면 나는 온몸을 내던져 활활 타오르리라.”

극이 이어질수록 두 사람의 대조되는 가치관이 부딪치며 갈등을 빚었다. 그들은 맞이한 시련에서도 제각기 선택이 달랐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할퀸 채 헤어졌다.

“그 한 번의 키스가 내 삶을 지옥 속으로 끌고 갔구나.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순수였다. 나의 삶은 낭만이 아니라 사실로 가득했음을 잊어버리고 말았구나.”

그러나 그들은 아그노멘에서 다시 만났고 또 사랑을 시작했다.

“내 마음속에 사랑만 간직할 수 있다면 이제 내겐 삶의 외적인 것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요.”

“위대한 시인의 시어 속에도, 신을 향한 찬가 속에도 그대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다면 그 무엇이 두려우리.”

두 배우의 포옹으로 연극은 마무리되었다. 그 뒤를 이어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공연이 이어졌다.

나엘라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구경하고 있었다.

“대공비 전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시야를 한가득 채우는 커다란 꽃다발이 보였다. 주변 이들이 모두 그녀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심지어 하일모라와 지엘라조차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대공 전하께서 선물하신 꽃다발입니다.”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 들자 부럽다는 시선이 날아왔다. 얼마나 풍성한지 품에 안기도 벅찼다.

꾸벅 인사한 심부름꾼이 자리를 떠났으나 나엘라의 시선은 꽃다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화려한 꽃향기가 나엘라를 자꾸만 붙들었다.

“여기 카드가 있네요.”

지엘라가 카드를 찾아 말해 주기까지 나엘라는 그 존재조차 몰랐다. 꽃이 풍성해서 가려진 건지, 아니면 제 시선이 꽃에 사로잡힌 건지 알 수 없었다.

나엘라는 카드를 받고 싶었으나 양손을 모두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작게 웃은 지엘라가 대신 카드를 열어 내용을 전해 주었다.

“위대한 시인의 시어 속에도, 신을 향한 찬가 속에도 그대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다면 그 무엇이 두려우리.”

연극 속 남자 배우의 마지막 대사가 지엘라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주변에서 연신 탄성이 터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귀부인들은 박수까지 쳐 가며 감동받았음을 표현했다.

그 대사를 체드란이 어찌 알고 써서 보냈단 말인가.

나엘라가 믿지 못하는 티를 내자 지엘라는 친히 카드를 펼쳐 눈앞에 드밀었다.

카드 속에는 정말 마지막 대사가 적혀 있었다.

문득 체드란이 황궁으로 향하기 전에 나눈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직접 나설 수 없어 불안해하는 나엘라를 체드란은 연신 다독였었다.

자신을 믿어 달라고 말했던가, 체드란은 자신이 어지간히 듬직하지 않느냐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랬던 그가 자신에게 이런 말들을 남긴 것이다. 나엘라가 있음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나엘라는 꽃다발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꽃잎들이 입술과 볼을 간지럽히며 향기를 뿜었다. 그녀의 전신을 흠뻑 적실 정도의 향기라 조금씩 물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물들어 가는 것은 향기가 아니라 체드란이 아닐까.

얼굴에 열이 올라 잔뜩 붉어졌다는 것을 알기에 나엘라는 한참 동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축제를 구경하고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 온종일 말이 없던 나엘라가 입을 열었다.

“지엘라 부인.”

이들의 탄 마차에는 체드란이 보낸 꽃다발로 가득했다. 나엘라가 마치 꽃에 파묻힌 모양새라 지엘라는 뜬금없이 그림으로 남겨 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체드란에게 그런 면이 있는지 정말 몰랐습니다.”

하일모라와 지엘라에게서 오늘 몇 번이고 튀어나온 말이다. 나엘라의 얼굴이 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동안 왜 몰랐는지가 더 신기할 정도로 그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온종일 그에 대해 생각하고 마음을 정리하려 해도 쉽지가 않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비눗방울들이 통통 튀어 오르는 양 여러 생각이 들쑥날쑥 고개를 내밀었다.

애써 눌러 놓으면 또 어느새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겨우겨우 외면하면 아그노멘에 있는 꽃의 수만큼 활짝 폈다.

어쩌면 겨우 막아 내던 댐의 문을 열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그에 대한 생각이 범람했다.

“흠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체드란의 이름만 나오면 나엘라가 급격히 말을 잃었기에 지엘라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러다 나엘라가 도망이라도 갈 판이다.

“그럼 무슨 일 때문에 그러죠?”

