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가장 바빴던 저녁 시간이 지나자 거리의 가게들은 하루 마감을 준비했다.
특히, 귀족들이 많이 찾는 상업지구는 평민들의 거리보다 마감이 더 빠르다. 대부분의 귀족은 오후에 볼일을 처리하고는 일찍 귀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외는 오직 유흥가뿐이었다.
“어머나, 귀한 손님이시네─.”
“이리로 오세요. 오늘 저랑 함께 머물다 가는 건 어떠세요?”
유흥가가 밀집된 거리엔 어디서든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고 어두운 조명들이 깔려 있었다. 남녀의 웃음소리와 음주가무에 취한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러한 길을 빠르게 지나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수상쩍은 행색이지만, 애초에 얼굴을 가리고 찾는 이가 많기에 눈에 띄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이 입고 있는 로브는 딱 보아도 귀족들이 입을 법한 고급스런 재질이었다. 몇몇 이들이 흥미롭게 보았으나 그 궁금증도 지나가는 손님에 홀려 오래가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에 오셨잖아요!”
그런 이들을 지나 걷다 보니 어느새 유흥가에서도 구석진 곳에 자리한 가게들이 나왔다. 너무 안쪽에 있어 손님의 발길조차 닿지 않는, 싸구려 술에 헤어진 간판이 즐비한 그런 곳이었다.
인적이 드문 만큼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이 적었고 가게들 사이에는 쓰레기도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더러운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무리가 있었다. 지나가라는 듯 한쪽으로 비켜서려는 그들을 고급스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막아섰다.
“제니, 아니면 가린일 거라 생각했는데 진짜 가린이네.”
두 사람 중 서튼이 로브를 벗으며 씨익 웃었다. 그러자 거리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채앵─ 챙─
무리가 모두 칼을 꺼내어 서튼을 겨눴다.
“으악! 왜 이래?”
“서튼….”
눈을 가늘게 뜬 가린이 서튼과 함께 온 일행을 흘깃 눈짓했다. 알아채고 싶지 않은데 체구가 보통 사람보다 크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서튼이 기어코 입을 나불댄 것이 분명했다.
“언젠간 배신할 것 같긴 했어. 당장 죽여 버리자.”
이것은 가린이 받던 취급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지안이 그녀에게 첩자라고 놀린 것과 절대, 관련이 없다.
“잠깐! 미아, 오언, 말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진짜 이러기야?”
함께 있던 다른 이들의 입에서 한숨 섞인 반응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언제든 입조심하라고 했잖아.”
“제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수상하다고 말했잖습니까. 이참에 기사단 운영비나 줄이죠.”
“공작님의 걱정이 덜어지겠네요.”
분명 함께 위험한 일을 수없이 겪은 기사단원들인데 이들에겐 끈끈한 전우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야! 공작님이 보내서 온 거거든?”
“주군은 나엘라 님이야.”
“잘 생각해 봐. 실제로 우리에게 돈을 주는 고용주가 누구야? 바로 공작님이시라고!”
분위기가 풀어질 생각을 안 하자 가만있던 체드란이 결국 나설 수밖에 없었다.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군.”
그가 후드를 벗고 인사를 건네자 가린도 검을 내려야 했다.
“며칠 만에 뵙습니다, 대공 전하.”
가린의 인사에 다른 이들도 검을 내렸다. 검집에 다시 검을 넣으면서도 서튼을 향한 질타의 눈초리는 거두지 않았다.
“이곳에서 얘기하기는 힘들겠군. 장소를 옮기지.”
체드란과 서튼이 다시 로브를 눌러쓰고 걸음을 옮겼다.
*
“그래서, 나엘라는 지금 어딨지?”
가장 심성이 여린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만난 체드란은 느낌이 완전 달랐다.
다들 체드란이 은신처로 사용하는 건물에 들어와 있었는데 분명 상대는 한 명이거늘 취조하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가린이 딱 잘라 잡아떼자 체드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제가 명령받은 내용은 수도에 올라가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답니다.”
“그럼 다른 이들은?”
“여기 있는 이들은 소문 퍼트리는 것을 도와줬을 뿐입니다.”
“지안이나 제니는?”
“나엘라 님을 뒤쫓아갔습니다.”
“나엘라는 목적지를 예상했을 텐데?”
“저는 들은 것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똑 부러지다 못해 한 치의 틈도 없는 대답에 체드란의 인상이 펴질 줄 몰랐다.
가운데서 눈치만 보던 서튼이 옆에 앉은 남자들을 찔러 봤지만 싸늘한 눈길만 돌아왔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데 다들 답 없이 구니 서튼의 속만 터져 나갔다.
“하. 제 주인을 닮아 쉽지 않기는 똑같군.”
체드란은 이들을 만나기까지 그래도 조금 쉽게 가길 바랐다.
하지만 역시나 나엘라와 관련되어서는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대들은 나엘라가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아는가?”
가린은 답이 없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기사로서는 충분히 높게 평가되는 성정이다.
다른 이들처럼 충언을 올리거나 수를 놓아 길을 잡는 것은 기사의 덕목이 아니다. 오직 주인을 믿고 따르는 것, 그것이 가장 높은 덕목이었다.
그러나 체드란이 아는 나엘라는 그런 행동을 달가워하는 이가 아니다.
그리고 나엘라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잘못된 길을 가면 주저 없이 손을 내밀 자들이었다.
“단순히 납치된 그녀를 구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는 경향이 있어. 자신이 고생하면 주변이 안전하니까. 하지만 나는 그걸 더는 두고 볼 생각이 없네.”
