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조용하던 저택에 해가 밝아 와 하나둘 잠에서 깨어나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엘라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원래 아침은 각자 방에서 해결해 왔지만, 베르에티가 오고 난 다음부터 모든 식사를 그녀의 방에서 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수도에 있는 루부스 저택에서 제 주인의 소식을 듣고 한 달음에 달려온 이가 있었다. 베르에티의 어머니를 모시던 시녀라고 했던가.
제 나이 또래의 시녀를 둘 법도 한데 베르에티는 여태 어머니의 시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에게서 어머니의 향기를 찾은 건지도 모른다.
“영애는 일어났는가?”
“이제 막 옷을 갈아입으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엘라는 시녀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음… 내가 제일 늦었을 줄은 몰랐는데….”
방 안에는 이미 지엘라와 하일모라가 앉아 있었다. 이 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모닝 티까지 하는 그녀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나엘라도 참, 그래서 훈련 때는 어떻게 일어난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마호세르디 저택에 찾아갈 때마다 아침 훈련을 하러 도망갔는데 말이죠.”
둘의 애정 어린 타박을 들으며 웃은 나엘라는 이제 막 드레스 룸에서 나오는 베르에티를 향해 걸었다.
“좋은 아침이네, 영애.”
안 본 사이 살이 많이 빠져 버린 영애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좋은 아침이에요, 나엘라 님.”
처음 베르에티가 아그노멘에 왔을 땐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살이 빠져 있었다.
심지어 반란군 기지에서 도망 나올 적에 옷도 갈아입지 못했는지 잠옷 차림이었다. 그 새벽에 놀라 뛰쳐나온 나엘라나 다른 이들이 말을 못 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아침은 저희 주방장 특제 샌드위치라고 하던데.”
샌드위치는 보통 간식으로나 먹지 아침으로는 좋은 음식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베르에티가 좋아하기에 올라오는 것이다.
“산뜻한 과일들이 듬뿍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베르에티의 수줍은 바람에 하일모라가 장난을 쳤다.
“영애의 샌드위치는 과일이지만 나엘라는 아닐걸? 나엘라 샌드위치는 온갖 종류의 고기가 들어간다 하던데?”
아쉽게도 귀족 영애들이 아침에 먹을 만한 음식은 나엘라의 취향이 아니었다. 좋은 열량을 내는 음식은 단연코 고기라고 믿는 나엘라이니 끼니마다 고기는 필수다.
“하일모라의 샌드위치도 고기 잔뜩 넣어 달라 했으니 걱정하지 마.”
“으악!”
아침부터 다들 웃음을 머금은 상태로 식탁에 둘러앉았다. 하나둘 아침 식사가 올라오고, 신경 쓴다는 티를 낸 것인지 베르에티의 음식만 디저트 그릇에 뚜껑까지 덮여 나왔다.
아침 식사 당번을 맡은 이가 베르에티의 앞에서 우아하게 뚜껑을 열었다. 알록달록한 색색의 샌드위치에 소녀 같은 탄성이 터지자 음식을 가져온 이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얼른 하나를 들어 올린 베르에티는 야무지게 베어 먹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들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영애의 앞으로 편지가 엄청나게 쌓인다던데.”
황후와 파르로시 때문에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그사이에 베르에티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원래라면 참고인으로 베르에티도 당장 가야 했지만, 황후에 대한 조사가 지진부진한 것과 더불어 파르로시조차 실종되었기에 늦출 수 있었다.
“아마 제 약혼자일 거예요.”
나엘라가 먹던 샌드위치를 툭 떨어트렸다.
“약혼자…?”
“아, 모르셨구나. 일곱 살 때부터 절 엄청나게 따라다니던 친구가 있어요.”
생각해 보면 쟁쟁한 후작가의 영애가 이때까지 약혼자 하나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보통은 성인식이 다가오기 전에 약혼하고 스무 살이 넘으면 결혼까지 하지 않던가.
“그럼 답장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엘라가 알기론 베르에티는 아직 한 번도 답장하지 않았다. 그저 쌓이는 편지를 보관만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게….”
베르에티가 어색하게 웃으며 주스 잔을 만지작거렸다.
“무서워서요.”
“음….”
나엘라는 그제야 자신의 무심함을 깨달았다. 괜찮다고 하기에 잘 이겨내는 줄 알았다.
베르에티는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됐거늘, 그녀의 마음을 너무 신경 쓰지 못했던 게 아닐까.
“그 사람은 저를 한없이 착하고 멋있는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한 짓을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베르에티는 선택권이 없었다. 살기 위해 그저 황후란 파도에 휩쓸렸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제 탓인 양 굴었다.
“제가 선택한 길이지만 제가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맞는지 고민이 되네요.”
파르로시에게 벌어질 끔찍한 일을 모른 체했다. 모든 결정을 한 것은 황후일지언정 베르에티는 분명 자신의 죄도 있음을 잊지 않았다.
아침 식사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지엘라가 막 위로를 건네려던 찰나였다. 누군가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아그노멘 별장을 관리하는 집사라는 걸 알고 있어 나엘라가 편히 말하라며 눈짓했다.
“흠흠, 베르에티 루부스 후작 영애님의 약혼자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나엘라의 턱이 벌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금 당장 영애가 무사한지 확인하셔야겠다고 난동을 부리고 계시는데….”
