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잠깐 잠에 빠졌던 파르로시는 눈을 뜨곤 창문 밖을 확인했다. 아그노멘에서 급히 공수해 온 마차는 황실 마차보다 승차감이 훨씬 나빴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마차를 타 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였다.
그녀를 휘감고 있는 감정은 이런 것들에 흔들리기엔 더욱 진하고 늪과 같았다. 자신을 조금씩 좀먹어 가던 감정은 어느새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조금 더 주무십시오. 황궁까지 아직 반절밖에 오지 못했습니다.”
함께 마차에 올랐던 의원의 말에도 그녀는 대답 없이 창문 너머만 바라보았다.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칼이라고는 식사용 나이프밖에 쥐어 본 적 없건만 그녀는 당장이라도 기사들의 검을 뺏어 모든 이들을 도륙하고 싶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칼을 꽂고 산 채로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그러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그냥 죽고 싶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싶었고, 제 몸을 아프게 해서라도 가슴에 얹혀 있는 것들을 덜어 내고 싶었다.
몸이 아프면 쌓인 감정이 연해졌다.
아프고 무섭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제 몸을 혹사하고 피를 보면 이 감정도 조금 덜해질까 충동이 일었다.
더불어 묘한 쾌감까지 느껴지니 이것이야말로 미쳐 가는 것이 아닐까.
제 몸에 있는 더러운 피가 모두 빠져나가면 조금 시원해질까.
몸이 아픈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기력해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고 배가 고프지도, 무언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말조차 하기 싫은 이 감정을 알까.
그냥 자신을 내버려 두길 바랐다.
“황녀님.”
의원의 부름에 눈동자만 돌려 쳐다보았다.
“지금부터 마음 독하게 먹으셔야 합니다.”
불쌍한 제 처지에 동정심이라도 든 걸까, 그 모습이 얼마나 역겨운지 알려 주고 싶었다. 그리 말하는 네 눈깔을 파 버리고 모든 살가죽을 찢어 놓고 싶다고.
하지만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황궁에 미리 전령을 보냈다고 합니다. 전령이 제대로 도착했다면 곧 마중 나올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오지 않을 것이다.
그자들이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들과 다를 게 뭔가.
“내려.”
지금 누구와도 마주하고 싶지 않고 동정심 어린 눈길도 역겨웠다.
그러니….
“네가 내려.”
파르로시를 가만히 바라보던 의원은 곧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창을 열었다.
“마차를 잠시 멈춰 주십시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황녀님께서 불편하다 하셔서 잠시 자리를 비울까 합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마부가 이내 요구를 받아들였다. 근처에 있던 다롱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전해 온 말에 다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잠시 쉬었다 간다!”
다롱이 소리치자 다른 이들도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수도로 가는 가장 큰길 한복판이었다. 어디서 쉬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쩔 수 없었다.
곧이어 마차가 멈추고, 노크와 함께 다롱이 문을 열었다.
“의원이 불편하시다고 하셨습니까?”
파르로시는 대답 없이 의원을 바라봤다. 당장 사라지라는 그 무언의 압박에 의원은 내리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열이 오르시거나 몸이 아프시면 꼭 불러 주시옵소서.”
의원이 내리고 마차 문이 닫히자 파르로시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제야 겨우 혼자 있는 시간이 온 것이다.
황궁으로 가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누구에게 가장 먼저 따져야 할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에게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고 온통 삭은 속을 보여 주고 싶었다.
칼로 갈라 내면 속이 보일까, 혹여 죽으면 조금이라도 슬퍼할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그랬는지가 궁금하고 또 궁금했다.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 문득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묘한 이질감에 손을 펴 보니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맺히고 있었다.
무감정한 눈으로 그것을 본 그녀는 다시 꾸욱 감아 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밖에서 다롱이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막아라! 웬 놈이냐!”
뒤이어 날카로운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도 파르로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이없다는 실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황녀님!”
마차 문이 벌컥 열리기에 파르로시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발 나를 좀 가만….”
당연히 기사들인 줄 알고 짜증을 내던 파르로시는 그대로 멈췄다. 앞에 서 있는 이는 검은 복면에 가문의 인장을 달지 않은 채였다.
남자는 다급하게 그녀를 부르며 외쳤다.
“황후 마마께서 보내셨습니다! 지금 가셔야 합니다!”
“뭐…?”
“지금 노헤스카의 기사들이 황녀님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황후 마마께서 이것을 보여드리라 하셨습니다.”
남자의 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그자가 내민 것은 황후가 가장 아꼈던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절대 타인이 가졌을 리 없는 반지를 가만히 내려보던 파르로시는 옅게 웃음을 지었다.
“하… 그래….”
그런 그녀의 반응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남자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황후 마마께서 황녀님께 일어난 일을 듣고 쓰러지실 뻔하셨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황녀님을 구하라시며 저를 보내셨습니다. 누구의 말도 믿으시면 안 됩니다.”
남자는 연신 파르로시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마차 밖에서는 치열한 전투 중인지 고함과 금속음이 뒤엉키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건데?”
파르로시의 얼굴에 비소가 걸렸지만 남자는 안심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말을 동의라 여긴 걸까. 어쩌면 그녀의 감정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이 제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황후 마마께선 안전한 곳에 은신처를 만들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지금 어마마마께 가는 거라고?”
