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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17)화 (117/220)

Chapter 14. 원죄 속에 개화하는 악

116화

지붕에 납작 엎드려 있던 서튼은 슬쩍 눈치를 보았다. 때를 보던 순간이 온 것이다. 아까까지 서 있던 황후의 호위 기사가 안으로 들어가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어 있는 그녀의 보이지 않는 기사까지 뚫고 지붕에 자리 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녔다. 실력이 출중한 자신이었기에 망정이었다.

지붕 위에서 내려오려 했던 서튼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 때문에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황후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움직이기는 그른 것 같았다.

다행인 건, 그 황후가 이렇게 지저분한 곳에 오래 있지 않을 거란 예상이 맞아떨어졌는지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아래쪽에 마차를 숨겨 두었습니다.”

“제대로 감시하거라. 만약 파르로시가 다른 생각이라도 하는 낌새를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모든 일은 그녀가 독단적으로 처리한 일이 될 겁니다.”

몇 마디를 끝으로 볼일이 끝났는지 황후는 주저 없이 움직였다. 파르로시를 감시할 기사 몇만 두고는 이곳을 떠났다.

더는 숨어 있는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서튼은 지붕에서 내려왔다. 창문으로 어두컴컴한 집 안을 확인하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숲속을 달려 미리 약속했던 장소로 향하니 말이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걸음을 멈추고 작게 휘파람을 불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이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어떻게 되었나?”

다롱의 목소리가 한없이 어두웠지만, 서튼은 개의치 않았다.

“제가 진짜 살면서 온갖 쓰레기는 다 봤지만, 또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황후와 파르로시 황녀가 접촉했나?”

“황녀의 일을 대공 전하께 모두 뒤집어씌우던데요? 황녀가 믿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예상보다 더욱 막 나가는 황후의 행태에 다롱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내비쳤다.

“끝까지 미친 여자군.”

서튼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 악독함은 이해받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생판 남이라도 그리 굴진 않을 터였다.

“요즘엔 뒷골목에서도 그 정도로는 행동 안 합니다. 뒷골목도 나름 신의가 중요한 곳이라고요?”

옛날처럼 막 나가진 않는다고 비아냥대자 다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악의가 어디 흔히 나오는 악의던가. 황녀가 원수라도 되지 않는 한 어미가 되어 그럴 순 없을걸세.”

“황후에 대해 욕을 하자면 끝이 없지만 일단 목적을 달성했으니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황녀가 납치된 것엔 파발을 다시 보냈네. 이때까지 수색하다 돌아간 것으로 하지.”

다롱의 말에 다른 이들은 빠르게 움직여 말에 올라탔다. 소수 인원으로만 움직였으니 빠져나가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가지.”

마지막으로 다롱이 말에 오르자 서튼도 뒤따라 자신에게 할당된 말에 올랐다. 일단 임무는 마쳤으나 찝찝함은 어쩔 수 없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임무를 맡기던 체드란이 스쳐 지나갔다.

‘그대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언제부터 톨레로 상단에 있었는지, 나엘라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지 않겠네. 대신 한동안 내 일을 도와줬으면 하는데.’

다른 이들도 많은데 대체 왜 자신에게 맡긴 걸까.

물론 같이 있던 이들 중 서튼만큼 귀가 밝고 재빠른 자는 없었다. 거기다 돈을 좋아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지 약속한 수고비도 훌륭했다.

나중에 나엘라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걱정이었지만 서튼은 상념을 지워 버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될 대로 되라며 말을 박찬 서튼은 다롱을 따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마차에서 내린 황후가 조용히 속삭였다.

“함께 간 마부나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여라.”

꾸벅 고개를 숙인 호위 기사가 다른 기사에게 눈짓을 전했다.

목격자까지 처리한 황후가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 쉴 생각에 사용인들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조금 더 조심했더라면 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는 걸 알아챘을 텐데.

“파르로시는 괜찮던가.”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소름 끼치는 음색에 황후는 걸음을 멈추었다. 코앞이 황후궁이거늘 하필 마주쳐도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마주한 상대는 평소라면 이곳에 절대 있을 리 없는 인물이었다. 지나다니지조차 않는 사람이거늘. 자신을 기다린 걸까?

황후는 자신이 떠올리고도 어이없는 생각에 비소를 얼굴에 걸었다. 그가 나를 기다리다니, 그것만큼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없었다.

황후는 싱긋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다가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를 향해 다정히 물었다.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괜찮냐고 물었건만.”

황제의 등 뒤로 도열해 있는 근위대들이 보였다. 언제든 그를 대신해 화살을 맞고 칼을 맞아 줄 인간 방패들. 황제야말로 진짜 겁쟁이가 아닐까.

“폐하의 딸이지 않습니까.”

파르로시가 무사한지는 본인의 그 잘난 첩자들을 통해 들으시라고, 황후는 그렇게 전했다.

하지만 황제는 생선 눈깔처럼 반질거리는 눈동자 아래로 기묘한 웃음소리만 흘렸다. 누군가에게는 시리게 느껴질 분노가 애완견의 귀여운 반항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대에게는 무수히 많은 남자가 있지 않았나. 파르로시가 어디 나를 닮았던가.”

대놓고 제 자식이 맞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가 물은 셈이다. 황후는 명치를 콱 쥐는 듯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웃음을 유지했다.

“파르로시의 눈동자는 푸른색입니다.”

“그대의 애인 중에도 푸른 눈이 있었지.”

