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12)화 (112/220)

111화

낮에 연신 울어 대던 새들도 잠이 들었는지 지저귀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진 밤, 자욱이 깔린 어둠 속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두에서 속도를 높여 움직이는 이들은 숲속을 헤치며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겼다.

바로 전방에는 파르로시 황녀와 요반나 고위 인물이 거주하고 있는 별관이 있었다.

“대공 전하.”

기사 하나가 다가와 그의 귀에 속삭였다.

“현재 산어귀 곳곳에 궁병들과 5조가 대기 중입니다.”

“3조는?”

강을 따라 올라오며 바로 연무장을 기습할 3조는 반란군 소탕의 중심축이 돼야 했다.

“강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서 각각 대기 중입니다.”

확인된 바에 의하면 파르로시와 요반나 사람 하나는 3층, 베르에티와 다른 요반나 사람들은 2층에 거주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요반나 사람들을 생포할 1조와 파르로시, 베르에티를 구출할 2조는 체드란의 뒤를 따랐다. 이들이 임무를 마치고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 다른 군병들이 급습할 예정이었다.

“진입한다.”

체드란이 선두에서 움직이자 그 뒤를 1조와 2조가 따랐다. 가장 허술하고 사람 수가 적은 길을 확인해 둔 터라 그들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이때만큼은 반란군들을 한곳에 몰아놓은 적들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숲과 바로 맞닿아 있는 별관 뒤쪽을 향해 달린 그들은 점점 뒷문과 가까워지자 발소리를 줄였다.

자세를 낮추고 신호가 오가자 일사불란하게 기사 열 명이 앞으로 나왔다.

“소란스러워지면 안 된다. 단번에 제압하도록.”

“알겠습니다.”

앞으로 나온 기사들은 중무장한 사람들과 달리 가벼운 경갑만을 착용하고 있었다.

다롱이 팔을 휘두르자 일제히 가지고 온 밧줄을 2층 테라스 난간에 걸더니 줄을 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발 구름 없이 팔 힘만으로 줄을 탄 이들은 곧 난간을 붙잡고 안으로 넘어 들어갔다.

테라스에 도착한 그들은 재빠르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재주가 좋고 몸이 재빠른 이들만 모아 놓은 덕에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안에 들어갔던 이들 중 제일 빨리 나온 기사가 팔로 크게 원을 그렸다.

“안에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체드란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 하나가 의미를 대신 소곤거렸다. 조금 더 기다리니 각기 잠입한 다른 이들도 테라스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안에서 나온 기사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수신호를 보냈다. 요인 확인 수신호였다. 활짝 열린 테라스 문 안으로 깜짝 놀란 듯한 베르에티가 나타났다. 소리를 지르려 했는지 그녀의 입은 기사의 손에 막혀 있었다.

베르에티는 잔뜩 커진 두 눈동자에 물기를 매단 채 잘게 떨고 있었다. 체드란은 그녀가 안쓰러웠으나 조용히 처리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페렌츠 소속 하녀 두 명입니다.”

“요반나의 백작이랍니다.”

열 명의 인원이 한 사람씩 나타나 미리 짜 맞춘 신호를 보내자 기사가 어떤 인물이 있는 방인지 대신 읊어 주었다. 모두 별다른 소란 없이 안에 있던 이들을 제압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체드란은 손가락을 한 번 까닥이고는 몸을 돌렸다.

성공을 확인했으니 미리 약속된 장소로 알아서 움직일 것이다.

방 안으로 사라진 그들 뒤로 체드란도 진입 준비를 시작했다. 사용인들이 오가는 뒷문으로 다가가자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기사 하나가 손잡이를 살짝 돌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겨져 있지 않다는 표현 후 손짓하자 문이 살짝 열었다. 한 명씩 소리 없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들어간 체드란은 곧바로 계단을 찾았다. 군데군데 켜 놓은 양초들을 제외하고는 어두컴컴한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양초를 갈러 나오는 하녀들이 있을 법도 한데 한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체드란은 허리를 펴고 빠르게 움직였다. 1층 로비로 보이는 커다란 공간 한가운데에 2층으로 이어지는 층계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3층으로 가는 계단은 보이지 않아 다시 움직여야 했다.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계단이 있을 겁니다.”

낮게 소곤거리는 다롱의 목소리에 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로시를 발견하면 그 즉시 이곳을 빠져나가라.”

파르로시에 대한 구출 임무는 다롱에게 맡겨 놨다.

어쨌든 그녀는 황녀이니 무작정 압송할 수 없다. 당연히 요반나 사람들이나 베르에티와도 함께 둘 수 없었다.

시녀로 동행한 베르에티야 괜찮을 수도 있으나 언제고 대비하는 것이 좋다. 파르로시의 상태가 안 좋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쪽에 계단이 있습니다.”

건물 양쪽에 사용인 전용 계단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들이 진입한 곳 반대편에만 존재했다. 아무래도 이 건물 자체가 귀족들이 사용할 용도로 지어진 건물은 아닌 듯했다.

재빠르게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2층에는 먼저 들어온 기사들이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입에 재갈을 물고 손과 몸이 묶인 요반나 사람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들을 데리고 테라스로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롱이 살짝 휘파람을 불어 계단의 존재를 알렸다. 먼저 잠입한 기사들은 전부 체드란의 사람들이어서 신호가 엇갈릴 걱정은 없었다.

계단에 기사들을 대기시키고 나머지 인원은 다시 3층으로 향했다. 계단의 반 층을 돌고 나머지 반 층을 오를 때쯤이었다. 복도가 울릴 만큼의 커다란 말소리가 들렸다.

