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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19)화 (119/220)

118화

황제의 알현을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착잡한 얼굴로 걸었다. 급히 황궁을 빠져나가려 걸음을 재촉한 덕에 두 남자는 어느새 무시무시한 속도로 걷고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조차 범상치 않은 이들이 인상까지 쓰고 있으니 주변 이들이 황급히 멀어졌다. 그들은 마치 바닷길이 열리듯 인파를 가르고 지나갔다.

어느새 마차까지 다다른 둘은 단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하자 공작은 깊은 신음을 뱉었다.

“대체 황제 폐하는 무슨 생각이신지….”

체드란이라고 궁금하지 않을까, 그의 말에서도 짜증이 배어 있었다.

“아무래도 황후를 이대로 가만두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네요. 황후를 쳐내려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완벽히 쳐내기 위한 구실이 부족한 거 아니겠습니까.”

알현하러 황제를 찾은 두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명을 들었다. 당분간 반란군 조사를 보류하겠다는 소리를.

아직은 말이 돌진 않겠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으리라. 당장 내일이면 황제가 황후를 봐주려는 것이 아니냐고 소문이 퍼질 게 분명하다.

그럼 그녀의 세력은 힘을 얻을 것이고 다른 이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만약 황제가 그녀를 제대로 쳐내려 잠깐 풀어주는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다른 경우도 생각해 봐야 했다.

체드란이 황제의 의중을 셈하는 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가 들려왔다.

톡. 톡. 톡. 톡.

소리의 진원지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마차 창문턱을 두드리고 있는 손가락이 보였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공작이 손가락을 멈췄다.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 그냥…. 나엘라와 습관이 같으셔서 말입니다.”

그제야 제 손가락을 본 공작은 피식 웃었다.

“옛날엔 저랑 나엘라가 함께 손가락을 두드려 대서 다나한이 화를 낸 적도 있습니다. 둘 다 시끄러우니까 그만하라고요.”

“다나한 경이요?”

“예. 그래서 어디 감히 아버지께 대드냐고 야외 훈련 보냈습니다.”

체드란이 봤던 다나한은 차분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땐 또 다른 모양이다.

나엘라의 가족이 그래도 꽤 화목해서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사랑을 받아 봤으니 훗날 태어날 아이에게 사랑을 주지 않을까.

자신은 받아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주는 건지를 모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전해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어쩌다 생각이 그리 튀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황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다나한 경에게 준비하라 이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요?”

“예. 아무래도 황후가 제스라 왕국, 그리고 두칸과 손을 잡은 듯합니다.”

공작의 표정이 단숨에 심각해졌다.

“이번 일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황후에겐 제동 장치가 없습니다. 요반나와 손을 잡았다면 제스라 왕국이나 두칸은 어렵지 않겠지요.”

“흐음.”

“이건 나엘라의 생각입니다. 저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요.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를 묶어 놓을 수만 있다면 황후는 황제 하나만 상대하면 되니까요.”

“끝을 보려는 거군요.”

“예. 저희는 이번 일로 황후의 발목을 잡고 시간을 벌려고 했습니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준비할 시간이요.”

하지만 황제는 황후를 제지하지 않았고 그녀는 또다시 움직일 것이다. 남은 패가 별로 없을 그녀가 어떻게 움직일지 문제였다.

“황후라고 숨겨 둔 패가 더 없겠습니까.”

공작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황제의 속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늘 어려웠다.

“일단 다나한에게 일러두겠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있어 본격적인 준비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대비는 시작해야지요.”

“노헤스카도 대비할 예정입니다. 쌓아 놨던 영지금을 풀고 본격적으로 움직이려 합니다.”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명분을 만들어야지요.”

노헤스카가 본격적으로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명분이 있으면 그만이었다.

“당분간은 또 바쁘겠군요.”

안 바쁜 날이 없었는데 말이다.

공작은 먼저 가 버린 제 안사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그리 빨리 가야만 했는지 야속하기만 했다.

모든 일의 시작은 그때부터였을까.

“단제의 나이가 대공 전하보다 세 살 많으신 건 아십니까.”

체드란은 갑작스러운 말에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은 마차 창문 너머 잡을 수 없는 어딘가를 바라보듯 흐린 시선이었다.

“단제가 칼을 잡기 시작했을 때 마호세르디에 천재가 태어났다 다들 수군거렸지요.”

“알고 있습니다. 어렸던 저조차 단제 경의 이야기는 들었으니까요.”

“폐하께서는 어쩌면 질투가 나셨을지도 모르겠군요. 자신의 큰아들도 천재이길 바라셨을 수도 있고요.”

“설마 암살자들을 보낸 이유가 저를 강하게 키우려 그랬단 말씀입니까?”

“추측일 뿐입니다. 그야말로 삐뚤어진 생각이지요.”

“하.”

어이없음에 체드란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황제의 사고가 평범하지 않다고는 하나 암살자들 사이에서 강하게 크길 바랐다고?

체드란은 아예 생각을 접었다. 그저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남은 평생도 그리 생각하고 살 것이다.

