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드르륵─ 덜컥.
마차 문이 열리자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햇빛에 세 사람은 눈을 찌푸렸다.
“전부 깨어났군.”
문을 연 남자는 평범한 상단 용병처럼 입고 있었지만, 옷 아래로 잘 단련된 체격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자마자 바깥 상황을 훑어본 나엘라는 이들이 해상 제독의 사람들임을 확신했다. 루부스 후작처럼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바닷가에서 강한 햇빛을 받으며 훈련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그대로 내비쳤다.
심지어 정식 기사들도 섞여 있는지 유독 걸음걸이나 행동에서 군더더기 없는 절제가 느껴지기도 했다.
“질문은 받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식사가 보급될 테니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있도록.”
남자의 고압적인 명령에 세 사람은 눈만 멀뚱멀뚱 떴다. 납치당한 귀부인들답지 않은 태도에 당황한 것은 남자였다.
“질문 없나?”
질문하지 말라더니 되레 질문거리를 묻는 건 무슨 행동이란 말인가.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는 방향까지 똑같아 누가 보면 미리 짜고 행동했다 생각할 것 같았다.
“아.”
나엘라가 선생님께 질문하는 학생처럼 손을 들었다.
“말해 보도록.”
질문할 기회까지 주다니 친절한 남자였다.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어떡해야 하나요?”
“근처 나무 사이에서 볼일을 봐라. 단 감시자가 붙는다.”
하일모라가 ‘흐에엑’ 하는 이상한 비명을 지르자 남자의 눈이 단숨에 사나워졌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
드디어 납치범의 본분을 다하는 모양이었다.
나엘라가 어쩔 수 없다며 하일모라를 툭툭 쳤다. 하일모라는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여전히 충격받은 기색이 남아 있었다.
그 뒤로 한 명, 한 명 노려보던 남자는 귀가 얼얼할 정도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 뒤로 철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감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볼일을 보라는 거야?”
하일모라는 절규하듯 양 볼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 정도까진 아닐 거야. 화장실 갈 때 다 같이 가서 감시자들과 거리를 만들자. 돌아가면서 볼일을 보면 괜찮을 거야.”
아그노멘에서 떠나올 때 나엘라는 이미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알려 주었다. 급한 용변, 잠자리 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최대한 납치범을 자극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나엘라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누군가 납치범을 화나게 할 경우 다른 이들도 그 대가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기사들도 있는 것 같아.”
“그게 뭐가 다행인데?”
“기사들은 최소한의 기사도를 지킬 테니까.”
너무 박대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다. 북부에 도착하기 전까진 고문이나 음식 같은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엘라는 다시 한번 주의할 것들을 전하고는 옷을 들춰 확인했다.
“역시… 정식 기사들이 있어서 그런지 몸수색을 안 했어.”
몸을 묶어 놓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이리라. 명색에 북부를 지키는 기사들인데 귀부인의 몸을 수색하는 짓은 생각도 안 했겠지.
남은 여정도 큰 걱정, 사고 없이 이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챙겨 온 단검은 잘 있죠?”
출발하기 전, 급하게 호신술 몇 개와 연약한 귀부인이 찌르기 좋은 급소도 몇 군데 알려 주었다. 그리고 잘 숨겨 두라고 함께 언질해 주었다. 써먹을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뭐든 대비하는 게 좋다.
물론 이왕이면 쓸 일이 없길 바라고 있다. 이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경험은 알려 주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 코르셋 안쪽에 잘 보관해 두었지.”
혹시 몸수색이라도 할까 싶어 가장 들키기 힘든 코르셋 안쪽에 넣어 둔 것이다.
나엘라가 준비해 준 단검은 크기가 매우 작아 은장도에 가까웠다. 어차피 크게 만든다 한들 손에 힘이 없는 지엘라와 하일모라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기술과 힘이 없으니 다루는 사람도 위험하고, 찔러 넣는 것 자체도 어려우리라.
하지만 넓게 베기보단 깊게 찔러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틈을 만들기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고민하던 나엘라는 결국 얇고 긴 칼날을 준비했다.
“도착해서 몸수색할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넣어 놔.”
거슬리지 않도록 천으로 잘 감싸 놓으니 배가 조금 나온 것처럼 보일 뿐 티 나진 않았다.
“도착해서가 문제야. 아마 파르로시가 고문하려 들 수도 있어.”
나엘라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분노에 찬 파르로시다.
체드란의 편지엔 황후가 파르로시에게 말한 거짓 진실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파르로시가 당한 일을 체드란의 짓으로 뒤집어씌운 거다.
그녀가 체드란에게 분노를 가진다면 그 분노는 자연히 나엘라에게도 이어질 터. 지엘라 또한 파르로시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분노의 여파가 미칠 가능성이 컸다.
더는 눈에 뵈는 게 없을 파르로시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리고 황후가 우리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그 전에 해상 제독을 만나 담판을 지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파르로시 황녀가 바보도 아니고 황후의 말을 믿을까?”
“일단은 믿는다고 가정하고 생각해야지. 안 믿는다고 가정하면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이 안 돼.”
곰곰이 생각하던 지엘라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파르로시와는 별로 접점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황후를 따라다니던 것과 교양 없는 망아지처럼 굴었다는 것? 그녀가 어떻게 대응할지 잘 모르겠네요.”
황후라면 조금이나마 예측이 가능하지만, 파르로시가 문제다. 자신에게 닥친 현실 앞에서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일어난 일이 쉬이 감당할 만한 상처가 아니니까.
