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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21)화 (121/220)

120화

체드란은 서류에 사인하다가도 힐끗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나엘라가 수도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데리러 가고 싶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황후가 계략을 꾸미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체드란과 공작을 불러 시간을 끌려 했고, 황후를 따르는 귀족들도 온갖 딴지를 걸어왔다.

심지어 오늘 갑자기 열린 귀족 회의에서는 더 가관이었다. 황후 측 귀족들이 황후는 죄가 없다며 귀족 회의를 열어 달라고 하더니, 밝히라는 결백은 안 밝히고 공작과 체드란을 노렸다.

평상시에는 말도 못 걸던 이들이 단체로 오늘만 살 것처럼 물어뜯는데 듣는 다른 이들이 헛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어느 귀족은 공작에게 군사 경계 지역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냐며 군사 인력 계획표나 재무 상태를 보여 달라 요청하기도 했다. 회의에 부의장으로 참석했던 데테로아가 기가 막혀 제정신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군 평성표는 말 그대로 군사 기밀인 데다 그 대상이 국경을 지키는 가문인 이상 황족도 쉽게 요청할 수 없는 사안이다.

거기다 재무 상태는 매년 황제에게 보고되는 것인데 그걸 보여 달라 요구한다? 황권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황제가 제대로 확인했는지 믿지 못하겠으니 자신이 보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황제가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들 정녕 미친 언행이었다.

공작은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니 딱 그 꼴이라며 무시로 일관했고, 체드란은 질문이 날아오기도 전에 협박했다. 노헤스카 기사단을 영지에서 보고 싶으면 마음껏 말해 보라면서.

아까 귀족 회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져 체드란은 펜을 내려놓았다.

“다롱 경.”

한쪽에 서 있던 다롱이 가까이 다가오자 체드란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나엘라에게 편지는 전했나?”

“예, 오늘 아침에 돌아온 기사가 확실히 전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럼 됐네.”

편지에 적은 내용은 습격이 있을 거라는 정보였다. 서튼이 지붕에 매달려 들은 말이니 확실할 것이다.

황후는 남은 반란군과 사병들을 끌어모아 수도로 돌아오는 나엘라를 납치하려 했다. 습격이 있을 만한 장소들을 표시해 보냈으니 알아서 잘 피해 올 것이다.

이왕이면 아그노멘에 더 있다 왔으면 좋겠다고 써 놨지만 어디 말을 들을 위인인가.

귀족 회의에서 달려들던 이들도 다 같은 것을 노렸을 거다.

나엘라를 인질로 잡으면 두 가문은 움직이지 못한다. 지금의 구도를 단번에 뒤집을 기회나 마찬가지였으니 앞뒤 없이 구는 것도 이해는 했다.

더불어 공작과 체드란을 붙잡아 시간을 끌면 상대적으로 나엘라에게 신경 쓰지 못할 테니 말이다.

“내일은 내가 귀족 회의를 요청해야겠군.”

“어떤 사유로 요청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글쎄. 지금부터 고민해 봐야지. 고위 귀족 모욕죄 같은 것들을 살펴봐야겠군.”

아무리 그래도 엄연한 계급이 있거늘 황후의 사람들은 끝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과 다를 게 뭔가 싶다가도 덤빈 대가는 치러야 하는 법이었다.

그때 누군가 복도를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공 전하!”

집무실 문을 쾅 열고 들어온 자는 체드란 앞에 무릎 꿇고 급보를 전했다.

“대공비 전하와 지엘라 황녀님, 세레노피 백작 부인이 괴한에게 습격을 받고 납치되셨다고 합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자 다롱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체드란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도 그는 눈을 감고 신음을 흘렸다.

“나엘라….”

비록 자신이 늘 뒤에 있겠다 했지만, 이번엔 너무 큰 사고를 쳐 버렸다.

*

체드란은 각 잡힌 자세로 딱딱히 서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이번 일의 심각성을 알고 있어 잔뜩 긴장한 채였다.

“당장 노헤스카 대공령으로 가서 전시 체제에 돌입하라. 대공령 출입 제한을 높이고 교역은 생필품과 음식 제외, 나머지는 최소한으로 줄인다. 론체 경에게 당장 기사단을 출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이르고 사피오는 수도로 올라올 준비를 시킨다.”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바로 말에 올라 저택을 빠져나갔다.

대기하던 다른 이들에게 지시 사항을 내리려고 할 때였다. 아직 닫히지도 않은 대문을 뚫고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거리가 멀어 제대로 보이지 앓으나 모를 수 없었디.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 지금 찾아올 인물도 한 사람뿐이었다.

금세 거리를 좁혀 달려온 이들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잔뜩 화가 난 공작을 진정시키려 체드란은 가벼운 농을 건넸다.

“연세도 있으신데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지금 당장 출전하려다 참았습니다.”

“일단 서재로 가시지요.”

체드란과 공작을 따라 기사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사용인들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는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뛰듯이 2층으로 올라간 공작은 자신이 먼저 서재 문을 열었다. 체드란은 이 와중에도 의문이 들어 물었다.

“제 서재 위치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지요.”

아무리 마호세르디의 첩보 수준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속속들이 다 아는 티가 나지 않나. 이러다 부부싸움이라도 하게 되는 순간 어떻게 될지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체드란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본인이 말하고도 민망했는지 공작이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제니에게 들었습니다. 저택 구조 파악은 기본인지라….”

