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에스토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이곳은 베르에티나 파르로시가 있는 건물과 다른 건물이었다. 그녀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건물임에도 에스토는 거침이 없었다.
계단을 마저 오른 그는 복도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 나타난 회의실에는 커다란 원형의 회의 테이블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요반나의 사람들은 없지만, 반란군을 통솔하는 자들과 이 일을 돕는 몇 명의 귀족이었다.
사람들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에스토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테이블 한쪽에 구겨져 버려진 쳐다보지도 않은 지도만 들어왔다.
“경비 인원을 훨씬 늘려야 합니다. 도주로가 한 곳밖에 없다는 건 큰 문제입니다. 더군다나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곳을 감시하고자 한다면 병력이 금방 드러날 겁니다.”
에스토가 처음 왔을 때부터 내내 강조하던 점이었다.
삼면이 산이라는 것은 깊숙하여 은신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지만 한 번 발각되면 정찰당하기 쉽다는 단점도 있다. 중앙이니 산에 숨어 지켜보기에 훤히 드러나는 위치가 아니던가.
그런 에스토의 주장을 이들은 내내 묵살해 왔다.
“그만하게나. 여기 있는 이들은 경력이 오래된 베테랑들일세. 그런 이들이 걱정하지 말라는데 그대는 왜 사서 일을 만드는지 모르겠군.”
한 귀족이 언짢은 기침을 내뱉으며 제 수염을 쓰다듬었다.
에스토는 분노를 감추려 호흡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에스토보다 많은 것이라곤 나이밖에 없었다. 전쟁이라곤 한 번 겪어 보지도 않은 이들이 마호세르디 검은 방패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에스토의 의견을 무시하고 있다.
“하다못해 다른 도주로라도 확보해야 합니다.”
“이미 도주로를 확보해 두었잖은가. 무엇하러?”
“효용성이 너무 없습니다. 만약 습격당한다면 누구라도 그 도주로부터 먼저 막고 들어올 겁니다.”
나엘라였다면, 에스토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바로 생각을 털어 냈다. 이런 가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허, 그대가 아무리 황후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들 너무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은근한 배척은 황후의 서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반란군의 도움이 되기 위해 에스토를 보낸다는 서신.
군에 대해 잘 모르는 황후기에 에스토가 힘을 쓰기 위해선 권한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황제에게 가로막혀 정무 회의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들었다. 특히나 군권은 한 번도 잡아 본 적 없다더니 반란군을 키우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맡기기만 한 모양이었다.
에스토에게 직급과 통제권의 일부라도 줘야 했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없는 서신이었다.
에스토의 의견을 잘 따라 달라는 말을 온갖 미사여구만 뭉쳐 보냈으니 다들 쉬이 본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믿을 수도 없고 경력만 좋은 젊은 놈이 갑자기 치고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황후의 의도가 어쨌든 견제는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최소한 요반나의 귀빈들과 파르로시 황녀님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에스토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은 그저 코웃음만 치며 에스토를 예민한 편집증 환자 취급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아침 일찍 황후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금 이곳의 문제점과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이유를 담아 보냈지만 어떤 답이 올지는 기다려 봐야 했다.
수도의 상황 또한 확인해 달라 일렀는데 군 관련 정보를 가리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자세히 정리한 것이 도착할지도 확신이 없었다.
곧 답이 올 때가 됐는데 왜 이리 늦는지 초조해졌다.
“더군다나 이 이상 군비를 소모해선 안 됩니다. 군사들의 식비가 넉넉지 않습니다.”
군비 사용료를 봤을 땐 정말 기겁할 뻔했다. 이전에 부단장으로 있을 적 예산도 관리했기에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모르고 신경 쓰지 못했으리라.
지금 반란군을 먹이고 군수 물품을 조달하는 군비가 평균보다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모두 요반나 귀빈들과 눈앞에 있는 귀족들 때문이었다. 그들을 위해 들어가는 식비나 사치금이 상상을 초월했다.