“나엘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녀에게 절대 연민을 갖지 마.”
하일모라의 얼굴이 전에 없이 단호했다.
“대공령에서 파르로시는 이미 한 번 너를 납치하려 했고, 너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짓을 하려 했어. 나는 그녀가 행한 만큼 돌려받았다고 생각해.”
맞다, 그런 일도 있었지.
파르로시가 당한 것을 나엘라도 당할 뻔했었다. 새삼 잊고 있던 것은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하일모라는 덜컹거리는 소리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곧 마차 문이 열리며 그녀들의 앞에 그릇 세 개와 빵 한 덩어리가 던져졌다.
“점심 식사다.”
음식을 놓자마자 바로 문은 닫혔다. 채소만 가득 들어 있는 수프와 딱딱해 보이는 빵 한 덩어리.
“고기가 없네….”
나엘라는 점심이라고 가져온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무거나 잘 먹긴 하지만 요즘은 특히나 잘 먹고 지내서 그런가.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아, 선 넘네…?”
*
파르로시는 해안가 너머 펼쳐져 있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파도가 철썩거리며 밀려오고 또 같은 속도로 밀려 나가기를 반복했다.
평생을 살면서 이리 한가로이 풍경이나 바라보며 살았던 때가 있었나.
돌아보면 항상 어머니의 시선을 못 이겨 전전긍긍하던 나날이었다. 어떤 패악질을 부려도 어머니의 앞에 서면 가장 작은 생명체가 된 것 같았다.
“좋은 눈빛이군요.”
난데없는 목소리의 등장에도 파르로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곳의 주인인 자가 못 갈 곳이 어디 있을까.
2층 복도 중간 휴게실과 이어진 이 테라스에도 이 자라면 못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대공비 납치에 성공하여 이곳으로 오고 있답니다. 그들은 이곳과 좀 떨어진 곳에 감금될 겁니다.”
어머니의 계획이 성공한 모양이었다. 아마 지금쯤 환히 웃고 계시지 않을까.
인질을 빌미로 노헤스카와 마호세르디를 본격적으로 압박할 생각에 신이 났을 것이다.
“체드란 대공이 어떻게 나왔을 것 같습니까?”
무시할 수 없는 이름에 몸이 잠깐 움찔했지만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는군요. 황제도 그들을 말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뭐가 재밌는지 그는 킬킬 웃었다.
“아마 황후 마마의 세력들은 벌벌 떨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이리 발 빠르게 움직일 거란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심지어 귀족 회의에서 마호세르디 공작을 공격했던 자들은 각자 저택에서 칩거 중이랍니다. 갑자기 아프다나 뭐라나.”
가벼운 어투로 들려주는 정보들은 쉽게 알 수 없는 것들만 가득했다. 행동이나 말은 가벼워 보여도 속내는 그렇지 않은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론 경은 몸을 회복 중입니다. 며칠 뒤엔 수도로 돌아간다는군요.”
파르로시의 눈동자가 단숨에 불타오르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에스토 시론은 어머니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 한스럽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참 좋은 눈빛입니다, 황녀님.”
남자가 그녀를 마주 보며 온 얼굴에 환한 미소를 한가득 걸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웃음기조차 없이 섬뜩하게 빛났다.
“저는 개인적으로 황녀님이 더 나락에 떨어지기를 바랍니다. 재밌는 것 하나 없던 차였는데, 요즘은 하루하루가 기대되고 있어서요.”
이 남자 또한 비정상적으로 비틀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중요한 것은 제 뜻을 이뤄 줄 것인가 아닌가였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때까지 계속 질문해 놓고 또 무엇이 궁금한지 모르겠다.
“며칠 뒤엔 대공비가 옵니다. 황녀님은 대공비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 남자는 나엘라에 대해 무지했다. 그녀는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연약한 귀부인 따위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문을 막을 만큼 남다른 사람이었다.
파르로시는 남자의 웃음을 따라 환히 미소 지었다. 눈동자는 조금도 웃지 않는 그런 웃음이었다.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어요.”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요.”
“그중 한 명이란 건 변함이 없죠.”
“황후 마마께서는 자결하지 않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남자의 말은 곧 파르로시가 당한 일을 대공비가 겪을 순 없다는 말이었다. 잘못하다 그녀가 자결이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하지만 나엘라를 아는 파르로시는 고개를 저었다.
“쉽게 자결 따위를 선택할 여자가 아닙니다.”
“그래요?”
남자의 얼굴이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에게 제가 당한 것의 몇 배를 돌려줄 겁니다. 절대 쉽게 살려 두지 않을 거예요.”
“그럴 힘은 있으시고요?”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할 겁니다.”
어머니가 한 행동을 자신이라고 못 할 리가 없다고 파르로시는 생각했다.
남자는 뭐가 또 좋은지 낄낄 웃었다.
“패기는 좋지만요, 황녀님. 저는 주제도 모르면서 멍청하기까지 한 이들을 가장 혐오합니다.”
파르로시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자 남자는 여흥이 식었다는 듯 등을 돌리곤 발걸음을 옮겼다. 테라스를 빠져나가면서도 마지막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황녀님의 소원을 이뤄 줄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말이죠.”
남자의 웃음소리가 귀에 맴맴 돌아 거슬렸다.
“아! 물론 저는 아닙니다. 저는 들어드릴 생각이 없어서.”
낄낄낄, 그 웃음소리에 파르로시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