베르에티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일모라의 짓궂은 농담도 한몫했다.
“어머, 좋을 때네.”
베르에티는 결국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
테라스에 옹기종기 모인 셋은 정원을 내려다보며 눈앞의 광경에 집중했다.
“영애! 저는 영애의 걱정으로 한숨도 못 잤단 말입니다!”
“그, 그렇다고 여기까지 찾아오시면 어떡해요?”
“영애가 답장조차 없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아십니까?”
“하지만…!”
연인의 작은 투닥거림 뒤로 약혼자란 사람이 박력 있게 베르에티를 끌어안았다.
친구라고 했으니 같은 나이일진데 남자는 어딘지 소년스러움이 묻어났다.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럽다고 생각한 베르에티조차 그 앞에선 그저 스무 살의 아가씨일 뿐이었다.
“정말 보고 싶었단 말입니다.”
남자의 절절한 고백에 베르에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장면까지 본 나엘라는 더 못 보겠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그녀를 따라 들어온 이들은 연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세상에, 영애의 약혼자가 저렇게 정열적인 줄 몰랐네.”
하일모라가 우스갯소리로 말하자 지엘라도 동의했다.
“일곱 살 때부터 따라다녔다고 했나요? 영애는 좋은 사람을 만났네요.”
“영식이 기사 과정을 밟는 중이라 결혼식이 미뤄졌다고 하네요. 영애가 없으면 루부스 후작가의 후계자가 없다는 것도 문제고요.”
“어머, 영식이 본인 가문을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인가요?”
“다행히 위로 가문을 이을 형이 있다고 들었어요. 나중에 루부스 후작가로 들어간다고 하던데요?”
“흔치 않은 결정이네요.”
“아마 영애를 위한 결정이겠죠.”
그래도 루부스는 후작가이니 영애를 도와 후작가를 맡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딸을 무척 사랑하는 루부스 후작이 곱게 허락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영식 덕분에 영애가 조금 힘이 나겠어요.”
“우리가 위로할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겠죠. 가족을 위해 선택한 길이니 가족에게 위로받는다면 영애는 더 금방 일어날 겁니다.”
베르에티가 가진 죄책감의 무게는 그녀의 약혼자가 덜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녀가 솔직하게 얘기하고 상황을 말한다면 믿어 줄 사람 같았다.
영식이 잘 위로하고 다독여 주길 바라야지.
“그런데 나엘라는 표정이 왜 그래?”
하일모라의 질문에 나엘라는 어색히 웃었다. 아무래도 편한 이들과 함께 있으니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야기를 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있잖아….”
분위기를 잡는 나엘라 때문에 지엘라도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체드란이 아무래도 날 좋아하는 것 같아.”
잠시 이들 사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그들의 침묵이 제 생각을 탓하는 것일까 싶어 그녀는 다급히 변명을 이어 나갔다.
“물론 많이 생각해 보고 하는 말이야. 정말입니다, 지엘라 부인.”
나엘라의 얼굴에 점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의 시선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그의 행동을 보니 그 미세하게 느껴지는 차이가 있었어요. 지엘라 부인도 몇 번 봤잖아요. 뭔가 이상하지 않았어요? 저번엔 저한테 꽃이라고 하지 않나, 늘 뒤를 지켜 주겠다고 하지 않나, 느낌이 모호한 말들을 많이 하더라니까요?”
쉴 새 없는 그녀의 변명에 지엘라는 침묵을 지켰고, 하일모라는 알 수 없는 표정을 띠었다. 가끔 체드란이 자신에게 둔치라고 말하며 짓던 표정과 같았다.
“제 친구가 이렇습니다, 부인. 대공 전하의 앞날이 심히 걱정되시겠지만 그래도 할 때는 하는 애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가 알아서 하시겠죠…. 오라버니의 복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엘라는 다른 의미로 열이 올랐다. 자신은 베르에티와 그의 약혼자를 보고 정말 심각해졌는데 말이다.
자신이 보아 왔던 사랑이란 바로 저런 형태였다. 하일모라도, 지엘라도, 심지어 아버지조차 사랑 앞에서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체드란을 보면 그들과 같은 방향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엘라는 점점 고민이 깊어졌다.
“일단 나엘라.”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답답함에 하일모라가 나엘라를 제지했다.
“너는 먼저 네 감정부터 알아야 해. 대공 전하의 감정보단 그게 먼저라고 본다.”
“왜?”
“대공 전하한테 뭐라 말할 건데? 가서 ‘날 좋아해요?’라고 묻기라도 할 거야? 만일 대공 전하가 맞다 그러면? 너는 같은 마음이 맞아?”
나엘라는 답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리 어려운 문제가 또 있을까.
사랑이라는 건 단번에 깨달아야 하는 감정이 아닌가.
아직 알 수 없는 것만 보아도 자신은 체드란과 같은 마음이 아닌 걸까.
그제야 하일모라의 말이 이해되었다.
만약 그와 같은 마음이 아닐 경우 체드란은 상처받을 테니까.
그녀가 머리를 싸매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자 하일모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지엘라에게 작게 전했다.
“첫사랑이에요.”
“이해해요.”
그런 둘을 뒤로하고 나엘라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