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가장 큰 문제는 반란군들이 연무장에 천막을 치고 모여 있다는 것이다.”
기습하기 위해선 모두가 잠든 밤이 좋았다. 그런데 반란군들이 야외에 나와 있으니 잠입이 쉽지 않았다.
“궁병조는 산에서 대기해 산 쪽으로 도주하는 반란군들을 처리하고, 그걸 보조할 5조는 산과 맞닿아 있는 이 건물을 함께 소탕한다.”
체드란이 가리킨 곳은 제국 귀족들이 머물고 있다는 건물이었다. 지키는 인원이 거의 없다고 했으니 5조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귀족들을 생포하시겠습니까?”
“아니. 전원 사살한다.”
사람들은 꽤 놀란 기색이었다.
상대가 어떤 귀족들인지도 모르는데 전원 사살이라니, 반란이 최대 중죄이긴 하지만 적어도 수도까지는 끌고 가 황제에게 넘길 줄 알았다.
“만약 황후에 대한 정보를 넘길 경우엔 살려 둬라.”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황제는 자신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그러니 반란군들을 살릴지 말지는 자신의 권한이었다.
“그리고 파르로시 황녀와 베르에티 영애를 구출할 2조는 나와 함께 움직였다가 중간에 갈라진다.”
요반나 사람들과 파르로시가 한 건물에 있으니 각자 임무를 수행하기 전까진 함께 진입하는 게 좋았다.
“반란군을 소탕할 3조를 다시 4개로 나눠 각각 진입 경로를 다르게 한다.”
마지막으로 체드란이 도주로의 병력까지 정하자 회의가 일단락되었다.
“추가 인원의 합류는?”
“날아온 전서구로는 30분 이내랍니다.”
“잠깐 쉴 시간은 줘야겠지. 한 시간 후에 출전한다.”
그 말을 끝으로 체드란은 막사를 빠져나왔다.
대공령 기사들은 지금 반란군 본거지로 향하는 길목을 모두 막으려 뿔뿔이 흩어져 있기에 이들을 모아 2조에 넣으려면 정확한 시간 전달이 필요했다.
신호를 내리면 정해진 위치에 모일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라 이르자 하나둘 제자리로 떠났다.
기사들이 빠지자 다롱이 체드란에게로 다가왔다.
“대공 전하.”
주변을 둘러본 체드란은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후의 심부름꾼은 확인해 보았나?”
“예. 이런 서신이 있었습니다.”
다롱이 품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체드란에게 넘겼다. 그가 대충 봉투를 찢어 안에 든 내용을 훑었다. 잠깐 확인한 것만으로도 다롱이 많은 이들 앞에서 말할 수 없던 이유를 깨달았다.
서신은 에스토에게 보내는 황후의 편지였다. 지금 반란군 본거지에 에스토가 있는 의미다.
내용을 모두 확인한 체드란은 다시 서신을 접어 다롱 경에게 건넸다.
이 서신은 중요한 시점에 공표될 증거다. 다만 준비가 덜된 상황에서 공개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에스토의 존재다. 그가 있는 한 나엘라는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티를 내진 않더라도 혼자 아파할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에스토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밝혀지지만 않는다면 그 하나는 빼낼 수 있으리라.
“다롱 경, 그대가 보기엔 에스토 시론 경은 어떤가? 적이니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다롱 또한 에스토가 나엘라의 오랜 친우임을 안다. 그녀가 손바닥이 다 찢어지도록 연무장에서 검을 휘둘렀던 날, 체드란에게 알린 이가 다롱이었다.
“적이라면 당연히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공비 전하의 친우였다면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
“그냥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대공비께서 오래 인연을 쌓아 오신 분이라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란 느낌 말입니다.”
체드란은 피식 웃었다. 자신과는 다른 의견이지만 결론은 같았다.
“대공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도 처단하진 않을 것이네. 왜냐면 나엘라가 아직 에스토 시론 경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지 못했거든.”
직접 듣진 못했지만 알 것 같았다.
나엘라는 에스토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도 그녀를 따라 선택을 보류하기로 했다.
