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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20)화 (120/220)

119화

나들이는 마르틴을 제외하고 여자 넷이 나왔다. 마르틴이 스스로 가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 남은 며칠 동안 실컷 데이트할 수 있다고 싱글벙글했다.

“저길 봐요! 화관을 그냥 나눠 주나 봐요!”

신나서 달려간 베르에티가 인원수에 맞게 화관을 받아 왔다. 꽃으로 유명한 곳이니만큼 첫날부터 화관이나 꽃장식들이 많이 보였는데, 여자든 남자든 하나씩 들고 있었다.

“나엘라 님은 보라색 꽃이에요!”

꽃을 둥글게 엮고 길게 늘어트린 화관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나엘라는 보라색, 하일모라는 흰색, 지엘라는 주황색, 베르에티는 노란색 화관을 쓰고는 신나게 웃었다.

그렇게 구경하는 도중 중앙 광장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댕, 댕, 댕, 맑은 소리가 퍼지자 사람들이 광장으로 향했다.

“시작하나 봐요!”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자 호위 기사들이 나엘라를 바라봤다. 인파가 몰리면 어쩔 수 없이 보안에 문제가 생긴다.

황후의 계략도 무시할 수 없으니 더욱 조심했었다. 그래서 이때까지 거리도 잘 안 돌아다녔다.

나엘라가 조금 떨어져 있는 호위 기사들을 바라본 뒤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놀자는 뜻임을 깨달은 베르에티는 신나서 방방 뛰었다.

“정말 괜찮겠어?”

하일모라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야. 황후는 아주 바쁘거든.”

씨익 웃는 미소가 떨떠름했으나 금세 지워 냈다. 어쨌든 축제를 제대로 즐기게 된 것 아닌가.

발을 동동 구르는 베르에티를 따라 하일모라도 들뜨기 시작했다.

“어? 벌써 춤추기 시작해요!”

지엘라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다 같이 광장으로 움직였다.

수많은 이들이 광장 무대에 올라가 악기를 연주하고 흥을 돋웠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는 노래인지 흥겨움이 넘쳤다.

베르에티가 춤추는 사람들을 파고들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잘 알지는 못해도 함께 부르고 싶은 모양이었다.

베르에티를 따라 하일모라도 들어가더니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한 춤을 췄다. 비록 파티에서 추는 춤은 아니지만 다 함께 발을 구르고 내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가만히 지켜보는 지엘라를 잡아끌고 나엘라도 합류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된 지엘라도 웃으며 춤을 췄다.

저 멀리서 호위 기사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것이 보였다. 기사 중 어떤 이는 귀족 영애인지 모를 아가씨에게 끌려가기도 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나엘라에게 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게 되지는 않았다.

“아그노멘엔 사랑이 필요한 남녀가 있답니다.”

너도나도 노래를 부르며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았다. 뒤늦게 돌기 시작한 지엘라는 박자를 못 맞춰 허둥댔다.

“꽃이 내리면 사랑이 찾아와요.”

노래에도 춤에도 익숙한 사람들과 달리 경험해 본 적이 없던 지엘라는 티가 날 만큼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엘라가 웃음이 터뜨렸다. 그녀가 이 정도로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본 탓이다.

하일모라와 베르에티가 다가와 먼저 시범을 보였다. 둘 다 처음 해 보는 것이 분명한데, 지엘라와는 달리 능숙히 춤을 추고 있었다.

“다 함께 사랑을 노래해요. 젊은 연인에게 축복을.”

파트너로 선 나엘라는 지엘라가 몸치라는 걸 믿을 수 없어 웃고 또 웃었다. 항상 완벽한 자세를 추구하기에 춤조차 잘 출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녀와 파티장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기본적인 왈츠는 잘 출지, 궁금해졌다.

“다 함께 사랑을 춤춰요. 오늘의 연인에게 축복을.”

시범을 보이던 하일모라와 베르에티도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난색을 보이던 지엘라조차 어느 순간 웃고 있었다.

춤을 추는 모두가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에게는 마지막 축젯날이지만 이 축제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될 것이다.

그때마다 이렇게 웃을 수 있길 나엘라는 바랐다.

*

한바탕 축제를 즐기고 저녁까지 먹은 뒤 귀가하려던 이들은 힘이 빠져 별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덕분에 마음 놓고 있던 사용인들은 다시 바삐 움직여야 했지만, 제일 신나게 놀던 베르에티가 항복을 선언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마르틴까지 참여한 저녁 식사는 여전히 즐겁기만 했다. 다들 와인을 한 잔씩 마셔 볼이 발그레했다.

어느새 식탁 위 음식이 모두 사라지고, 가벼운 안주들이 세팅되었다. 지엘라도 축제의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지 한두 잔 마시던 술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잠시 바람을 쐐야겠어요.”

식당과 연결된 테라스로 향하자 나엘라도 그 뒤를 따랐다.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연 지엘라가 아무렇지 않게 난간에 기댔다. 평소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유지하던 지엘라였기에 신기하게 다가왔다.

“여름이 다가오는 모양이에요. 벌써 바람이 따뜻해지기 시작했어요.”

나엘라의 말에도 지엘라는 말없이 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마치 따뜻해진 바람을 느껴 보려는 것처럼.

그런 지엘라를 바라보던 나엘라도 눈을 감았다.

