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에스토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눕고 싶은 것을 견디며 빠르게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리에 힘을 줘 뛰고 싶었지만 몸이 여의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주변 지리를 잘 안다는 점이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둘러보고 수시로 이상이 없나 확인했으니 다행이었다.
혼자 미리 알아 둔 숲속 길을 타고 올라가며 이를 악물었다. 몸에 박힌 유리 조각을 제거하지 않았기에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자잘한 것들은 제거했지만 몇 개는 혈관 근처에 박혀 제거하지 못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출혈까지 심해지면, 도주는 고사하고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진다. 이곳에서 쓰러졌다간 가망이 없다.
발을 애써 내디디며 버티려 노력하는데도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시야가 흐려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하기에 눈에 힘을 주며 부릅떴다.
“크윽.”
숨이 턱턱 막힐 때면 잠시 걸음을 멈춰 고통을 참아 내었다. 3층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갈비뼈와 어깨뼈가 크게 상한 듯했다.
바로 아래 수풀이 있다는 걸 알고 뛰어내렸으나 애매하게 걸쳐져 떨어진 것이 문제였다. 몸으로 땅바닥을 마주한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후우.”
잠시 숨을 고른 에스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숲을 파고드는 중에도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수시로 확인했다.
그때였다. 약초꾼들이나 다니는 길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여자는 에스토를 등진 채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걸쳐져 펄럭이는 로브가 이질적이었다.
여자의 옆에는 그녀처럼 로브를 입은 자들이 자리했다. 자신의 마지막을 가져가려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 모습을 보며 에스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장난스럽게 말을 뱉었다.
“깜박했네. 도주로 파악하는 법을 너에게 배웠다는걸.”
에스토의 목소리에도 나엘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대충 시간 계산을 하고 있었다. 지금쯤 체드란이 반란군을 진압했을지, 진행이 얼마 정도 됐을지…… 그런 것들을 말이다.
에스토는 천천히 걸어가 주변 나무에 기댔다. 그녀 때문에 길이 막혔으니 잠시 체력을 비축할 생각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
적막한 공기를 타고 여자치고는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을 바라보던 것을 멈춘 나엘라는 몸을 돌려 에스토를 바라봤다.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에는 옛날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무게가 존재했다. 너무 많은 것을 품고 있다는 걸 알기에 서로를 마주 보는 눈빛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왜 태도를 확실히 밝히지 않아?”
나엘라의 질문이 언뜻 데자뷔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 만났던 체드란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는 에스토가 적인지 확실하지 않다며 말했지만, 나엘라는 이유를 물었다.
“무슨 태도?”
“내가 네 적이라면 황후의 앞에서 나를 짓밟았어야지.”
“그렇게 추한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내가 마호세르디에 있었다면, 단제 오라버니가 시론 후작님을 찾아갈 걸 내가 알았다면 과연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에스토의 눈이 시리게 빛나기 시작했다. 화를 돋우는 건지 회유하고 싶은 건지 나엘라의 의도를 탐색하는 눈초리였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한층 더 깊게 가라앉았다.
“내 앞에서… 아버지 얘기, 꺼내지 마.”
에스토가 당장 나엘라를 공격할 것처럼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온몸이 만신창이임에도 그 기세가 타오르는 불같았다.
그 모습을 훑어보던 그녀는 다른 것들을 궁금해했다.
“지금 파르로시 황녀는 어떤 상태야?”
“글쎄, 깨어난 그녀에게 직접 물어봐. 제정신일진 모르겠지만.”
한발 늦었구나. 나엘라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파르로시는 이미 몹쓸 짓을 당한 모양이었다.
“왜 나와 하일모라가 친구인 걸 말하지 않았어?”
“굳이 왜? 나는 황후도 같이 무너지길 바라. 황후라고 죗값이 없는 건 아니지.”
“그만한 분노를 품고도 제대로 행동하지 않는 이유가 뭐야.”