“황제는 그렇다 치고, 황후는 어땠을 것 같습니까? 마호세르디에선 천재가 태어났고, 대공 전하께선 어린 나이에도 검술에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반해 페트론 황자는 특출난 것이 없었죠.”

“그녀의 생각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요즘 제 안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체드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공작의 말은 공작부인이 죽은 이유와 연관이 있다는 말이었다.

체드란이 요즘 그때의 일을 알아보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말해 주려는 듯했다.

“그즈음부터 황제 폐하께서 대놓고 황후를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내는 천재를 낳았는데 황후는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유독 황후의 자식들만 그랬다. 지엘라나 데테로아만 봐도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영민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런 와중에 페트론이나 파르로시는 특출난 것이 없으니 화살이 황후에게로 향한 모양이었다.

가장 비교당한 상대가 공작부인이었으니 황후의 분노는 그녀에게로 쏘아졌다.

“추악한 질투군요.”

연민도 동정도 없는 신랄한 평이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공작부인을 죽였다니. 체드란은 황후가 재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제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했을 겁니다. 결혼 전에는 출생과 태도로, 결혼 후에는 아이들로 손가락질받았을 테니까요.”

결혼을 하면 인생이 달라질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후는 결혼 후에도 자신을 휘감는 질투에 속절없이 끌려다녔다. 그 모든 원흉이 아이들이라 생각한 만큼 파르로시에게 그리 모질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할 테니까.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지요.”

“원죄를 말씀하시는군요.”

“황제와 황후를 보면 그 말이 이해가 됩니다. 그 죄를 뉘우치고 살 것인가, 평생을 악인으로 살 것인가. 인간은 결국 선택하며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것이다. 가장 더럽고 그 끝을 알지 못할 만큼 음습하며 내재한 모든 면이 추악한 사람들이라 여긴 것도 같은 결이다.

체드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신의 죄를 끌어안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황제와 황후의 선택은 결국 그들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들은 나락으로 떨어져서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할 겁니다.”

“악이 쌓여 독이 될 것입니다. 결국 제 목숨을 좀 먹어 갈 것을 평생 모른 채 살겠지요.”

나이가 드니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모양이라며 공작이 웃었다.

*

나엘라는 체드란이 보낸 한 통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편지를 내려놓고도 한참을 고민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장은 이들의 외출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하녀들과 하인들은 바쁘게 뛰어다녔고, 마차와 호위 기사들은 정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 아그노멘에서의 마지막 외출이나 다름이 없어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겠다는 말에 준비를 더욱 단단히 했다.

그 소란한 틈을 타 나엘라는 베르에티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약혼자가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바람에 베르에티가 진땀을 흘리는 중이라고 들었다.

나엘라를 알아본 하녀가 노크를 하자 안에서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곧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베르에티 곁에 착 붙어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어떻게 인사를 드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저는 마르틴 알레한드로라고 합니다.”

나엘라도 반갑게 그를 맞았다.

“반갑네. 나엘라 노헤스카라고 하네.”

마르틴은 베르에티와의 대화에서 결론을 내지 못했는지 성질 급하게 물었다.

“제가 나들이에 동행하면 불편하시겠습니까?”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은 사람에게 하기엔 성급한 질문이었다. 나엘라가 방문한 목적도 말하기 전이었다.

그래도 나엘라는 그런 그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아직 어리니 열정이 넘쳐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약혼녀가 좋지 않은 일을 겪었으니 붙어 있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갔다.

“그 전에 잠시 앉아도 되겠나.”

그제야 자신이 뭘 잊었는지를 깨달은 마르틴은 얼른 의자를 빼주며 나엘라를 에스코트했다.

자리에 앉은 나엘라는 아직 얼굴이 붉은 베르에티를 훑었다.

“안 그래도 이곳에 온 것은 영식 때문이네.”

베르에티가 결정하기엔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알았다. 동의 없이 찾아온 약혼자 때문에 다른 이들의 눈치도 보였을 터였다.

“영식이 당장 기사단을 때려치우겠다 말했다고 들었는데.”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싸우는 커플 때문에 본의 아니게 다들 듣고 말았다.

마르틴은 당장 기사단을 나와 베르에티의 옆에 붙어 있겠다고 했고, 그녀는 그런 마르틴을 말리느라 바빴다.

“애초에 기사단을 들어간 것도 영애를 지킬 남자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애가 위험에 빠지는 걸 몰랐다니,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영애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베르에티의 고개가 점점 바닥으로 향하는 건 아는지 마르틴은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 모습이 기꺼워 나엘라는 웃음이 나왔다.

“그건 두 사람이 결정할 사안이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겠군. 대신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하네.”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황도로 올라간 후에도 여기서 요양을 하는 것은 어떤가?”

“예?”

다른 이들은 내일 점심을 먹고 나면 수도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당연히 베르에티도 함께 갈 계획이었지만 나엘라는 다른 것을 권유했다.

“아무래도 베르에티 영애가 당장 수도로 올라가 이런저런 조사를 받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나. 그러니 며칠 정도 이곳에서 더 머물다 오는 것은 어떤가? 물론 영식도 함께 말일세.”

마르틴의 얼굴에 점점 함박웃음이 번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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