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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13)화 (113/220)

112화

땅을 박찬 에스토가 품으로 파고들었지만, 체드란은 살짝 몸을 비틀며 검을 세워 막았다.

챙─!!

검과 검이 맞붙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힘에 밀린 에스토가 그의 검을 흘리려 몸을 틀었다. 한 번의 합에도 힘 차이가 느껴지니 정면으로 맞붙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체드란은 에스토가 몸을 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맞붙은 검을 그대로 밀어 버리자 중심을 잃은 에스토가 뒤로 밀려났다.

에스토가 자세를 잡기도 전에 체드란은 그대로 다시 검을 휘둘렀다.

“크윽.”

다시 한번 검이 부딪히자 에스토가 또다시 뒤로 밀려났다. 뒤에 있던 요반나 사람은 두 사람이 점점 자신과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장 처리하지 않고 뭐 하는 건가! 그대는 마호세르디의 기사라고 하지 않았나!”

상대가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임을 모르는지 요반나 사람은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에 급급했다.

뒤로 밀렸음에도 금방 자세를 잡은 에스토가 다시 체드란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속도를 높여 검이 막힐 때마다 다른 곳을 노렸다. 달려드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금속음 뒤로 빠르게 움직이는 군화 소리가 울렸다. 체드란이 에스토를 막는 동안 노헤스카의 기사들이 빠르게 3층을 수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요히 움직이던 방금 전과는 그 속도가 달랐다.

“의미가 없다는 걸 모르나.”

에스토의 속도를 여유롭게 따라잡은 체드란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힘이야 나엘라보다 확실히 더 좋았지만, 기술은 그녀보다 못했다. 나엘라를 상대할 때도 적당히 맞춰 주던 그였으니 에스토도 어렵지 않았다.

“젠장.”

욕 한 번 안 해 봤을 것 같은 에스토의 입에서 저속한 단어가 나오자 체드란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에스토의 실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체드란이기에 에스토의 경험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체격 차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체드란은 아주 어릴 적부터 목숨의 위협에 시달려 왔다. 에스토가 검은 방패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고 한들 체드란의 시간을 이길 순 없었다.

챙─!

다시 한번 검이 맞붙고 에스토가 자세를 한껏 낮춰 파고들었다. 다리로 찔러 들어오는 검을 본 체드란은 제 검을 아래로 세워 그대로 찍어 눌렀다. 동시에 다리를 들어 에스토의 복부를 가격했다.

제대로 차여 통증이 상당할 텐데도 에스토는 몸을 돌려 빼며 검을 회수했다.

“나엘라가….”

숨을 가라앉히려 하는 것인지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엘라가 왜 어려워하는지 알 것 같군요.”

“내 검은 일반적인 검술이 아니니까.”

체드란의 검은 변칙적이다. 때론 암살자처럼, 때론 용병처럼 그 궤를 달리했다. 죽음 앞에서 배운 검들이 그러했고 죽이기 위해 쌓아 온 경험이 그러했다.

거기에 남들보다 큰 체격에서 나오는 힘까지 있으니 단연 까다로운 상대였다.

“요반나 사람과 파르로시를 넘기게.”

그 말에 에스토의 눈에 감정이 불타올랐다. 체드란의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든 것 같았다.

“저를 봐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대화를 듣던 요반나 사람은 기겁하여 소리쳤다.

“나, 나를 구해 준다면 요반나에서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돈을 주겠네! 원, 원하는 작위도 말하게!”

“이런….”

체드란은 설핏 웃음을 지었다. 작위까지 논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왕족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포로의 가치가 한층 높아진 것에 유감을 표하며 체드란은 검을 고쳐 쥐었다.

오래 끌 시간이 없었다. 밖은 벌써 전투로 엉망이었다.

불화살을 쏘아 대던 궁병들과 5조도 제국 귀족들을 처리하러 움직인 모양인지 본관이 환해짐과 동시에 고함이 들려왔다.

정병의 수준과 공방할 준비의 양이 차이 나니 금세 마무리될 것이다. 군사들이 밖을 모두 정리하기 전에 에스토를 내보내야 했다. 보는 이가 많아져서는 곤란했다.

“마지막으로 묻지. 그냥 도망갈 생각은 없는가.”

체드란을 따라 에스토도 검을 고쳐 쥐었다.

“제가 어디 출신인지 잊으셨나 봅니다.”

“마호세르디를 등졌기에 더는 마호세르디가 아닌 줄 알았네.”

그 말이 역린이었을까, 삽시간에 표정을 굳힌 에스토가 말없이 체드란에게 달려들었다.

챙, 채쟁, 챙─!

검이 빠르게 오가는 와중 체드란은 조금씩 힘을 싣기 시작했다. 부딪칠 때마다 체드란의 검은 더 빨라졌고 더 거세졌다.

튕겨 나오는 속도에 밀려 에스토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에스토가 크게 밀린 틈을 놓치지 않고 체드란은 자세를 낮춘 채 발을 박차며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에스토가 급히 막았으나 체드란의 힘에 못 이긴 검이 벽에 날아가 부딪쳤다. 챙캉커리는 요란한 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에스토는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체드란은 에스토의 손을 밟고는 발로 몸을 찼다.

에스토가 한 팔로 막았지만, 차인 힘에 못 이겨 뒤로 날아갔다.

쿵─!