체드란이 손을 올려 올라오던 이들에게 멈추란 신호를 보냈다. 그러곤 모퉁이 벽에 기대 소리가 들리는 곳을 확인했다.

“별일 아닙니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 이 오밤중에 사람을 깨워 놓고 그게 단가? 황후가 그대를 아낀다고 하더니 남첩이었나? 왜 이렇게 분수를 모르는지.”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억양을 들었을 땐 요반나 측 사람과 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말싸움하고 있었다.

“황후 마마의 심부름꾼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확인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경비를 설 생각이면 건물이나 돌아볼 것이지 왜 3층까지 오냔 말이네!”

“건물을 돌아보는 중이니까요. 건물엔 1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체드란은 대화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에스토일 것이라 확신했다. 황후의 심부름꾼을 기다리는 데다 이 정도로 경계를 설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체드란은 목소리를 낮춰 옆에 있던 기사에게 전했다.

“2층의 기사들에게 지금 당장 빠져나가라 전해라.”

체드란과 이들은 어떻게든 에스토와 마주칠 것이다. 3층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이곳밖에 없으니 말이다.

잠입할 적엔 위험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호재였다. 소란이 일어나도 이 계단을 막고 있으면 3층에 있는 이들이 빠져나갈 길은 없었으니까.

“기사들이 빠져나가면 바로 신호를 보내라.”

그들이 신호를 보내면 대기하던 군사들이 일제히 이곳을 덮칠 것이다. 원래 계획은 주요 인물들이 모두 빠져나간 이후 실행할 예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이는 마호세르디의 검은 방패 부단장이었으니까.

“그대 때문에 내 잠이 모두 깨 버렸네! 어떻게 책임질 텐가!”

요반나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체드란은 인상을 찡그렸다. 큰 소란이 일면 확인하러 오는 자가 생길 터였다.

“체드란 님.”

다롱의 부름에 층계 사이를 확인하니 2층에 있던 기사들이 1층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기사들이 들어왔던 뒷문까지 빠져나가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요반나 사람은 목소리를 키웠다.

“왜 말이 없나! 황후가 날 잘 대접하라고 하지 않던가!”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하다면 다인가!”

점점 목소리가 커지기에 체드란은 행동을 개시했다. 대기하던 계단 끝에서 빠져나와 조심스럽게 그들을 향해 접근했다.

요반나 사람들을 위해서인지 낡은 건물과 어울리지 않은 카펫이 잔뜩 깔려 있어 다행히 발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피잉─! 펑─!!

빨간색의 신호탄이 하늘을 가르고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았다. 복도 한 면을 가득 메운 창밖으로 그 모습이 선명히 보였고 에스토는 바로 고개를 돌려 밖을 확인했다.

“무슨…!”

체드란은 그때를 노려 칼을 빼 들었다. 급히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퇴로가 막혔으니까.

체드란을 따라 뒤에 서 있던 기사들도 모두 검을 꺼냈다.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금속음에 에스토의 고개가 체드란에게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산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병들이 일제히 횃불을 켰다. 화살에 불을 붙이고 시위를 당기자 사방이 환하게 물들었다.

“만나는 것은 처음인가?”

흐릿한 형태만 보이던 시야가 창밖의 불로 밝아져 환해졌다.

체드란은 잔뜩 굳어 있는 에스토를 향해 물었다. 에스토의 눈동자가 흔들린 것도 잠시, 곧 칼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결혼식 때 다나한 단장님 대신 제가 참석했습니다.”

에스토가 자신의 부하였다면 그 침착한 태도를 높이 샀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체드란의 칭찬을 반길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렇게 보게 되어 유감이로군.”

체드란이 한 걸음 내딛음과 동시에 궁병들이 쏜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반란군들의 건물과 연무장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낮고 옆으로 긴 형태의 건물이 둘러싼 구조라 연무장까지 닿는 화살들이 꽤 많았다.

그곳에 천막을 치고 잠들어 있던 반란군들에게 불화살이 쏟아졌다. 하나의 천막에 붙은 불은 곧 주변을 향해 빠르게 번져 갔다.

산을 타고 내려와 강으로 향하는 바람은 그 속도가 빠르고 거셌다.

순간 요란한 함성과 함께 군사들이 반란군을 덮치기 시작했다.

“나엘라는 오지 않았나 봅니다.”

“그것도 유감이군. 그런데 둘이 아직 친구인가? 대공비를 그리 편히 부를 줄은 몰랐군.”

남들보다 조금 더 무겁고 큰 검을 한 번 휘두른 체드란은 천천히 에스토를 향해 다가갔다. 꽥꽥 소리를 지르던 요반나 사람은 금세 에스토의 뒤로 몸을 숨겼다.

“당, 당장 어떻게 해 보게!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에스토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체드란에게서 눈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검 끝이 빛에 반짝였다. 그 예리함을 서로에게 겨눈 채 두 사람은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그때 에스토가 자세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체드란에게는 나름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엘라와 비슷하군.”

체드란과 대련을 할 때마다 나엘라가 취했던 자세였다. 나엘라는 유독 체드란 앞에서만 자세를 낮췄다.

“그렇군. 자신보다 체격이 큰 사람을 상대할 때 쓰는 자세인가?”

자세를 낮춰 품을 파고들거나 첫 검격을 피하고 뒤를 노릴 때 쓰는 자세인 것 같았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검술조차 비슷한 둘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럼 이것도 알아 두게.”

에스토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체드란이 걸음을 멈추고 검을 다잡았다. 창밖의 붉은빛에 비친 체드란은 오늘따라 더 거대해 보였다.

“나엘라는 나에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걸.”

체드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스토가 땅을 박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