체드란의 말을 듣던 다롱은 궁금해진 것을 물었다.
“만약 대공비께서 시론 경을 다시 회유하겠다고 결정하시면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뭘 어떡하긴. 열심히 응원해야겠지.”
“시론 경이 돌아올까요?”
“상대는 나엘라가 아닌가.”
“하긴, 저도 대공비께서 돌아오라 말씀하시면 돌아올 것 같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습니다.”
본인이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다롱 경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정확한 정보와 전술 전략을 바탕으로 움직여야 하는 기사단의 부단장이 이유도 없는 믿음을 보였으니 스스로도 웃긴 것이리라.
“주군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은 당연하지.”
“제 주군이 대공비 전하셨습니까?”
체드란은 잠시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나엘라에게 세뇌당한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서신의 내용을 보면 반란군의 규모는 천삼백 명 내외가 맞는 듯하군.”
서신에는 반란군의 인원과 그 인원에 대한 군비가 여러 갈래로 적혀 있었다. 군비를 조달할 테니 얼마 정도가 필요한지 확인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다행입니다. 기습이 성공한다면 수월하게 소탕이 가능할 겁니다.”
체드란이 급히 말을 돌리려 함을 알았지만, 다롱은 침착하게 맞장구를 쳤다. 체드란이나 나엘라나 둘 다 다롱의 주군임은 마찬가지인데 따져 뭐하겠는가.
다롱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
나엘라는 침실을 한가득 채운 꽃다발을 보았다. 화병에 꽂아 두겠다며 하녀들이 포장지를 벗기자 그 양이 더 많아 보였다.
소파 앞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도 부족해 산처럼 쌓은 꽃들을 다듬는 것은 꽤 손이 가는 일이었다.
“화병을 넉넉히 준비했는데 아무래도 더 가져와야겠어요. 열 병은 돼야겠네요.”
이곳이 아그노멘 별장이라 다행이었다. 수도나 대공령이었다면 꽃병을 새로 구매해야 했을 것이다.
나엘라는 하녀들이 이파리를 떼어 내고 끝을 사선으로 자르며 다듬는 것을 구경했다.
“꽃들은 어떻게 분류할까요?”
꽃다발 속에는 분홍색의 라넌큘러스, 안개초, 라일락, 가는 잎 조팝나무가 얽혀 있었다. 분홍색, 흰색, 보라색의 꽃만 봐도 서로 어우러지는 색 조합에 신경을 쓴 게 느껴졌다.
“색별로 분류한 거 하나씩, 나머지는 섞어서 놓아 줘.”
그녀의 말에 하녀들은 모여 앉아 바쁘게 움직였다. 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엘라는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체드란은 배우의 마지막 대사를 어떻게 알았을까?”
“글쎄요. 매년 같은 연극이 열린다고 하니 어디서 들으셨을 수도 있죠?”
체드란이 미리 알아보려고 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나엘라는 그것조차 신기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체드란이 이런 것을 미리 조사해 카드로 전할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란 의미가 아닌가.
아니지, 이럴 때는 다정함이 아니라 로맨맨틱하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꽃 선물을 할 생각을 했나 몰라.”
꽃을 선물하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빠를 줄 몰랐다.
그날 밤의 이야기가 진심이었음을 전하고 싶었을까. 이렇게 한가득 보낸 것도 꽃에 파묻히도록 해 주겠다던 말을 지킨 것이다.
그의 말들이 현실이 된 것이 못내 간질거렸다.
“라넌큘러스의 꽃말은 뭐야?”
꽃들의 이름도 제니가 알려 줘서 알았다.
나엘라는 꽃을 좋아하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와 달리 제니는 꽃 종류를 알아보고 꽃말을 알아보는 것 또한 좋아했다.
“분홍색 라넌큘러스는 꾸밈 없는 아름다움이에요.”
“라일락은?”
“보라색 라일락은 첫사랑이에요.”
나엘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설마 내가 첫사랑이라는 거야?”
“혹시 모르죠. 대공 전하는 그 누구와도 소문이 없으셨잖아요. 황실에서 나온 후론 내내 전쟁터에 계셨고.”
