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15)화 (115/220)

114화

다롱은 초조하게 복도를 서성였다. 파르로시를 구출해 오고도 만 하루, 아직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다롱은 파르로시와 호위 기사들을 데리고 아그노멘 영주 성으로 움직였다.

소식을 들은 영주는 맨발로 뛰쳐나왔다. 제 영지 바로 옆에 반란군이 있었다는 것에 어느 누가 기겁하지 않겠냐마는 영주는 옷조차 제대로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거기다 부상자가 황녀라는 소리를 듣고는 기절할 기세였다.

제일 좋은 방까지 내줄 만큼 영주의 극진한 대접 속에도 파르로시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다롱의 재촉에 여자 의원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간 뒤로 벌써 30분이 흘렀다.

파르로시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에 바로 황궁으로 향하지도 못했다. 가능한 한 아그노멘에서 입이 무거운 의원을 찾아야 했는데, 심지어 여자여야만 해서 더욱 시간이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영주가 사병들까지 풀어 가며 근처 영지에서 의원을 데려왔다. 비록 나이가 지긋한 이였지만 보조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서 다행이었다.

여성 의원과 보조 모두 몇 번에 걸쳐 입을 단속한 뒤에야 진찰을 할 수 있었다.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채찍을 맞은 곳은 이미 감염되어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파르로시는 그 상태임에도 약에 취해 횡설수설 말을 뱉었다.

어찌어찌 열이 조금 내리니 그 이후가 문제였다.

의원은 아무래도 황녀가 정신적인 타격까지 받은 것 같다고 전했고 다롱은 신음을 삼켜 내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곧이어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떻게 되었나?”

의원이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급히 묻자 그녀는 어두운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정신이 조금 드셨습니다.”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는가?”

“문제는 없습니다만….”

의원이 차마 말을 뱉지 못하고 집어삼키는 동안 방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악! 아…!! 악!!!”

열린 문틈으로 들리는 소리에 급히 들어가자 보조가 발광하는 파르로시를 제압 중이었다. 온몸을 뒤틀며 버둥거리는 탓에 보조도 침대에 올라가 몸으로 그녀를 막아야 했다.

“놔! 죽여 버릴 거야! 아악!”

그녀의 비명에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도 뛰어 들어왔지만 어쩔 줄을 몰랐다. 황녀의 몸에 쉬이 손을 댈 수 없는지라 보조를 도와주지도 못하고 바라만 봐야 했다.

결국, 다롱이 총대를 메고 그녀를 도왔다.

“황녀님, 진정하십시오! 여기는 아그노멘입니다!”

“놔아아! 놓으라고! 다 죽여 버릴 거야!!”

분명 연약한 여자의 몸일진대 제압이 어려웠다. 어찌나 힘이 센지 보조는 그녀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다롱이 파르로시의 양팔을 붙잡자 기사 하나가 급히 다가와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사이에 의원이 다가와 정신없는 보조 의원에게 약통과 주사기를 건넸다.

“아무래도 진정제를 놔야 할 것 같습니다.”

다롱은 어찌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지만, 답이 정해진 문제였다. 황녀를 제압하고 약을 투여해 진정시킨 것이 추후 문제가 된다면 감당할 생각이었다.

“어서 진정제를 놓게.”

기사 하나가 더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붙잡고는 침대에 고정했다.

“놓으라고! 죽일 거야! 다 죽여 버릴 거야! 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만 보아도 황녀의 상태가 심각했다.

곧이어 약을 채운 주사기를 건네받은 의원이 파르로시의 팔에 진정제를 놓았다.

“금방 안정될 겁니다.”

주사를 놓고 물러나자 파르로시가 더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목을 뒤로 젖히고 온몸을 뒤틀며 흰자를 보였다. 조금 보이는 동공조차 완전히 풀려 있어 정상적인 사람으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약이 도는지 눈동자가 조금씩 흐릿해지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제야 다롱과 다른 기사들이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다롱은 조금 전의 사태에 놀란 기사들을 밖으로 내보내곤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황녀님이 왜 이러시는가?”

나이가 지긋한 의원은 다롱의 태도에도 침착하게 답변했다.

“정신적인 타격이 이런 것을 뜻한 겁니다. 추후 진료를 봐야 정확해지겠지만 받은 충격이 너무 커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더 날카로워지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경우 두 가지 행동 방향을 가집니다.”

“뭐지?”

“그때의 충격이 마음에 큰 영향을 주어 앞으로 계속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사시는 겁니다. 이 경우엔 치료도 굉장히 오래 걸립니다.”

“이런 광증이 계속 나타난다는 건가?”

“네.”

