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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26)화 (126/220)

125화

벌써 나흘째.

나엘라는 고기의 기역자도 보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녀는 식사를 갖다 주러 온 남자를 붙잡았다.

“내가 사냥을 해오겠네. 나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멧돼지, 사슴, 토끼도 손질할 수 있다네.”

남자는 머리가 다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안 된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그대가 무슨 짐승을 사냥해오나?”

“대체 왜 못 믿는가.”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그대들은 마차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여러 번 반복된 말싸움은 결국 도돌이표였다.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나엘라도 혹시나 싶어 찔러보고 있었다. 이들의 태도가 그리 강압적이지 않고 미온하니 하는 말이었다.

“이런 풀만 먹고 어찌 살라는 말인가.”

결국, 남자는 오늘도 마차 문을 닫으며 대화를 단절시켰다.

시무룩해진 나엘라가 그릇을 들고 수프를 마시기 시작했다. 고기가 없다고 먹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조건 먹어둬 체력을 유지해야 했다.

“나엘라… 네가 납치범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라며….”

반항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던 나엘라가 가장 불만이 많으니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흘째 고기의 흔적도 못 봤어. 저들은 사냥해서 먹고 있다고. 분명 고기 냄새가 났어.”

개코도 이런 개코가 없었다. 기사들이 모여 고기 먹는 냄새까지 솔솔 흘러들어와 나엘라는 더 괴로웠다.

“일단 진정하고 빵이라도 먹어.”

알맞게 3등분 한 빵을 나엘라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래도 그녀가 계속 고기를 달라 요청한 덕인지 빵은 한 덩이씩 더 지급받았다. 아마 식탐 많은 귀부인으로 보고 있지 않을까.

“고기 먹고 싶다. 고기.”

이런 불평은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알고 있다. 반쯤은 긴장을 내려놓고 장난으로 하는 말임을 다른 이들도 알았다.

“북부에는 해산물이 빠지지 않고 식탁으로 올라온다죠? 너무 먹어서 질릴 정도랍니다.”

나엘라의 얼굴에 겨우 혈색이 돌았다. 납치된 마당에 해산물을 줄까 싶지만, 그리 많다면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밥보다 해산물이 넘쳐 난다면 해산물을 밥으로 줄 수도?

나엘라의 표정이 금세 편안해지자 하일모라는 혀를 찼다.

“넌 참 속도 좋다.”

어려운 결정을 내린 그들은 어떤 의미에선 안정을 주었다. 나엘라가 긴장감 없이 구니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나엘라의 천연덕스러움 덕에 불안이 커지지 않는 것이다.

더불어 이 둘은 기사 시절의 나엘라를 본 이들이 아닌가. 나엘라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우리 남편은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일모라는 제 걱정 대신 세레노피 백작의 걱정을 했다.

“백작은 너 없이 밥도 못 먹어?”

“잠은 혼자 잘 자고 있을까? 내 걱정으로 잠도 못 자고 있으면 어쩌지?”

“이럴 때일수록 언제 뛰쳐나가야 할지 모르니 체력 회복은 기본이지. 그런 기본조차 모르는 사람일 리가.”

결국 하일모라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나엘라도 눈을 크게 뜨며 맞대응했다.

“누군 남편 없는 줄 알아?”

“그럼 대공 전하는 뭐 하고 계실 것 같은데?”

“작전 짜고 있겠지. 내 욕하면서 관자놀이 문지르고 있을걸?”

“그건 좋은 얘기가 아닌데……?”

“그래도 사고 뒷수습만큼은 체드란을 따라올 자가 없어.”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들로 하일모라의 의욕을 꺾어 놓은 나엘라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왜 저리 당당한지 알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지엘라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는 남편이 있다가 없어졌네요.”

순식간에 마차 안으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누구도 지엘라를 이길 수 없었다.

가만히 지엘라의 눈치를 보던 하일모라가 용기 내 물었다.

“그동안은 묻지 않았는데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어요.”

“뭐를요?”

“결혼 생활, 많이 힘들었어요?”

지엘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웃음기를 머금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수프 그릇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어디를 가나 제국의 황족은 함부로 건들지 못합니다. 그게 여자라도 말이죠.”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꼽는 곳이 제국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결혼 생활 중 합당한 이유를 대고 귀국을 요청한다면 단번에 외교 문제로 불거질 터다.

“그래서 내 남편이 택한 것은 은근한 조롱과 무시, 투명 인간 취급이었어요.”

요반나의 나이 많은 왕족에게 시집을 간 그녀는 그곳에서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거기다 왕족이 죽으면 그 지위는 더 공고해진다. 나이는 어리나 그 가문의 큰 어른이 되어 버리니 주변 이들도 환대하는 이가 없었다.

아무도 말을 거는 이가 없고,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그곳에서 냉대를 받으며 몇 년을 버텼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스스로 말라 갔다. 어느새 지엘라는 남편이 빨리 죽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실망한 뒤론 그저 마호세르디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 버텨 왔다.

“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설레던지,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차라리 크게 다쳐서 몇 달은 움직일 수 없게 되면 계속 여기에서 지낼 수 있을 텐데.”

하나 헛된 꿈인 걸 알았다. 어차피 황실에 갇혀 있을 터라 무슨 상관인가 싶어졌다. 이제는 옛날처럼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지엘라를 하일모라가 끌어안아 주었다.

“이제 괜찮아요. 나엘라가 지켜 줄 거예요. 저도 곁에 있을게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요.”