에스토는 이글거리는 눈을 감추지 않은 채로 나엘라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코앞에서 이를 갈며 짓씹듯 뱉었다.
“참고 있는 거다. 우습게도 마호세르디 출신이라 기다리는 법을 배워서 말이야.”
나엘라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에스토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샅샅이 훑었다.
“태도를 확실히 해, 에스토.”
“여기서 무엇을 더?”
“내가 너를 적으로 느끼도록 확실히 하라고.”
“내가 왜? 너를 배려해 달라는 말인가?”
으득─ 에스토에게서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너조차 마호세르디구나. 끝도 없이 바라기만 해. 내가 여기서 뭘 더 해 줘야 하지? 지금 나는 참는 것만으로 미칠 지경인데.”
“나는 너를 적으로 대할 수가 없으니까.”
“그럼 나는 그 점을 이용해야지. 당연한 거 아닌가, 나엘라?”
에스토의 말엔 틀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엘라는 그에게 자비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날을 세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일깨워 주기를 바랐다.
“나는 내 사람들을 지킬 거야.”
옛날부터 한결같던 나엘라의 다짐, 에스토는 자신이 더 이상 그곳에 속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나는 마호세르디를 끝장낼 거다.”
눈빛만 형형하게 불태우며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바라봤다.
“마지막 호의야. 다음엔 적이니까.”
나엘라의 말이 끝나자 곁에 있던 지안이 다가와 가방 하나를 건넸다. 살짝 열린 안에는 붕대와 약 같은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시선만 살짝 내릴 뿐 받지 않는 그를 대신해 나엘라는 발치에 가방을 내려놓곤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따라 다른 이들도 한쪽에 매어 뒀던 말들의 줄을 풀고 올라타기 시작했다.
나엘라는 가만히 서 있는 그를 뒤로한 채 말의 방향을 틀었다.
“에스토….”
그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듯 나엘라가 잠시 말을 골랐다.
“너의 결정을 존중할게. 너는 너의 길을 가.”
예전에 에스토가 해 주었던 말을 나엘라가 전했다.
“네가 원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도 나는 그들을 지켜야 해. 그러니 이제는 돌아보지 않을 거야.”
그들이 함께했던 과거도, 죄책감도 말이다. 시리도록 아프지만 묻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앞으로 일어나는 마호세르디의 행동도, 결정도 내가 할 거야.”
그러니 모든 일에 대한 원망이 제게로 향하길 바랐다. 앞으로 에스토에게 겨눈 검은 모두 나엘라의 뜻일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엘라는 말의 복부를 차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무언가를 잃은 사람이 에스토뿐이었겠나. 모든 이들이 무언가를 잃었다.
나엘라는 친구를, 에스토는 아버지를.
적이 되는 순간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두 친구는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제는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검을 휘둘러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달려가는 그들의 뒤로 남겨진 말 한 마리가 푸르릉 콧김을 뱉으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거동이 힘든 에스토를 위해 남겨 둔 모양이었다.
올라오는 것이 분노일까, 고통일까.
에스토는 가라앉은 눈으로 가방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서튼은 전투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오랜만에 흐르는 이마의 땀을 닦아 내었다.
예상했던 대로 수도방위군은 반란군을 문제없이 소탕했다. 수 차이야 있었지만, 기습도 한몫했고 정병과 급조된 병사의 실력 차이도 꽤 컸다.
나름 성대하게 꾸민 듯했던 황후의 계획은 무너졌다. 전투 내내 에스토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사히 도망친 모양이었다.
이곳까지 와서 또 첩자 노릇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쩌겠는가. 나엘라가 정보를 달라지 않나. 그럼 그게 군사 기밀이든, 반란군 소탕 작전이든 빼내 줘야지.
코더의 명으로 아그노멘에 오자마자 나엘라에게 신나서 달려간 것은 자신이었다.
