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서튼은 체드란이 시킨 감시 임무 후에 아그노멘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수도에 머물렀다.
어쩌다 보니 톨레로 상단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노헤스카 저택에 머무르고 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꼬박꼬박 월급은 받는데 원래 소속이 아닌 곳에 있다 보니 일을 시키는 사람도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꿀보직이 아닌가.
나엘라가 아주 천천히 돌아오길 바라며 연무장에서 조금 떨어진 화단에 누워 있었다.
날이 조금씩 저물고 어두워지려 하기에 슬슬 저녁이나 먹을까 일어나던 중 다급히 뛰어가는 기사들이 보였다.
“응? 무슨 일 있나?”
호기심이라면 뒤처지지 않는 서튼은 바로 걸음을 옮겼다. 궁금증을 채워 줄 만한 사람을 찾아 나섰다.
이게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것 같아도 은근히 어려운 일이었다. 대놓고 알아내려는 티를 내선 안 되고 어쩌다, 우연히, 정말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콕 찔러 봐야 한다.
아까 달려갔던 기사들을 슬쩍 둘러보니 보고하러 들어간 기사를 제외하고는 다들 1층에 대기 중이었다.
“오늘 저녁은 뭐가 나오려나.”
여유로운 말투로 서 있는 기사들과 조금 떨어져 걸어가던 서튼은 그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낌새가 있을 때 우연히 마주친 척 눈을 똥그랗게 뜨고 다가갔다.
“아니, 아그노멘에서 봤던 기사님들 아닙니까?”
반란군 소탕 작전 때 함께해 안면이 있는지라 기사들도 반감 없는 태도로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아, 자네였군. 서튼이라고 했나?”
“예. 그때 체드란 님께서 시킨 일을 하느라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갔었네요.”
‘체드란 님’이라 부르며 친분을 과시하고, 따로 시킨 일이 있다는 걸 언급해 신임이 두터운 자라는 것을 슬쩍 내비치는 건 기본이었다.
“그래, 이제 기억나는군. 대공 전하께서 다롱 부단장님과 따로 시키실 일이 있다고 했었지.”
마침 그 장면을 본 이가 있어 다행이었다. 물론 서튼은 이들 중 한 명은 무조건 봤을 거라 믿었다.
당시 체드란과 함께 움직였던 이들은 대부분 노헤스카의 기사들이었으니까.
“예. 임무를 마치고 저택에서 쉬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사님들은 대공비 전하와 함께 올라오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공비 전하는 어디 가셨습니까?”
서튼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옳거니! 나엘라 님이 또 사고를 치신 게 분명하다. 이번엔 무슨 사고를 치셨을지 기대가 되었다.
“아이고, 제가 괜한 것을 물었나 봅니다.”
“아니네. 어차피 곧 명령이 떨어질 테니 그대도 알고 있는 게 낫겠지.”
서튼은 가슴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호세르디였다면 대화가 이어지긴커녕 애초에 내쫓겼을 텐데 다행히 노헤스카는 아직 사람다운 면이 남아 있었다.
아니지, 마호세르디가 피도 눈물도 없는 거다. 그게 다 보안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나엘라 때문이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습격을 당하셨네. 지금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일세.”
습격? 서튼은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습격이라기엔 기사들의 복장이 너무 깨끗했다.
“말도 안 됩니다! 노헤스카의 기사님들이 호위하셨을 것 아닙니까?”
“후…. 그게 사실 대공비 전하께서 타신 마차 바퀴가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네. 근처 마을에서 수리를 받으려 했지만, 기사단이 전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라 대공비 전하께서 일행을 둘로 나눴지.”
“예?? 바퀴가 부러져요?”
“그렇네. 이상한 일이야. 분명 전날에 다 확인했었는데 말이지.”
서튼은 수상한 냄새가 났다.
분명 출발 직전에 극성맞은 지안이나 다른 이들이 다시 한번 확인했을 게 분명한데 바퀴가 부러졌다?
무엇보다 이런 시기에 나엘라가 호위 인원을 둘로 나눴다?
이건 분명히 나엘라가 일부러 한 짓이 확실했다.
“일단 그대도 그리 알고 준비하고 있게. 내 생각에는 곧 수색 명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네.”
“알겠습니다. 빨리 저녁을 먹어야겠군요.”
서튼은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숙인 채 그들과 멀어졌다.
나엘라가 작정하고 일을 벌였다면 수색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는 수색이 아니라 나엘라가 벌인 이유에 대해 추측해 봐야 목적지가 나왔다.
“어쨌든 밥은 빨리 먹어야겠네.”
뭐가 됐든 곧 움직여야 할 테니 밥은 필수였다.
서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식당으로 향했다.
*
“데려왔습니다.”
문밖에서 들린 소리에 체드란은 안으로 들라고 전했다.
문이 열리고 등장한 이는 입술에 번들거리는 고깃기름을 묻히고 부푼 배를 내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방금까지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들어오던 이는 체드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공작을 보고 발걸음을 딱 멈췄다.
“서튼이 그대였나?”
서튼보다 먼저 아는 척을 한 사람은 공작이었다.
“흔치 않은 이름이라 설마 했지만 정말 그대인 줄 몰랐군.”
서튼은 나엘라의 기사단이었으니 공작과도 안면이 있었다. 체드란은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서튼과 아는 사이셨군요.”