“그렇군요….”

공작과 마주 앉은 체드란은 언젠간 나엘라의 하녀들도 모두 제 편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어쨌든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공작께서도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눈치채셨을 겁니다. 나엘라가 습격당하는 걸 선택했습니다.”

“허….”

“노헤스카에게 명분을 만들어 주려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노헤스카에서 반란군을 발견하고 소탕했지만 어쨌든 기본 권한은 황제에게 있습니다. 노헤스카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상태이지요.”

반란은 중요한 문제나 결국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다. 노헤스카 대공이라 한들 그의 주요 임무는 국경의 수호와 영지 관리다. 황후를 몰아붙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나엘라가 연관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본격적으로 개입할 명분이 생긴다.

“그뿐만이 아닐 겁니다. 받은 건 꼭 되돌려 줘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니까요.”

“대공령에서의 납치 사건을 갚으려는 속셈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공작이 침을 삼켰다. 표정이 점점 착잡해지는 게 보통 큰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수도에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소문 말입니까? 나엘라의 납치 사건이 소문으로 퍼지기엔 아직 이를 텐데요?”

“하지만 퍼지고 있다는 게 문제지요. 벌써 수도 사람들이 동요하는 모양입니다. 어디서 흘러나간 정보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거기까지 말한 공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확인을 못 했을 뿐 알 듯하다는 눈치였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생각하던 체드란은 문득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엘라의 하녀들이군요.”

나엘라가 일을 벌이자마자 단숨에 상황을 몰아가려 하는 것이다. 소문이 퍼져 백성들이 불안해한다면 대응도 급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문의 내용이 범상치 않습니다.”

체드란은 또다시 불안이 밀려왔다.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황제가 황후의 죄를 덮어 주려다, 결과적으로 대공비와 황녀까지 납치됐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맙소사…. 체드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황제를 제대로 겨냥한 것이다.

“황제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움직이게 만들겠다는 뜻이군요.”

“지엘라 황녀님과 함께 움직인 이유도 그것일 겁니다. 황녀님이 연루되었으니 황실은 무조건 움직여야 할 테니까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파르로시 때도 근위대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다릅니다. 수도 한가운데서 소문이 도는 마당에 황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요. 가라앉긴커녕 더욱 부풀려질 겁니다.”

“황제가 제대로 한 방 맞았군요….”

“그렇게 기쁘진 않네요.”

황제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나엘라가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대놓고 황제를 겨냥해 움직였지.

“대공비, 황녀, 거기다 백작 부인까지 납치되었으니 보통 큰일이 아닙니다.”

“제국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지요. 다만 나엘라가 왜 하일모라까지 데리고 움직였는지를 모르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베르에티 영애는 없는 것을 보니 일부러 아그노멘에 남겨 둔 것 같은데요.”

둘 사이에 잠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엘라의 생각을 정확히는 모르더라도 가닥은 알아야 대비해 움직일 텐데 말이다.

지엘라는 황제를 겨냥했다지만 하일모라는 왜일까.

“혹 황후에게서 등을 돌릴 만한 명분을 만들 생각인 건 아닐까요.”

체드란의 말에 공작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외적으로 하일모라는 황후의 사람이라 알려져 있다. 이번 납치 사건의 피해자가 되면 황후나 파르로시의 짓으로 밝혀졌을 때 명분이 생긴다.

하일모라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니 등을 돌려도 의심받지 않으리라. 그럼 이후 나엘라와 함께 행동해도 하일모라가 먼저 배신했다는 손가락질도 피할 수 있었다.

“세레노피 백작이 문제긴 하지만 그가 알아서 할 겁니다.”

아내가 황후에게 습격을 받았는데 계속 황후의 사람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후의 문제는 노헤스카나 마호세르디에서 도와주면 그만이었다.

“일단 소문을 퍼트리고 있을 하녀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은 나엘라의 계획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건 마호세르디에서 맡겠습니다.”

“노헤스카는 전시 체제라 공표하겠습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마호세르디 공작령에도 급보를 보내 놨습니다.”

오늘 귀족 회의에서 이들을 공격했던 귀족들이 제일 첫 대상이 될 것이다. 직접 적대감을 보였으니 범인으로 몰아붙여도 다들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황후의 세력들을 잘라내는 것도 동시에 해치울 생각이었다.

“황후는 자신이 의심받는 상황에 또 움직였겠냐며 배짱을 부릴 겁니다. 거기다 들키면 파르로시에게 뒤집어씌우려 할 테죠.”

서튼에게 들었던 말 중에는 황후가 따로 명령한 것도 있었다.

“빠져나가지 못할 증거도 찾아야겠군요.”

그때 다급한 발소리에 뒤이어 누군가 급히 들어왔다.

“톨레로 상단에서 온 밀서입니다. 파르로시 황녀의 이름으로 톨레로 상단에 용병들을 요청했답니다.”

공작과 체드란의 시선이 동시에 부딪혔다.

“아무래도 서튼에게 한 말을 번복해야겠군요.”

서튼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했으나 이제는 물어야 할 때가 왔다. 그에게 나엘라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물어야 했다.

황후가 톨레로 사람들을 움직일 때 톨레로 측에 나엘라가 도움을 청할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당장 가서 서튼을 불러와라.”

“예!”

기사가 뛰어나가자 체드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엘라가 이번엔 일을 벌여도 너무 크게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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