“부인은 아무리 더워도 커피와 차는 따뜻한 걸 좋아합니다. 너무 차갑거나 단것은 먹지 않죠.”

지엘라의 눈동자가 천천히 떠졌다.

“음식은 잘 가리지 않지만, 향이 강한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매운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어느새 나엘라도 눈을 떴다. 자신을 직시하는 시선과 마주쳤다.

“냉정하게 굴려 하지만 의외로 다혈질이죠. 참는 법을 제대로 배웠는지 표정 연기를 잘합니다. 감정을 들키기 싫을 땐 무조건 무표정을 하고요.”

“꽤 많이 아시네요.”

“호불호가 확실해서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구분이 뚜렷하죠. 모르는 사람은 아예 관심도 없고요.”

나엘라가 살며시 웃자 지엘라도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면 저도 지엘라 부인을 좋아하는 걸까요?”

“오라버니에 대해 생각하라고 했더니만, 제 생각을 하셨나 봐요.”

“순서라는 게 있죠. 먼저 물으셨잖아요.”

그 말이 나쁘지 않은지 지엘라는 오라버니를 이겼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라버니에겐 미안하지만, 기분은 좋네요.”

“미안할 게 뭐 있나요. 체드란은 우리가 떠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저런, 아내를 혼자 두면 어떡한담.”

“그러니까 이건 모두 체드란의 죄입니다.”

오늘따라 웃음이 헤펐다. 가만히 나누는 이야기에도 자꾸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농담을 하며 바람을 맞았다.

그때 누군가 우다다다, 달려왔다.

“대체 언제까지 둘만 얘기할 거예요? 빨리 와요! 지금 마르틴이 베르에티 영애와/의(추가)/ 첫 키스 얘기할 거란 말이에요.”

이런, 절대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들어가죠.”

나엘라도 지엘라도 잠시 바람 쐬던 것을 끝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

다음 날, 마지막으로 다 함께 식사한 뒤 별장 앞에 모였다.

지엘라와 하일모라는 마차를 같이 타고 왔지만, 베르에티를 위해 남겨 두고 가기로 했다. 마르틴조차 급히 말을 타고 왔기에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나엘라의 마차를 타고 함께 움직이기로 했고, 이제 서로 작별인사를 건네야 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수도에 올라가자마자 찾아뵐게요!”

눈물을 글썽이는 베르에티를 뒤로하고 가야 하는 게 마음이 아픈지 하일모라가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제대로 못 챙겨 줘서 미안해요. 너무 고생 많았으니까 단 며칠이라도 푹 쉬고 와요.”

끝내 눈물을 터뜨리는 베르에티와 하일모라를 바라보고 있는데 가린이 나엘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전하자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두어라.”

“알겠습니다.”

곧이어 출발해야 한다는 기사들의 외침이 들리고서야 세 사람은 마차에 올랐다.

“영애, 주방장에게 식사를 잘 챙겨 달라 말했으니 꼬박꼬박 남기지 말고 먹어요.”

나엘라 또한 그녀다운 인사를 건네고는 마차에 올랐다.

얼마 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 밖으로 연신 손을 흔드는 베르에티가 보였다.

“며칠 뒤에 봐요!”

하일모라가 소리친 것이 들렸는지 베르에티는 소리 높여 대답했다.

“네! 수도에서 봐요!”

마차의 속도가 점차 높아졌다. 말을 타고 있던 기사가 마차로 다가와 위험하다며 창문을 닫아 주었다.

잠시 마차 안에 적막이 흘렀다. 이 작별 이후 다시 못 보는 것은 아니다. 단 며칠만 참으면 또 볼 수 있다.

과연 며칠일까, 어쩌면 조금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다시 만나리라는 거니까.

“미안해, 하일모라. 미안해요, 지엘라 부인.”

갑작스러운 나엘라의 사과에도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래도 영애가 무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베르에티를 이곳에 남겨 두고 가기로 한 것은 모두의 의견이었다.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 뒤를 책임질 사람은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라버니가 화를 내시겠네요.”

지엘라는 자신을 신경 쓰지 말라며 그리 웃었다.

체드란이 어젯밤 편지를 통해 단단히 경고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오히려 위험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두 사람이 이곳에 남았으면 좋겠어요.”

나엘라는 자신이 이들을 위험에 끌어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저만 아니었다면 이들은 안전한 곳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을 테니까.

어제처럼 서로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고, 차를 한 잔 마시고 꽃을 바라보는 그런 일상 말이다.

“거짓 위에 세워진 일상은 이제 충분합니다.”

지엘라는 단호히 말했다. 나엘라의 사과는 어제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라고,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책임도 스스로 지겠다 계속 말해 왔다.

“나엘라, 걱정하지 마. 나, 편한 신발도 신고 왔고 드레스 안에 바지도 입었어. 혹시 몰라서 온갖 걸 다 챙겼다니까?”

하일모라는 진짜라며 드레스까지 올려 보여 줬다. 연신 표정이 어둡던 나엘라도 그런 너스레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다 제가 안전하게 지켜 드릴 겁니다.”

결연한 그녀의 표정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을 스치는 꽃나무들을 보며 지엘라가 입을 열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와요.”

“좋아요! 자, 손가락 걸고 약속!”

하일모라가 제일 먼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다른 이들도 냉큼 손가락을 겹쳤다.

“약속….”

이후 어떤 일이 생길지 알고 있음에도 나엘라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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