“다른 경우에는?”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그렇습니다. 그곳을 벗어났다는 것만 깨달으시면 발작은 하지 않으실 겁니다. 현실 인지만 된다면 금방 본인을 찾으시겠으나 그래도 충격은 남아 있을 겁니다. 두 경우 모두 오랜 시간 치료가 필요한 법이지요.”

“이런….”

다롱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파르로시의 대한 안쓰러움이 일어남과 동시에 앞으로의 일이 암담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몸 상태로는 장시간 마차를 탈 수 없다. 황궁에 직접 가지 못하니 황궁에 있는 주치의를 요청했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지금 그곳은 발칵 뒤집힌 상태라 답변조차 오지 않고 있었다.

황후와 관련된 이들이 전부 조사를 받고 있어 황궁을 나올 수가 없다. 파르로시의 주치의 역시 황후의 사람이니 마찬가지였다.

다른 황실 의원이라도 보내 달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황제가 파르로시를 완전히 내친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리 잔인하게 굴 수 없다. 황제가 요청을 허락했다면 진작에 의원이 오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 정말….”

거친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 다롱은 누워 있는 파르로시를 바라보다 한 번 더 한숨을 뱉었다.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다롱과 의원은 어쩔 수 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

그 후로도 파르로시는 정신이 들 때마다 발작을 일으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력이 달리는지 처음처럼 소리는 지르지 못했지만 다 갈라진 목소리로 저주의 말을 뱉으며 눈을 번뜩이는 건 여전했다.

파르로시가 발작할 때마다 의원 보조와 다롱이 그녀를 제지하고 진정제를 놓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음 날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파르로시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문 앞에서 대기하던 다롱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안을 지키던 보조가 나와 파르로시가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니 침대 위에서 하얗게 질린 채 눈만 굴리고 있는 파르로시가 보였다. 피골이 상접한 데다 입술도 하얗게 일어난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 콜록, 콜록.”

입을 떼자마자 쏟아 내는 격한 기침에 보조가 얼른 물을 건넸다.

그녀가 다시 진정된 것을 확인한 후 다롱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노헤스카 기사단의 부단장, 바체 다롱이라고 합니다.”

노헤스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오, 오라버니….”

여전히 말을 하기가 힘든지 파르로시는 인상을 찡그렸다.

“대공 전하께서는 반란군을 소탕하고 황궁으로 향하셨습니다.”

원하는 답이 아니었던 걸까, 그녀의 눈이 표독스러워졌다. 기력이 없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독기가 남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오라버니가… 오라버니가 나를 봤냐고.”

아, 그런 뜻이었었나. 파르로시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제야 깨달은 다롱은 잠시 고민했다.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하지만 이제 와서 거짓을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네. 보셨습니다.”

“전부…?”

“제대로 보시진 못하셨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고 계십니다.”

다롱의 말이 끝나자 파르로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의 눈은 초점이 사라졌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런 파르로시에게 다롱은 무엇부터 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치료였다. 이곳에선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힘드니 황궁으로 가야 했다.

“기력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황궁으로 가 적절한 치료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황궁…?”

“무엇보다 황녀님의 치료가 가장 시급합니다. 지금 황궁은 아무도 나올 수 없는 상태이기에 황녀님께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됐길래?”

“……황후 마마께서 조사를 받고 계십니다.”

파르로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그 지옥으로 밀어 넣은 이가 황후라는 걸. 황후의 명으로 그곳을 향했을 테니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시 눈을 뜬 그녀는 온갖 감정이 요동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분노와 절망, 그리고 고통 그 사이에서 맴돌았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갈 거야.”

“안 됩니다. 지금은 장시간 이동을 하실 몸 상태가 아니십니다.”

“당장 가겠다고 말했어.”

“안 됩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릴 거야.”

다롱은 속에서부터 깊이 올라오는 신음을 내리눌렀다.

왜 하필 자신이 이런 일을 맡았나. 오늘따라 말주변이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당장 아그노멘에 있는 나엘라를 데려와야 하는 게 아닐까. 나엘라라면 파르로시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파르로시와 눈을 마주치고는 생각을 접었다.

지금 나엘라와 마주하면 파르로시는 정말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몰랐다. 안 그래도 사이가 안 좋은 둘인데 처참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되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렇다고 베르에티를 데려올 수도 없었다. 파르로시가 그녀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황궁까지 가려면 반나절은 꼼짝없이 마차에 계셔야 합니다.”

“상관없어.”

“누워서 가실 수 있도록 가장 좋은 마차를 구해 보겠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해.”

“마차를 구하고 황궁으로 이동할 계획을 짜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내가 죽는 꼴 보고 싶어?”

다롱은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요청을 모두 들어줘야 할 판이다.

파르로시는 무엇을 위해 황궁을 가려 하는 걸까.

“준비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다롱은 그녀를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