황후에게도 내용을 담아 보냈으나 현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늦지 않게 답신이 도착하길 바랄 뿐이다.
“자네 지금 우리에게 밖에 있는 이들처럼 음식 같지도 않은 것이나 먹으라는 건가?”
에스토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반란군들이 머무는 건물은 총 4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 두 곳을 그들이 차지했다. 하나는 요반나 사람들이, 하나는 황후의 귀족들이 말이다.
다수의 병사보다 소수의 귀족이 각각 한 건물씩 차지했으니 당연히 머물 곳이 모자랐다. 그 덕에 정작 전쟁을 치를 병사들이 모두 훈련용 연무장에서 천막을 치고 딱딱한 바닥 생활 중이었다.
그것으로도 자리가 부족해 바로 앞의 강가까지 천막을 치거나 간이로 이층 침대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 넓은 장소를 죄다 차지해 놓고는 건물이 더럽다며 매일 불평만 늘어놓고 있다.
“아니면 군비에 보탬이 되어 주심은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 갔다. 황후의 앞에선 간 쓸개 모두 빼 줄 것처럼 아양을 떨어 댔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이득을 위해 동맹을 맺은 사람들이다. 막상 자신들 주머니에서 돈이 빠져나갈 상황이 되니 다들 은근히 발을 뺐다.
이건 모두 전쟁에 관해 전혀 모르는 황후와 귀족들이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 지휘관이랍시고 반란군을 책임지고 있어 생긴 문제다.
마호세르디에 있을 땐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문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병사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마호세르디 사람들은 적어도 밑에 있는 이들을 밖으로 내몰고 자신들만 편한 침대에서 자는 이들이 아니었다.
훈련을 나가면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땅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전쟁을 나가면 가장 앞에 서서 칼을 휘둘렀으며 가장 많은 피를 뒤집어썼다.
제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으나 제 사람들의 죽음은 두려워했다.
물론 오랜 시간 군사경계 지역을 지키며 마호세르디가 쌓아 온 경험치와는 차이 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그 수준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밖에 있는 저들의 체력은 곧 여기 있는 이들의 목숨과 직결됩니다. 저들이 힘이 있어야 여기 있는 이들도 살 수 있단 소립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인 것을 왜 모르는가.
최악의 상황이 들이닥쳐도 저들이 오랜 시간 버텨 줘야 여기 있는 이들이 도주할 시간을 버는 거다. 제 목숨을 그렇게 중히 여기면서 왜 모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만.”
앉아 있던 귀족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에스토의 말을 막았다.
“젊은이의 혈기로 치부할 수 있는 것도 거기까지네.”
더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에스토는 깨달았다.
“돌아가게나.”
결국,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들어온 지 몇 분 만에 되돌아 나갔다.
이들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황후에게 더 큰 권한을 얻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답답해지는 속을 꾹 내리눌렀으나 해결되는 건 없었다.
뒤에서 혀 차는 소리와 오만방자하다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지만, 철저히 무시했다.
*
반란군 본거지와 3시간 정도 떨어진 지역. 그곳에 수도방위군의 임시 막사가 세워졌다.
혹시나 반란군이 정찰을 나와 이곳을 발견하는 일이 없도록 끊임없이 경계를 세웠다. 그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보고받았다.
산 하나만 넘으면 바로 반란군 본거지였다. 산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지휘관의 임시 막사가 세워졌다.
어차피 이곳에서 묵을 것도 아니기에 최소한의 막사만 세운 채 군사들과 대기하고 있었다.
막사 안에서 지도를 보고 있던 체드란에게 수도방위군의 연대장이 말을 걸어왔다.
“현재 보병들을 지휘하는 백인장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방위군의 기사단장들은?”
“두 기사단이 합류했고 보병들은 600명 정도입니다.”
시간이 촉박한지라 연대 하나를 끌어오지는 못했다.
현재까지 두 기사단이 합류했다. 기사단 하나에 2, 3백 명 정도라고 가정할 때 총 4백 명에서 6백 명 정도가 모인 것이다. 보병 6백 명. 반란군에는 턱도 없는 수였다.