“예.”
파르로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가자.”
한 번 가 보자, 마침 나도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
파르로시는 단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는 선명한 미소를 지었다.
*
남자는 파르로시의 상태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듯 거칠게 이끌었다. 전투가 벌어지던 정신없는 곳을 벗어나 남자가 이끄는 대로 달리니 말이 매어져 있었다.
“타십시오.”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하도 거칠게 끌어 대어 파르로시는 오는 길에 몇 번이나 넘어졌다. 그 영향으로 말에 오르는 것조차 쉬이 행하기 어려웠다.
남자는 짜증이 났는지 그녀의 옷을 붙잡아 올렸다.
“상황이 급해 예의를 차릴 수 없는 점,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디서 어깨너머로 본 예의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조차 추하다고 느껴지니 우습기만 했다.
무례한 행동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파르로시는 오직 이후에 만날 황후에게만 신경이 쏠려 있었다.
파르로시 뒤에 올라탄 남자가 말고삐를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목적은 파르로시뿐이었는지 복면을 쓴 다른 자들이 함께 퇴각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도 말에 올라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힘드셔도 참으셔야 합니다. 추적을 피해야 하니 좋은 길로는 가지 못함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파르로시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에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거친 길을 달리는 바람에 양 갈래로 몸이 갈라질 듯한 격통이 올라왔지만, 그때마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적어도 내가 아직 숨은 쉬고 있구나, 고통이 느껴지는구나, 부질없는 삶이 계속되고 있구나.
자꾸만 쓰러지려는 몸을 곧추세우자 남자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남자는 빈민들이 사는 마을에 말을 멈췄다. 훌쩍 내린 남자는 짐 덩이라도 되는 양 파르로시를 끌어 내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말을 두고 갈 겁니다. 한동안은 더 걸으셔야 합니다.”
파르로시가 점점 하얗게 질려 가고 있음에도 남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녀가 쩔뚝거리면서 걷는다는 건 알고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어 결국 남자의 등에 업혀야만 했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남자를 보고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빈민가에서도 한참을 움직여 인적이 드문 곳까지 걷자 아담하게 세워진 이층집이 보였다. 사람의 손이 타지 않았는지 온갖 곳에서 오래된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문 앞에서 파르로시를 내려준 남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매우 정중한 태도로 문을 두드렸다.
“황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남자의 말에 안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파르로시는 앞에 서 있는 자가 어머니의 오랜 호위 기사라는 걸 알아차렸다.
“들어오십시오.”
이 문만 지나면 그녀가 보고자 했던 사람이 있다. 호위 기사가 있다는 건 황후가 있다는 것과 같았다. 하긴 아끼던 반지까지 맡긴 것으로 보아 황후가 없으면 되레 놀라우리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쥐어짜 안으로 들어가니 벽난로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이 보였다.
“세상에! 파르로시!”
이런 곳에서도 황후는 고급스러운 겉옷 아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내 딸아이가 대체 무슨 꼴인가!”
황후는 파르로시를 데려온 남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걱정 마렴, 이제 이 어미가 왔으니 넌 무사할 거란다.”
그녀는 다정한 어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파르로시를 끌어안았다. 생전 처음 안겨 보는 황후의 품에서 그녀는 멍하니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시리도록 차가운 그 음성에도 황후는 흔들리지 않았다. 안고 있던 팔을 풀어 내며 되레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파르로시에겐 소름이 돋는 미소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당연히 나를 의심했겠지. 하지만 나는 맹세코 그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파르로시는 내내 그녀가 할 말들을 생각해 보았다.
과연 그녀는 이유를 묻는 저에게 뭐라 할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보고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진 않을까.
그런 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가 뼈저리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리저리 알아보았지. 그런데 뭘 발견한 줄 아니?”
파르로시의 반응이 어떻든 황후는 말을 이어 나갔다.
“체드란이 이번 일에 관여했다는 걸 알았다. 그놈이 우리 모녀를 끝장내려고 계략을 꾸몄던 거야.”
체드란에 대해, 그녀가 알아낸 것에 대해 늘어놓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파르로시는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날 가두고 목줄을 채워 놨던 세계는 정말 별것이 아니었구나. 이리도 보잘것없었던가.
세상 제일 재밌는 것을 본 것처럼 웃음이 나오는 걸 참고 또 참아 내었다.
“오라버니가… 오라버니가 그럴 리 없어요….”
“파르로시, 믿기 힘들 거라는 걸 알아.”
“거짓말이에요.”
“항상 너의 곁에 있던 사람은 이 어미라는 걸 잊지 마렴.”
조금 전까지 우습기만 하던 감정이 갑작스럽게 가라앉았다.
왜? 대체 왜? 왜!
꾸역꾸역 참고 또 참아 내며 혓바닥을 깨물었다.
“믿을 수 없어요.”
파르로시가 고개 숙이자 황후는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도 자신의 감정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을까.
서로 속고 속이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지 마렴. 내가 다 해 줄 테니.”
오늘 파르로시는 어머니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존재가 없었다.
그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은 파르로시는 황후를 마주 안으며 눈을 감았다.
열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