복도 끝에 부딪힌 에스토는 한쪽 팔을 부여잡으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금이 간 듯 팔이 빠르게 부어올랐다.

“어… 어…!”

문제는 에스토가 요반나 사람을 지나쳐 떨어졌다는 것이다. 체드란과 에스토 사이에 놓이게 된 그자는 다가오는 이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하얗게 질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이를 무시한 채로 체드란은 에스토에게로 다가갔다.

충직한 기사들은 빠르게 움직여 요반나 사람을 포박하고 그가 있던 방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도주로도 차단되었고 수도방위군이 사방을 에워싼 상태다. 아직도 싸울 의지가 남아 있는가.”

에스토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의 검은 저 멀리에 있었고 팔에서 오는 통증은 어마어마했다.

체드란과 실력 차이가 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리 압도적일 줄은 몰랐다. 전쟁광이라는 소문이 헛된 것은 아니었을까, 넘실거리는 붉은빛 아래의 체드란은 누구보다 전쟁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백금발도, 시리도록 푸른 눈도 감정 하나 없는 것처럼 에스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궁금한 것이 있네.”

체드란의 물음에도 에스토는 답이 없었다.

“나엘라의 검은 어쨌는가?”

나엘라가 마음을 담아 에스토에게 보낸 검. 쓰지 않을 것이라면 돌려받고 싶었다.

나엘라에게 소중한 검이 아니던가.

“버렸습니다.”

체드란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의외의 대답이라고 할까, 적이 된 자가 할 만한 행동이라고 할까.

“그 검이 나엘라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텐데.”

“제게는 그 말보다 더한 악담이 없었습니다.”

지나간 고통은 곧 향기가 되리니─.

믿었던 마호세르디의 배신으로 증오를 품은 자신에게 있어 그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저주였다고, 에스토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렇군.”

체드란은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이든 누군가에겐 순간을 이겨 낼 힘이, 누군가에게는 악담이 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나엘라가 아끼던 검이기에 애석할 뿐이었다.

“어디에다 버렸나?”

검을 준 것은 나엘라지만 버리든 소중히 사용하든 그건 받은 이의 선택이다.

대신 소중히 여기는 검인 만큼 체드란은 나엘라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돌려줄 사람도 자신이길 바랐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체드란의 얼굴이 조금씩 온기를 잃었다. 아무리 나엘라의 옛 친구라지만 도를 넘고 있었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저 앞에서 당당히 말하다니. 다른 이였으면 지금쯤 바닥에 처박혔을 것이다.

“나는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대에게 선택권을 줬던 것은 적이라 확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적입니까?”

체드란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적이라기보단 나엘라의 나쁜 친구 정도겠지.”

거동이 힘들 부상을 에스토에게 입힌 뒤 저 멀리 내버리겠다 결심한 체드란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킨 에스토가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창문 밖으로 떨어졌다.

체드란이 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자 수풀 속으로 떨어진 에스토가 보였다. 몸에 유리가 박혀 피가 흐르는데도 그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절뚝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자들을 피해 굴러다니는 검을 하나 줍고는 빠르게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보던 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독하군. 마호세르디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가?”

무서워서 어디 말 한마디나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나엘라도 어지간한 성격이지만 에스토도 별다를 바 없었다. 유유상종이라고, 둘이 친구인 것엔 이유가 있었다.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나엘라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약속한 것이 있기에 퍽 난감했다. 그래도 방향은 알맞게 간 듯해 잘 만나겠거니 믿을 뿐이었다.

“대공 전하.”

에스토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던 체드란은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 사이로 포박된 요반나 사람과 두꺼운 나이트가운에 둘러싸인 여자가 보였다.

정신을 잃은 듯한 여자는 붉은 머리를 산발한 채 기사에게 안겨 있었다.

체드란은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직접 들은 건 아니나 요반나 사람의 침실에서 파르로시가 구조된 것만 보아도 예상이 갔다.

다만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상했다.

“약을 먹인 것 같습니다.”

체드란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수법이 더럽다 못해 악질적이었다.

“상태는?”

기사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체드란이 시선을 들자 기사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근처에서 채찍을 발견했습니다.”

“…….”

“혈액이 묻어 있었습니다.”

직접 구조한 듯한 몇 명의 기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흔적의 범인에게로 돌린 그들의 눈초리는 칼날이라도 달린 양 매서웠다. 

저에게로 향하는 시선이 험악해진 것을 느낀 듯 요반나 사람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모양새에 기사가 체드란을 바라보았다. 체드란이 고갯짓을 하자 기사가 단단히 묶은 재갈을 풀었다.

입이 자유로워지자마자 남자는 침을 질질 흘리며 연신 죄를 빌었다.

“황, 황후가 먼저 추천했습니다! 저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때로는 이런 것도 여흥이라면서 한번 해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끝까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옷, 옷을 벗기니 이미 맞은 자국도 많고 해서 호기심으로 건드렸을 뿐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썩는 기분에 다른 기사들도 인상을 찌푸렸다.

체드란은 바닥에 머리라도 찧을 듯한 남자를 내려다보며 그의 처우를 결정했다.

“쓰러질 때까지 채찍질하고 수도로 압송한다.”

남자가 사색이 되었지만, 곧 다시 입이 막히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체드란은 그런 남자를 지나쳐 밖으로 향했다.

아직 반란군 진압이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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