“알다마다. 내게 추가 수당을 가장 많이 뜯어 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공작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서튼은 멋쩍게 인사를 전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을 것 같나? 그대가 보낸 청구서가 아직도 내 책상 위에 쌓여 있네.”
“나엘라 님이 공작님께 청구하라 했습니다.”
자신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짓는 서튼의 모습은 꽤 얄미웠다.
“그래서 이제 얼마나 모았나? 얼추 금액이 됐을 것 같은데.”
“이제 곧입니다. 땅 주인이 얼마 전 값을 또 올리는 바람에 조금 모자라져서요.”
“그러게 그 땅은 내가 사 준다 그러지 않았나. 하여튼 하나같이 고집들은.”
어색하게 웃는 서튼과 공작 사이엔 체드란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서튼이 돈을 밝힌다는 점과 나이가 들지 않는 조카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서튼이 땅을 사려고 하는 겁니까?”
체드란은 조카 장난감을 사 준다고 들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는데 이제 보니 땅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궁금증은 서튼 대신 공작이 풀어주었다.
“고향 땅입니다. 제 누나와 조카의 묘지를 그곳으로 옮기려 하는 거지요.”
“아….”
그렇게 겪어 보고도 체드란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나엘라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사연을 가졌단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그래서 서튼은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체드란은 공작에게 톨레로 상단에 관해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곤 그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중간에 마호세르디를 털어 다나한 경에게 걸렸다는 이야기는 빼놓고.
서튼에 관한 이야기까지 모두 들은 공작은 얼마 고민하지도 않았다.
“나엘라는 톨레로가 대공 전하의 것이란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서튼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신나서 나엘라에게 자랑했을 모습이 훤하군요.”
나엘라를 아끼는 만큼 공작은 그녀의 기사단도 유의 깊게 봐 왔다. 딸과 관련된 사람들 중 혹시나 나쁜 놈은 없는지 신중하게 살폈다.
그중 서튼이 가장 요주의 인물이었지만 속사정을 알고는 많이 아끼던 자 중 하나였다.
“서튼, 그대에게 묻겠네. 나엘라가 모두 알고 있는가?”
체드란의 물음에 서튼은 당장 아니라며 도리질 쳤다.
“저는 나엘라 님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게 거짓말이라는데 서튼의 이번 달 수당을 걸겠습니다.”
“아니, 공작님께서 왜 멋대로 남의 수당을 걸고 그러십니까?”
“저 녀석은 제가 뭐라 하는 것도 죄다 나엘라에게 말하는 녀석입니다. 입이 가볍기로 따지면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공작의 말마따나 나엘라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톨레로 상단을 수도에서 내내 밀어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파르로시가 요청한 용병들과 함께 코더도 함께 보내야겠습니다. 상단 소속 기사들도 함께 가야겠군요.”
“아직 그 목적을 알 수 없으니 걱정이군요.”
“다른 곳에 보내는 인원인지 나엘라의 납치를 위한 추가 인원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코더를 보내야 합니다.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나엘라의 하녀들을 찾으러는 서튼을 보내실 겁니까?”
“아무래도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서튼이 고개를 번쩍 들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어딜 간다고요?”
아무래도 이번 일에 대한 추가 수당은 체드란이 줘야 할 것 같았다.
“지안이나 다른 이들을 찾아야 하네. 아마 수도에서 소문을 퍼트리고 있을 걸세.”
“나엘라 님이 납치당했고 누군가 소문을 퍼트리려 한다면 가린이나 제니일 겁니다.”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하네. 그 외는?”
“그 외요?”
“나엘라의 기사단, 그대가 소속되어 있던 기사단이 수도에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갔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냔 말일세.”
나엘라는 분명 자신의 기사단이 수도에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했으니 그들 중에는 소문을 담당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엘라가 노헤스카에 있을 때도 수도에서 소문이 빠르게 돌지 않았던가.
가린이나 제니 중 누가 됐든 그자를 찾아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음… 그게…….”
서튼의 눈동자가 또다시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위치는 말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서로 공유도 하지 않고요.”
서튼이 이를 어쩌냐며 난색을 보이자 공작이 초를 쳤다.
“서로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나엘라의 기사단은 나엘라에게만 보고하기 때문에 저도 위치는 모르지만, 서튼이라면 알 겁니다.”
겨우 거절한 것을 공작이 단번에 튕겨 내자 서튼은 자신에게 왜 그러냐며 울상을 지었다.
“공작님은 나엘라 님 편 아니었습니까? 그걸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천방지축 딸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위에게 이 정도도 못 하겠나? 미안해서 그렇지.”
자진해서 납치까지 당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냐며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서튼만 보내면 다른 이들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을 겁니다. 나엘라의 계획을 들었다면 더더욱이요.”
“그럼 제가 가야겠군요. 서튼과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그들은 무력으로 절대 입을 열 자들이 아닙니다. 상황을 이해해야만 이야기를 해 줄 겁니다.”
“대충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것 같습니다.”
나엘라를 아껴 그녀의 말만 듣는 자들이라면 오히려 쉬웠다.
체드란은 얼른 그들을 찾고 상황을 정리할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님께 잠시 노헤스카 기사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는 서튼과 단둘이 움직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괜한 것을 물었습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체드란이었다.
공작은 잘 다녀오라며 그들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