체드란에게 들키지 말라는 소리를 언뜻 들었지만, 대공씩이나 되어 사람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볼 리가 없었다. 나름 고개도 숙이고 다니고, 일부러 더러운 꼴도 유지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자신의 입방정으로 진즉 정체가 들켰다는 것도 모른 채 서튼은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에스토와 나엘라가 만났을 것이다. 비록 반쯤은 운에 맡긴 일이었지만 어쩐지 조우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다른 이들에게 들키기 전에 잘 마무리하기를 바랐다. 에스토는 자신이 마호세르디에 있을 적 오다가다 본 자이니 말이다.
“거점으로 이동한다.”
속한 조 조장의 외침에 서튼은 걸음을 옮겼다. 원래라면 체드란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1조나 2조에 잠입했어야 하지만 아무래도 들킬 위험이 있는지라 다른 조에 자원했다.
궁병들을 도와 산을 점령하고 본관에 침투해 제국 귀족들까지 사로잡았다.
체드란은 황후의 정보를 부는 자만 살려 두라 했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줄줄 말해 대는 통에 죽일 자가 없었다.
제국 귀족들을 사로잡은 5조는 체드란이 있는 1조, 2조와 합류할 예정이다. 궁병들은 전투 마무리를 도와주러 떠났으니 자신들만 움직이면 되었다.
포로들을 일렬로 세워 묶고 기사들이 그 양옆을 포위하며 움직였다. 합류하기로 한 지점은 반란군 본거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더 어두워지면 탈출을 시도하는 자가 생길 수도 있기에 그 전에 움직여야 했다.
“이쪽이다.”
앞서서 길을 안내하는 기사들을 따라 걷다 보니 저 앞에 모여 있는 이들이 보였다.
포로들을 가두려 조달해 온 죄수용 마차가 몇 대 서 있었고, 그 옆으로 체드란과 다른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서튼의 눈에 무언가가 걸렸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기사들이 포로용과는 다른 일반 마차에 웬 여인을 태웠다. 붉은 머리인 것으로 보아 그녀가 파르로시 황녀인 모양이었다.
주변을 신속하게 훑은 서튼은 귀만 쫑긋 세운 채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
사람이 얼추 모이자 체드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로들은 바로 황궁으로 압송하고, 황녀는 깨어나면 상태를 확인한 뒤 인도한다. 나는 포로와 함께 움직일 테니 다롱 경이 황녀의 호위를 맡는다.”
아무래도 체드란은 당장 황궁으로 향하려나 보다. 쉬지도 못하고 움직이는 그가 안타까웠지만, 그의 괴물 같은 체력을 떠올리곤 생각을 떨쳐 내었다.
“나와 함께 갈 인원과 황녀를 호위할 인원은 조금 후에 다롱 경이 전달할 것이다.”
서튼은 이야기를 들으며 슬금슬금 움직였다. 오랜 습관대로 목소리는 잘 들리나 눈에는 잘 띄지 않을 곳을 찾는 것이다.
“다롱 경은 잠시 나를 따라오도록. 그리고 그대도.”
아무래도 체드란은 다른 이들과 떨어져 나머지 세부 계획을 세우려는 듯했다. 엿듣기가 어려워지겠다 싶어 아쉬워졌다.
“안 들리나?”
누군가 체드란의 말을 무시하는 건가?
슬쩍 고개를 든 서튼은 그대로 굳어 눈을 깜박였다. 체드란이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오라 말했다.”
“저, 저요?”
“그래.”
신이시여, 서튼은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지금 자신의 상황이 진짜인지 가늠했다. 아무래도 정체를 들킨 모양이었다.
언제, 어디서 들킨 것일까?
뭐가 됐든 자신은 나엘라에게 죽은 목숨이었다.
“시킬 일이 있으니 따라오도록.”
왜 하필 나란 말인가.
체드란에 이어 다롱 경의 눈빛까지 받고 나서야 서튼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발을 꾸역꾸역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