그녀에게 약속한 것은 지키되, 그녀가 위험한 길을 선택하는 것은 두고 보지 않을 생각이다.
나엘라는 다른 이의 안전에는 예민하게 굴면서 정작 본인의 안전에 대해선 둔감했다.
“황후가 나엘라를 납치했다면 절대 쉽게 보내 줄 리 없다. 아무리 나엘라라도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거야.”
그런데도 가린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로 체드란은 깨달았다.
분명 나엘라가 빠져나가는 상황까지 계획을 짠 것이다. 가린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그 이유밖에 없었다.
“좋네. 그럼 하나만 묻지.”
체드란이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기댔다.
“나엘라가 왜 내게 말하지 말라던가.”
상식적으로 가린이 당장 찾았어야 하는 곳은 저들이 아닌 체드란이 있는 곳이었다. 하나, 체드란과 만나기까지 했음에도 아무 말도 없다는 건 함구령이 내려진 것일 터.
“대공 전하께서 잔소리가 너무 많으시다고….”
“……솔직하군.”
체드란의 표정이 착잡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가린은 괜히 눈치를 보았다.
“알겠네. 하나만 묻기로 했으니 더 묻지 않겠네.”
체드란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단호한 말에 당황한 것은 다른 이들이었다. 정말 이대로 끝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들 눈만 멀뚱멀뚱 뜨고 바라볼 때 체드란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이들이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났다. 저건 분명 수신호였다.
대비를 하기도 전에 무엇에 대한 수신호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우르르 들어온 톨레로 상단의 호위 기사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하나만 묻는다고 했지 보내 준다곤 안 했네.”
씨익 짓는 체드란의 미소가 언뜻 나엘라와 비슷해 보였다.
“지금부터 말한 사람만 나갈 수 있네. 말하기 싫으면 그냥 여기서 편히 지내다 가고.”
얼이 빠진 가린의 표정이 우습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서튼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는요?”
“그대도 마찬가지네.”
“저는 아는 게 없는데요?”
“같은 기사단 아닌가? 운명 공동체라고 생각하게. 나가고 싶으면 친구들을 잘 다독여 보고.”
그의 말이 꽤 충격이었을까, 가린과 함께 있던 이들 중 가장 체구가 작고 귀엽게 생긴 여자가 서튼을 따라 손을 들었다.
“저는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요? 무단결근하면 잘려요!”
발언한 이는 살롱 중에서도 손에 꼽게 큰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곳이 소문과 밀접하여 계획에 꼭 필요한 직장이었다.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해야지. 아니면 내게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하든가.”
이건 뭐 깡패나 다름없었다. 뻔히 나엘라의 사람들인 걸 알면서도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천천히들 생각하게. 나는 오래 기다려 줄 수 없지만 말이네.”
나엘라에게 좋은 것을 많이 배운 체드란은 착실히 써먹고 있었다.
*
저택으로 돌아온 체드란의 뒤에는 나갈 때보다 사람이 늘어 있었다. 서튼과 함께 끌려온 가린이었다.
“음? 가린 아닌가.”
공작은 가린의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운지 몰랐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녀 대신 대답한 체드란은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 앉았다. 저야 만족할 만한 소득을 얻었지만 눈 뜨고 코 베인 가린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나엘라의 계획에 대해 대충 알았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가장 원하던 정보가 그것이었던 만큼 공작은 다급히 자리에 앉아 이야기 들을 자세를 취했다.
“정확히는 무모한 도전과 무계획의 합작품이었습니다.”
공작은 잠시 말을 잃었다.
‘무모한’과 ‘무계획’만큼 나엘라와 안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체드란의 표현이 신랄한 건지 아니면 나엘라가 이성을 잃고 일을 저지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시지요.”
“예. 나엘라가 처음 제 편지를 받았을 때 우리가 예상한 대로 생각했답니다. 이대로 습격을 받으면 노헤스카와 마호세르디의 개입 명분이 생기는 동시에 황제에게도 한 방 먹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의문이 생겼답니다.”
“무슨 의문 말입니까?”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황후가 왜 자신이 가진 패들을 다 쓰지 않는지요.”
“숨겨 둔 패 말입니까? 그게 반란군과 타국들의 협조 아니었습니까? 더 있을 수도 있으나 그만큼 큰 건 없을 텐데요.”
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나엘라가 생각한 것은 숨겨 둔 패가 아닌 이미 알려진 패에 대해서였다.
“황후는 동부의 루부스 후작가, 북부의 해상 제독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에 의문을 가진 겁니다. 왜 두 가문을 사용하지 않는지.”
“루부스 후작가는 베르에티 영애를 이용했고, 해상 제독은 요반나 사람들을 숨기는데 사용한 것 아닙니까? 아무래도 각각 동쪽과 북쪽을 지키는 가문이니 확실하지 않은 일에 주도적으로 써먹기엔 감당할 수 없는 패지요.”
“하지만 군사력으로 그나마 제일 좋은 가문들 아닙니까. 아무런 도움도 요청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입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문질렀다. 나엘라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데 굳이 군사력이 좋은 곳을 두고 다른 곳을 이용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답니다. 왜 황제는 황후를 그냥 두는가. 어쩌면 본인이 원할 때 당장이라도 제지할 수 있는 패가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 패는 무엇인가.”
이야기만 들어도 공작은 머리가 아파 왔다. 분명 제 자식인데도 나엘라의 생각을 따라가기에 벅찰 때가 많았다.
“그래서 위험에 뛰어들었답니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체드란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북부의 해상 제독과 담판을 짓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