왜 이렇게 웃음이 멈추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체드란과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흰색 안개초는?”
“깨끗한 마음, 사랑의 성공이요.”
깨끗한 마음은 뭐고 사랑의 성공은 뭐란 말인가. 이렇게 체드란과 안 어울릴 수 없었다. 자꾸만 입가에서 웃음이 새었다.
“이 작은 꽃은 뭐라 했지?”
나엘라가 가리킨 것은 흰색의 작은 꽃들이 알알이 박혀 있는 가지였다.
“가는 잎 조팝나무요.”
“이름 한 번 이상하네. 꽃인데 나무고 말이야.”
꽃은 예뻤지만 이름이 영 아니었다.
“이건 꽃말이 뭐야?”
“애교, 은밀한 사랑이요.”
이번에야말로 나엘라는 자지러지듯 웃었다. 소파를 주먹으로 팡팡 쳐 가며 웃자 다른 이들도 웃기 시작했다.
안 웃을 수가 있어야지. 세상에, 애교라니!
체드란과 안 어울리는 꽃말로는 이 꽃이 최고였다.
“아, 미치겠다. 설마 하나하나 고른 건 아니겠지?”
나엘라는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꽃을 바라보았다. 색별로 꽃말이 다르다는 것도 신기한데 체드란은 그중에서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꽃들만 골라왔다.
누군가의 추천일지도 모르나, 그것조차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꽃을 보든 체드란이 생각날 것 같았다.
저 꽃은 또 웃긴 꽃말을 갖고 있지 않을까, 체드란이 또 선물해 주지 않을까.
어쩌면 체드란이야말로 꽃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웃음을 겨우 진정시킨 나엘라는 다리를 접어 무릎에 턱을 괸 채 발가락을 까딱거렸다.
“체드란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황제는 잘 알현하고 왔을까, 황실 근위대를 지원받을 수 있을까, 지휘권은 잘 받았나, 그런 생각들이 다시 머릿속을 뒤챘다.
“설마 이거 잊으신 건 아니죠?”
제니가 한쪽에 빼 두었던 카드를 나엘라에게 팔랑거렸다.
위대한 시인의 시어 속에도, 신을 향한 찬가 속에도 그대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다면 그 무엇이 두려우리.
계속 되뇌어도 질리지 않았다. 입에 머금을 때마다 신기하고 낯설고,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체드란은 처음부터 무서운 게 없어 보였는데.”
그런 남자가 두려움이 침범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카드를 보냈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과연 체드란도 무서운 게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았다.
기껏해야 유리잔? 그렇다기엔 무서워한다는 느낌보단 기피하고 싫어한다는 것에 가까웠다. 무엇이 두려운지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노크하기에 지안이 얼른 움직여 방문을 열자 틈새로 하녀가 종이를 내밀었다.
“대공비 전하께 온 서신입니다.”
체드란의 서신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엘라가 지안에게 다가갔다. 서신을 받아 들고 읽는 동안 지안이 문을 닫았다.
“대공 전하세요?”
하녀들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모두 나엘라에게로 향했다. 체드란이 달곰한 말들로 오늘 끝장을 보려 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피었다.
하지만 서신을 본 나엘라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의문이 섞인 오묘한 얼굴이었다.
“무슨 내용이에요?”
서신을 다 읽고 지안에게 넘긴 나엘라는 여전히 영문 모를 표정이었다.
“톨레로 상단에서 온 서신인데?”
“톨레로 상단이요? 갑자기 왜요?”
“모르겠네. 상단의 향후 방향을 알려 달래.”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다른 이들도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톨레로 상단이 이런 서신을 보낸 이유는 체드란 때문이었다. 그가 나엘라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겠다 선언한 탓이지만 그것을 모르는 이들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편지를 보낸 코더 우부라는 죄가 없었다.
그저 죄가 있다면 상단의 가야 할 길을 정해 주지 않은 체드란의 죄겠지.
또는 자신의 상단 앞에서 나엘라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한 체드란의 죄거나.
결국 오늘 하루의 끝도 체드란으로 장식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나엘라는 그저 어깨만 으쓱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