“아침에 말했었죠. 부인은 요반나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페렌츠에 요반나의 사람이 와 있으리라 그들은 예상 중이다. 정황상 고위 귀족, 혹은 왕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요반나의 왕족이 포로가 된다면 두 국가의 사이는 순식간에 험악해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엘라가 요반나로 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죽을 길을 택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황실도 위험할 거예요. 제 보기엔 다를 바 없어요.”

지엘라는 연하게 웃었다. 그녀의 삶에서 위험하지 않았던 곳은 없었다. 당장 나고 자랐던 황실이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니 마호세르디령으로 가시는 건 어떠세요?”

“마호세르디령이요?”

지엘라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곳으로 가기 위한 명분은 저희 쪽에서 준비하겠습니다. 황실에서 몸을 피해야 하는 시점이 오면 제가 상황을 만들 거예요.”

요반나 왕족이 포로로 잡혔다 한들 지엘라가 당장 황궁에서 몸을 빼기는 어렵다.

다만 본격적으로 황궁이 위험에 휩싸이는 시점이 있으리라 나엘라는 판단했다. 그때가 되면 마호세르디령에 의탁하란 소리였다.

“하지만….”

지엘라는 입술을 달싹이며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어색할 만도 한데 나엘라는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그녀의 마음을, 그 이유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지엘라는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꾸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그 틈을 타 나엘라가 대신 꺼냈다.

“다나한 오라버니가 계시니 그곳으로 가세요. 그 시점이 되면 노헤스카에 누가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어요. 저와 체드란이 둘 다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나한은 어느 순간이든 마호세르디령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최후의 때가 된다면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을 테니 지엘라의 안전은 의미가 없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그 뒤의 거취는 지엘라 부인께서 정하시면 됩니다.”

지엘라는 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를 볼 기회였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여겼건만. 어쩌면 아주 잠시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후의 미래가 얼마나 힘들지 알면서도 당장 눈앞의 달콤한 과육에 눈이 먼다는 것이 이런 얘기일까.

지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다나한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사랑했던, 앞으로도 사랑할 한 남자가 그녀 앞에 성큼 다가온 것이다.

지엘라는 끝내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

저녁을 먹은 뒤 각자 옷을 갈아입은 이들은 어제 이야기를 나누었던 테라스에 다시 모였다.

이 테라스는 축제를 위해 작정하고 지은 모양인지 알고 보니 불꽃놀이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곧 해가 완전히 저물고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휘융─ 날아간 꼬리는 펑 소리와 함께 터지며 사방으로 산란했다. 하나 다음엔 또 하나, 천천히 올라가던 불꽃은 어느 순간 밤하늘을 환히 밝힐 정도로 한꺼번에 터졌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이들은 저마다 감상을 내뱉었다.

“수도의 불꽃놀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네요.”

“꽃잎들에 반사되는 불꽃들이 특이해요. 수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지 않아요?”

언제 마지막으로 불꽃놀이를 봤더라.

나엘라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 소소하게 즐기던 마호세르디의 축제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이 떠올랐다.

마호세르디는 농사 중심의 영지도, 관광지도 아니기에 보통 전쟁에서 승전보를 울리는 날, 축제를 열었다.

항상 전시체제인 국경이라 불꽃놀이도 소소하게 진행했다. 수도에 올라온 적도 없으니 수도의 불꽃놀이가 어떤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성대한 불꽃놀이는 처음 본다.

“무슨 생각해, 나엘라?”

머리 위 밤하늘을 가득 메울 듯한 불꽃놀이는 처음 봐서 그랬을까.

하일모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엘라는 체드란을 떠올렸다.

그도 어디선가 이 불꽃놀이를 보고 있을까.

그는 수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이런 불꽃놀이쯤은 흔하게 봤을까.

“다음에 또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의외로 감성적인 나엘라의 대답에 하일모라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대공 전하께 부탁드리자. 다음번엔 대공령에서 더 크고 화려한 불꽃놀이를 해 달라고!”

“이것보다 더?”

과연 그게 가능할까?

그전에 대공령에 축제가 있을까?

축제를 열고 불꽃놀이를 하려면 예산은 얼마나 빼야 하나?

나엘라의 표정을 본 하일모라가 혀를 차며 나무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하다, 뻔해.”

결국, 나엘라와 지엘라도 웃음을 터뜨렸다.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불꽃들 사이에서 모두가 활짝 웃었다.

나엘라는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란 걸 느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종착역임을 되새겼다. 행복은 결국 홀로 쟁취할 순 없는 법이니까.

언젠간 체드란에게도 이 장면을 선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