황후의 미소가 점점 걷혀 가고 있었다.

“잘 보게. 나를 닮은 체드란이나 지엘라, 데테로아 중 어디 어리석은 아이가 있던가.”

“파르로시가 어리석다는 이야기입니까.”

“페트론조차 똑똑하지 못했으니 파르로시도 그대를 닮은 걸 수도 있겠군.”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 흔들릴 필요도 없었다.

황후는 제 손이 떨리는 걸 들키지 않도록 꽉 주먹을 쥐었다. 저 오만한 얼굴을 밟은 채 살려 달라 비는 꼴을 볼 날을 떠올렸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직은 드러낼 때가 아니다.

대답 없이 감정을 꾸역꾸역 참아 내는 황후를 보며 황제는 다시 발을 옮겼다. 그녀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던 양 황후를 스쳐 지나갔다.

“붉은 머리라니, 그렇게 지저분할 데가.”

황제와 근위대가 멀어져 가는 와중에도 황후는 꼿꼿이 앞만 바라보았다. 볼을 깨물어 입안 가득 피가 차는 것도 무시한 채로.

*

아무리 표정 변화가 없는 황제라지만 최측근들은 대충 그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분명, 황후를 만나고 온 황제는 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평상시에는 생각을 잘 공유하지 않는 그가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황후의 조사는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라.”

그의 결정에 서로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용기를 낸 귀족 하나가 입을 열었다.

“현재 마호세르디 공작과 노헤스카 대공이 황후를 감옥에 가둔 뒤 수사 진행하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보좌관 중 하나인 그라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두 가문의 요청을 거절하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다른 때라면 황제의 명을 바로 이행했을 테니 말이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제대로 된 증거가 아니지.”

보좌관은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다 말았다.

현재 두 가문에서 가져온 증거와 증인은 차고 넘쳤다. 반란군 기지에서 잡힌 제국 귀족들은 하나같이 황후의 측근들이었고, 요반나 사람들 또한 황후를 지목하는 상황이었다.

현장 증거가 이리 명확하니 아무리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들 황후를 불러다 조사라도 한 번 해 봐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이 조금이라도 잠잠해질 것이 아닌가.

눈치를 보던 보좌관이 슬쩍 황제 뒤로 시선을 돌렸다. 황제도 그가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알기에 시선을 돌렸다.

“단제 마호세르디 경, 내가 경의 집안을 무시한 것처럼 보이나?”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한 대화 패턴이었다. 황제는 간혹 측근들에게 시험하는 듯한 질문을 던져 속내를 가늠해 보는 것처럼 굴었다.

무감정한 표정을 한 단제가 천천히 보라색 눈을 깜박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는 폐하의 근위대입니다.”

가문은 전혀 상관없다는 그 뜻은 만족스러웠나, 황제의 푸른 눈이 살짝 짙어졌다.

“당분간은 황후가 하고 싶다는 대로 두게.”

보좌관들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다가도 황제의 성정을 떠올리곤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한 번을 예측하기 어려운 인물이니 티를 내는 건 하수다.

주변을 훑은 황제는 책상 의자에 조금 더 깊숙이 등을 묻었다.

“어렸을 적에 나는 다리를 몇 개나 떼어야 벌레가 버둥거리지 않는지, 그것이 참 궁금했네.”

고요한 집무실에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 누구도 대답이나 아첨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다리가 겨우 하나 남았음에도 버둥거리지 뭔가. 그게 어찌나 신기하던지.”

그들은 황제가 무슨 뜻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인간도 그러할지 궁금했네.”

실제로 해 보기도 했다. 다리 없이도 살려 달라 비는 모습을 보며 인간이나 벌레나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 하찮은 생명들이 왜 그리도 살고 싶어 하는지.”

황후 또한 그랬다. 자식이라곤 죄다 저 닮은 것들만 낳아선 하찮기 그지없었다.

황후와 똑같은 붉은 머리를 한 페트론과 파르로시. 그런 지저분하고 어리석은 것들이 제 자식일 리가 없지 않은가.

“아직은 재밌으니 그냥 두는 것이 좋겠지.”

그러다 질릴 때 제거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페트론은 기대에도 못 미치는 바람에 금방 없애 버렸지만, 파르로시는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제 어미를 조금이라도 덜 닮아 다른 모습을 보여 줄지 누가 아는가.

그래 봐야 그 핏줄이 어디 가지 않겠지만.

“조금 더 높이 올라가야 떨어질 때도 더 아픈 법이지.”

보좌관들은 꿀꺽 침을 삼켰다. 오래 황제의 곁을 지켰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 확연히 달랐다.

“아.”

황제는 잠시 잊은 것이 있다는 듯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 누구보다 번뜩이는 눈동자와 말려 올라간 얇은 입꼬리가 부조화를 이루었다.

이만큼 이질적이고 소름 돋는 것이 있을까.

“마호세르디 공작과 체드란에게 입궁하라 전하게.”

보좌관들은 바로 종이를 꺼내 펜을 집었다. 급보를 전해야 할 테니 바로 손을 놀려야 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나의 충신들에게 그럴싸한 답을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납득할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불만을 표현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이 제국도, 이 수많은 백성도 모두 제 발아래 놓여 있으니.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황제는 기분 좋은 것을 감추지 않았다.

오늘도 내일도 이 자리에는 자신이 앉아 있을 것인데 그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그저 다른 이들이 버둥거리는 것을 구경하며 즐기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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