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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24)화 (124/220)

123화

쿵─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에 나엘라는 번쩍 눈을 떴다. 아직도 수면향의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호위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면 소란이 일 테니 다른 방법을 쓰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수면향일 줄이야.

마차를 수리하는 동안 잠시 쉬러 들어간 여관방에서 정체불명의 냄새가 났고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의식을 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해독제나 챙겨 올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잘 안 움직여지는 머리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이들이 보였다. 함께 여관방에 들어갔던 지엘라와 하일모라였다. 다행히도 두 사람 모두 의식이 없는 것을 빼고는 멀쩡해 보였다.

가장 중요했던 이들의 안전을 확인한 나엘라는 주변을 확인했다. 바닥에서부터 주기적으로 울리는 진동이나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로 보아 평범한 짐마차인 듯했다.

다만 잠겨 있을 게 분명할 꽉 닫힌 문과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꽤 다수였다.

빠르게 달리는 탓인지 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워도 대충 30명 안팎으로 들렸다. 짐마차 하나를 호위하기에는 많은 수였다.

다른 이들의 눈에도 필시 이상해 보일 텐데 별 소란이 없었던 모양이다. 수상해 보이지 않을 다른 방법을 취했을 거란 생각까지 하고는 욱신거리는 몸을 다시 뉘었다.

“이상하네….”

나엘라는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 볼 것도 없는 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납치범은 그들의 손발도 묶어 놓지 않았다. 누가 보면 나엘라의 일행을 쉽게 보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밖을 지키는 인원이 과하게 많았다.

오히려 나엘라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는 추측도 들었다. 함께 있는 다른 이들 때문에 도망가지 않으리라 판단했다는 예감이 스쳤다.

거기까지 판단을 거슬러 오르던 나엘라는 고개를 짤짤 털어 생각을 지워 냈다. 속단은 언제나 금물이었다.

“으음….”

지엘라의 신음에 나엘라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간 현기증이 돌아 몸이 흔들렸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훨씬 나았다.

“지엘라 부인, 괜찮으신가요?”

어느 정도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에 이들의 동행을 허락했지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후회가 일었다.

“여기는….”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지 초점이 흐렸다. 대체 얼마나 강한 수면향을 쓴 건지 욕지기가 밀려왔다.

“마차 안입니다. 납치된 거 같아요.”

지엘라는 연신 눈을 깜박거리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디로….”

끝맺음이 없는 말이었음에도 알아들은 나엘라는 마차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아주 작은 틈 사이로 눈을 붙이며 바깥을 확인하려 했다.

“나무나 풀의 종류, 지형을 보면 대충 알 수 있을 겁니다.”

나엘라는 밖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흔들리는 바깥으로 보이는 건 온통 풀과 나무, 정체 모를 돌뿐이었다.

그사이 정신을 좀 차렸는지 지엘라가 몸을 일으켰다. 손으로 어지러운 머리를 짚은 채 인상을 썼다.

“어딘지 아시겠어요?”

한참을 더 주의 깊게 보던 나엘라는 멋쩍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전혀 모르겠네요.”

“풋.”

넘쳐 나던 자신감과 다르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 웃겼던 걸까, 지엘라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공비께서 예상했던 대로 북부로 향하는 거면 좋겠네요.”

“아니라면 탈출을 강행하면 되고, 맞다면 탈출은 힘들겠지만 목적은 이뤘겠네요.”

북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뒤따라오는 지안과 제니가 탈출할 기회를 만들 테고 아니라면 계속 이동이 이루어질 것이다.

뭐가 됐든 마차가 멈춰 봐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계속 머리가 아픈지 지엘라는 이마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하일모라가 걱정되는지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북부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일주일 정도는 걸릴 거예요.”

“그동안 계속 마차를 타고 이동할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나엘라의 예상이 맞다면 현재 황후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북부의 해상 제독밖에 없었다. 베르에티 역시 피해를 입었으니 루부스 후작에겐 부탁할 수 없을 테고,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고자 한다면 해상 제독뿐일 터였다.

계급이 높아 많은 수의 기사들, 짐마차 같은 것들의 이동 제약이 없는 황후의 사람.

또한, 이제껏 계속 협력해 와 황후가 무너지면 무조건 함께 끌려갈 사람.

반란군 사건 당시 요반나 사람들을 숨겨 줬을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

그런 이유로 만일 습격과 납치를 벌인다면 그 인물은 분명 해상 제독이리라 생각했다.

아예 나엘라가 모르는 인물들을 따지자니 국내엔 없다고 봐야 한다. 국외 사람이 그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려면 이동 제약이 걸리고, 아는 자들을 따지자니 지금 당장 황후에게 협력할 만한 이들이 없었다.

잔챙이 귀족들이야 잔챙이인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파르로시도 거기 있겠죠?”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로시도 북부에 있을 거다. 그녀를 숨기기에 그곳보다 제격인 곳이 없다. 황후가 다른 귀족들을 믿어 봐야 얼마나 믿겠는가.

반란을 전제로 협력 중이던 해상 제독밖에 없었다. 제독과 황후 본인의 목숨이 엮여 있으니 마음 놓고 부탁할 수 있었겠지.

“파르로시를 이용하려면 일단 그녀가 안전히 살아 있어야 해요. 거기다 납치해 온 우리를 적재적소에 인질로 써먹기 위해선 비밀 유지가 필수죠.”