“현재 반란군은 2천 명 정도로 예상 중이다.”
체드란의 말에 연대장은 나머지 병력을 읊었다.
“기마병 2백 명과 궁병 백 명, 보병 2백 명 정도가 한 시간 내로 추가 합류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부족하다.”
체드란은 초조한 마음으로 다롱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은 결국 금력과 정보의 싸움이다. 황궁에 다녀올 동안 그에게 병력의 상세 규모와 파르로시가 거취 구역, 요반나 사람들의 거취 구역을 확인해 두라고 명했었다. 그러니 보고서가 도착해야 자세한 작전도 세울 수 있다.
기사에게 병사들의 수를 정확히 체크해 오라 명했을 때였다. 기다림이 무색하게 천막 안으로 다롱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길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황후의 심부름꾼을 잡았습니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천막 안에 있던 이들이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다롱은 아직 조사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들에게 공개할 수 없는 정보라는 의미여서 체드란은 말을 돌렸다.
“조사한 것들을 듣고 싶은데.”
다롱은 모여 있는 이들에게 그간 조사했던 것들을 보고했다.
“처음 보고 때는 반란군의 규모가 2천 명 정도 될 것이라 보고 드렸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확인한 결과 병력은 2천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천 명이 조금 넘을 것 같습니다. 많아 봤자 천삼백 명입니다.”
처음 보고와 너무 다른 규모에 체드란이 의아함을 표하자 다롱이 이를 설명했다.
“처음 확인했을 때 3백 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 4개 정도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자리가 부족한지 연무장에 천막을 치고 자는 병사들도 가득했고요. 그래서 최대 2천 명 정도라 추정했었습니다.”
그러나 건물 두 개는 귀빈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는 요반나 사람들이, 하나는 황후의 세력에 속한 귀족들이 말이다.
“더불어 파르로시 황녀님이 그곳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다롱 경이 책상 위에 놓인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반란군의 본거지. 산과 마주 보고 있는 4개의 건물, 건물이 감싸고 있는 모양새의 연무장, 남쪽으로 있는 강물, 강물과 이어진 유일한 도주로까지.
“이 건물 중 가장 오른쪽 건물에 요반나 사람들과 파르로시 황녀님이 계십니다. 베르에티 루부스 후작 영애 또한 함께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리고 그 왼쪽 건물에 귀족들이 있습니다. 나머지 두 개엔 반란군들이 있고요.”
생각보다 반란군의 상황이 엉망이었다.
가만히 지도를 바라보던 체드란은 머릿속으로 전선을 그렸다. 동원할 수 있는 군사들의 수와 최적의 경로를 여러 갈래로 떠올려 본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조를 나눈다.”
천막 안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체드란은 그런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들 중에는 황후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반란군의 본거지로 넘어갈 만한 길을 체드란의 기사들이 모두 막고 있었다. 이 작전을 논의해도 그것을 전해 줄 시간이 없다는 얘기였다.
“가장 중요한 요반나 사람들을 생포할 1조는 내가 지휘한다.”
황후에 대한 증거를 얻어 낼 상대로는 그들이 가장 적당하다. 더군다나 요반나와의 관계에도 제국이 선취점을 가져갈 기회였다.
“파르로시 황녀와 베르에티 영애를 구출할 2조는 다롱 경과 대공가의 기사들이 맡는다.”
모두가 파르로시 황녀의 신변을 확보하려는 의도라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이들보다 베르에티 영애가 우선이었다. 그녀는 나엘라에게 중요한 사람이니 수도방위군에게 맡길 수 없었다.
파르로시의 차후 거취 문제는 당사자가 직접 정하도록 할 것이다.
“반란군을 진압하고 소탕할 3조와 도주로를 차단할 4조, 산에서 지원할 궁병조와 그들을 보조할 5조까지─.”
체드란은 차례대로 인원을 정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두 시간 안에 출전을 해야 했으니 시간이 촉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