나엘라는 이럴 때 하일모라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가 위로에 약한 만큼 그녀의 아픔을 다독여 줄 사람으론 하일모라가 제격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어떤 말을 얹기보다 하일모라처럼 지엘라를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저도, 체드란도, 이제는 지엘라 부인을 보내지 않을 겁니다.”

지엘라도 천천히 고개 숙여 품에 기댔다.

“이제는 저도 믿으려고요. 욕심인 거 알지만… 그래도 바라볼게요.”

더 큰 것을 욕심내는 게 아니라 그저 제국에 있을 수 있다면 바람은 충족되었다.

가끔가다 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래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게 황후든 황제든.

그 순간 덜컹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그릇을 가지러 온 남자가 끌어안고 있는 세 사람을 보고 굳어졌다.

“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린 하일모라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나름 변명을 덧붙였다.

“비록 납치됐지만 잘 도망가 보자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마차 안에는 고요함만이 가득 내려앉았다.

*

납치된 지 엿새째.

하일모라의 발언에 분노한 남자가 감시 인력을 늘리며 볼일도 제대로 못 보게 했다.

모든 일의 원흉인 하일모라는 여전히 분개하며 불만을 쏟아 냈다.

“납치된 여자 셋이 얼싸안고 할 말이 뭐가 있겠어. 나는 그냥 어색해지지 않으려 그럴듯한 말을 했을 뿐이라고! 쪼잔한 남자 같으니!”

그사이 나엘라는 볼일을 볼 때면 마차의 오른쪽 방향으로만 움직였다. 나갈 수 있을 때라곤 그때뿐이라 방향을 고집하여 지안과 제니에게 신호를 준 것이다.

다행히 그녀들이 놓고 간 표식을 확인했고 북쪽으로 향하는 중이며 해상 제독의 기사가 맞다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어디 씹다 뱉은 젤리처럼 생겨서 말이야.”

하일모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차 문이 열리며 분노에 가득 찬 남자가 나타났다.

“씹다 뱉은 젤리처럼 생겨서 미안하군.”

또 한 번 자신의 입방정이 사고를 쳤다는 걸 직감한 하일모라는 바로 두 손을 모았다. 작은 짐마차에 갇혀 있으니 처세술이 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거짓말이죠. 저는 밥 주는 사람을 절대 그리 생각한 적 없어요.”

“미안하게도 오늘 저녁부터 밥은 없다.”

“예에?”

하일모라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곤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걸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한 발짝 다가왔다.

“두 번 다시 그렇게 말하지 않을게요. 제 눈에는 남편 다음으로 세상 제일 잘생겼어요! 한 번만 믿어 주세요!”

밥이 뭐라고 양심까지 팔아 버린 하일모라는 눈물을 머금는 신기술까지 선보였다. 얼마나 실력이 대단한지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저녁 식사할 시간이 없다. 자정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거다.”

“아… 저희만 못 먹는 게 아니고 다 같이 안 먹는 거예요?”

“그래.”

하일모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남자에게서 살며시 떨어졌다. 눈물을 닦고 옷을 탁탁 터는 태도에 남자는 혈압이 오르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마차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셋은 눈빛을 교환했다.

“벌써 해상 제독의 영지로 들어온 모양이네?”

“그러게. 아마 영주의 저택과 꽤 가까운 곳이 아닐까 싶어. 멀면 파르로시가 오가기 불편할 테니까.”

그러니 길이 험하지 않으면서 비교적 짧은 거리일 것이다.

인질들을 좋은 저택에 가둘 리 없다. 그녀들이 지낼 곳에서 파르로시는 함께 머물지 않을 거다.

파르로시는 제독의 저택에 머물 확률이 가장 높지만 혹시 모르니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두었다.

“일단 좀 쉬자. 지금부터는 체력을 비축해야 하니까 말도 많이 해서는 안 돼.”

나엘라의 말을 따라 다들 눈을 감고 쉬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좁은 마차에 셋이나 타고 있어 제대로 눕기도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버텼을까,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정차했다.

도착했나 싶어 나엘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순간 끼익하며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마차가 움직였다.

나엘라는 얼른 마차 벽에 달라붙어 그나마 큰 틈을 찾아 밖을 내다봤다.

“도착한 것 같아.”

틈 사이로 흐릿하게 건물이 보였다.

“지금부터 모두 잘 들어요.”

하일모라와 지엘라도 긴장이 되는지 표정들이 어두워졌다.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파르로시에게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는 거예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고요.”

하일모라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로시가 오늘 당장 오지는 않을 거예요. 그 틈에 지안과 제니가 근처를 확인할 예정입니다. 혹시 모를 상황이 벌어졌을 때 도주할 곳을 확보하기 위해서요.”

그 후엔 이곳의 병력을 확인할 것이다. 또한, 주변도 확인하고 도주 시 탈 말까지 구하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하루는 걸린다.

그러니 고비는 내일이다.

“만약 내일 파르로시가 온다면 딱 한 번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일단 가장 중요한 건 파르로시의 상태죠. 황후를 미워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그녀를 협박할지 회유할지가 결정되니까요.”

생각해 둔 것은 여러 가지지만 실행하려면 어쨌든 파르로시를 만나야 했다. 안 만나는 게 가장 좋을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뒤엔 무조건 해상 제독 클루아조 아이안 소공작을 만나야 합니다.”

제국에서 단 셋뿐인 공작가, 그중에서도 북부 아이안 가문의 소공작이 이번 일의 가장 핵심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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