또한 파르로시와 우리를 붙여 놔야 했다. 그래야 만약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파르로시의 짓으로 뒤집어씌울 수가 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주체 못 한 파르로시가 우리를 고문이라도 한다면 황후에게는 더 유리했다. 누가 보아도 파르로시가 분노로 벌인 일이 될 테니.

“해상 제독이나 황후나 발 뺄 준비를 모두 마쳐 놨을 겁니다. 북부로 향하지만, 해상 제독이 관여한 증거가 없다면 언제나 빠져나갈 수 있죠.”

“황후는 그렇게까지 머리 좋은 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이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게 이상하군요.”

지엘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황후는 이렇게 치밀하게 움직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비록 페트론 황자가 죽고 오랫동안 준비했다지만 그것은 분노로 버텨 낸 결과다. 지금껏 일으킨 일만 보아도 답은 나왔다.

“해상 제독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해요. 황후에게 또 다른 조력자가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나엘라가 예상하는 것만큼 해상 제독이 똑똑하다면 모든 실마리가 풀린다.

“해상 제독이 황제의 사람일 겁니다.”

그가 황제의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황후의 행동을 막을 수 있으리라.

그가 요반나 사람들의 입국을 막고, 제스라와 두칸을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에서 각각 막는다면 황후가 준비했던 것들은 물거품이 된다.

황제는 그런 수를 깔아 두어 황후를 풀어준 것이다. 언제든지 황후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으니까.

황후야 움직일 군사력을 모두 잃었다지만 황제에겐 황실근위대와 황도 방위군, 수비대 등 많은 군사력이 남아 있었다.

“마치 짐승몰이 같군요.”

나엘라도 전적으로 동감했다.

황제는 원하는 곳으로 사냥감이 움직이도록 몰이를 하고 있었다. 모든 판을 본인이 짰으나 사냥감이 스스로 나락을 향해 걷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목숨을 앗아 갈 것이다.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이죠. 가정만으로 도박을 하는 거니까요.”

해상 제독이 황제의 사람이라면 자신들을 죽도록 두지는 않을 거다. 대공비, 황녀, 신진 귀족의 아내까지 붙잡혀 있다. 우리를 죽게 두는 것은 황제에겐 손해가 컸다.

“만약 아니라면 역시 그냥 도망인가요?”

“그렇죠. 셋 다 말을 탈 줄 알아서 다행이에요.”

귀족의 필수 교양 중 하나가 승마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연약한 귀부인들이 얼마나 버텨 줄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한 곳에 숨을 수 있을 정도면 충분했다.

“대공비의 하녀들이 뒤따라오는 것도 모자라 은신처도 찾고 도피로도 탐색해야 하는데, 손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야 뭐, 오랜 훈련으로 단련되어 있습니다.”

“대공비도요?”

“그럼요. 단지 평탄한 과정은 아닐 거라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건 각오하고 왔으니 괜찮아요.”

처음 이 계획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함께 가겠다고 한 것은 지엘라였다.

다른 마차를 타고 가다 위험에 처할 뻔했다는 것만 연기해 달라며 나엘라가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고는 의외의 정보를 들려주었다.

‘해상 제독이라면 저도 몇 번 봤습니다. 요반나를 갈 때와 제국으로 돌아올 때요. 북부엔 황실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지름길이 있거든요.’

지름길? 나엘라는 거기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북부와 수도를 잇는 지름길은 쉽게 언급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그 길을 타고 북부가 반란군을 일으켜 쳐들어올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길이 있음에도 황제는 황후를 풀어 두었다는 건, 해상 제독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는 거다.

“그나저나 오라버니가 화가 많이 났겠네요.”

지엘라의 걱정스러운 말에 나엘라는 자꾸만 양심이 따끔거렸다.

체드란에게 습격에 대해 듣고 출발 전 지안에게 바퀴 고장에 관해 들었지만, 나엘라는 계획을 강행했다.

체드란은 체드란의 일이 있고 나엘라는 그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크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처음으로 제가 싹싹 빌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요. 이건 대공비께서 오라버니의 뒤통수를 친 겁니다.”

지엘라의 말이 왜 이렇게 신랄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지엘라 부인도 공범이에요.”

“대공비 혼자 위험을 자초하는 걸 막은 겁니다.”

아니, 이렇게 빠져나간다고?

세상에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다더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엘라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속고 속이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으… 머리야….”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엘라는 얼른 하일모라에게 다가갔다.

“하일모라, 괜찮아? 어디 다른 데 아픈 곳은 없어?”

“온… 온몸이 다 아파…. 바닥이… 딱딱해….”

다행히 멀쩡한 모양이었다.

평생 좋은 침대가 아니면 잠을 자 본 적 없을 아가씨이니 마차 바닥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두 사람은 하일모라가 정신을 차리도록 도왔다. 마차 안에 물 하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얼마 후 정신이 또렷해진 하일모라는 창문 하나 없는 마차를 둘러보더니 인상을 썼다.

“대체 지금이 몇 시야.”

“아까 틈으로 밖을 봤는데 해가 떠 있더라.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야.”

아그노멘에서 출발한 시간이 점심 이후였고, 마차 바퀴가 부서졌을 때가 한두 시간 정도 지났을 시점이었다. 그 뒤 수리를 위해 근처 마을로 방문했으니 아직 해가 떠 있다는 건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때, 마차 밖에서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여기서 쉬었다 간다!”

셋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벽에 귀를 붙였다.

“당번들은 점심 식사를 준비해라!”

세 사람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점심 식사?”

하일모라가 되뇌는 말에 나엘라는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하루가 지났다고?”

수면향을 제조한 놈이 어떤 놈인지 꼭 한번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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