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마차 문이 열리고 북부까지 그녀들을 끌고 왔던 남자가 나타났다. 사소하게 이 남자가 우리 식사 담당인가 궁금했으나 가장 말단이 아닐까 하고 넘겼다.
“내려라.”
남자의 말을 따라 나엘라부터 한 명씩 내렸다.
마차 밖에서 본 건물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단정한 목조 주택이었다. 2층 높이의 건물에 깨끗한 외관을 가진 것이 인질을 가두는 용도로는 안 보였다.
“따라와.”
정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택 안은 정말 일반 가정집처럼 꾸며져 있었다.
제국 중앙보다 추운 날씨 탓일까, 입구와 연결된 거실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짐승의 가죽으로 덮어 놓은 소파도 보였다.
“혹시 이제야 침대에 누워 보는 건가?”
하일모라가 작게 속삭였다.
감옥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좋은 의미로 예상외였다. 멀쩡한 가정집은 뜻밖이라 다들 안도한 눈빛을 했다. 드디어 침대에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다는 기대였다.
그러나 세 사람의 안온한 생각은 2층을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주택의 가장 끝방으로 향한 세 사람은 열린 문 안쪽으로 드러난 장면에 침음을 내뱉었다. 평상시에는 카펫으로 감춰 놓는지 오른쪽으로 반 접힌 카펫이 보였고 바닥엔 커다란 문이 자리했다.
들어 올리는 형태의 문은 누구라도 알기 쉽게 훤히 열린 채였다. 그곳에 지하실이 있었다.
“내려가.”
깊어 보이는 계단을 따라 늘어선 횃불들이 지하를 훤히 비추었다. 불빛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계단 아래엔 복도와 철창으로 막힌 감옥이 이어졌다.
“어서!”
남자의 재촉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밟았다. 한 계단씩 내려갈수록 습한 냄새가 점점 더 강해졌다.
눈속임용으로 세워진 주택이었는지 겉으로 보이는 면적보다 아래 감옥이 훨씬 커 보였다. 무슨 목적으로 지어진 건지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한 명씩 들어가.”
세 사람이 각각 떨어져 한 명씩 철장 안으로 들어가자 남자와 다른 이들이 자물쇠를 채우기 시작했다.
사람 주먹보다 큰 자물통의 모양새가 얼마나 무식해 보이는지 몰랐다. 아무래도 보통 방법으로는 절대 안 열릴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감옥 사이가 철장으로 되어 있어 서로의 모습이 다 보인다는 점이었다.
“전부 철창에서 떨어져!”
붙어 있지도 않았건만 남자는 자꾸 화를 냈다.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도 억울한데 남자는 세 사람이 뭐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솔직히 하일모라의 발언 빼고는 말도 잘 듣지 않았던가.
그래도 해야 할 일은 착실하게 해야 하니 나엘라는 손을 들어 올렸다.
“뭐야?”
“부탁이 있습니다.”
“안 돼.”
나엘라의 바로 옆에 갇혀 있던 하일모라가 엄지를 아래로 내리며 ‘우─’ 하고 야유했다.
“좋다. 듣기만 하지.”
나엘라는 좋은 사실 하나를 알았다. 남자가 의외로 줏대가 없다는 사실이다.
“면회를 요청해도 되나요?”
“뭐?”
어느 나라 법에 납치된 자가 면회를 요청한단 말인가. 남자의 표정에 딱 그렇게 쓰여 있었다.
어디 모자란 것은 아닌지, 자신들의 처지를 잊은 것은 아닌지 그런 의심을 떠올린 것 같았다.
“제가 면회인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면회인이란 표현이 맞긴 할까. 사실 나엘라는 납치당한 상태니 납치범이란 표현이 더 정확할 터다.
“아이안 소공작에게 궁금한 게 있으니 오라고 전해 주세요.”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우리보곤 철창에 달라붙지 말라던 사람은 어딜 갔는지 본인이 철창을 붙잡고 화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떻게 알았지? 똑바로 말하라. 누가 말해 줬어?”
나엘라는 남자의 태도를 보며 착잡해졌다. 이 남자 정말 괜찮은 걸까….
“공기가 차갑길래 북부겠거니 했어요. 그래서 얼굴이나 볼 겸 불러 달라 한 건데… 설마 납치범이 소공작이었어요?”
제 입으로 술술 실토하는 남자를 보며 하일모라는 안쓰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남자는 굳어져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저 아이안 소공작을 불러 달라는 말에 제 입으로 납치범을 유추할 수 있는 말을 내뱉은 셈이니 보통 실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는지 금세 표정을 정리하고 진중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 식으로 넘어가려 하지 마라. 뭔가 알고 있으니 그 이름을 꺼냈겠지. 아는 것을 다 말해야 할 것이다.”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동안은 말을 짧게 하거나 가벼운 어투로만 대했기에 최대한 기사인 것을 감추려는 티가 났었다.
하나 지금의 대화로 제 정체를 감출 생각을 버린 것 같았다. 그가 기사로서 대화하겠다면 나엘라도 응당 대공비로서 답할 뿐이었다.
“한낱 기사 따위가 웃어른들의 대화에 끼려 해서 되겠는가.”
나엘라는 지금까지 내비쳤던 장난스러운 표정을 모두 지워 냈다. 천천히 다가가자 기사의 눈빛이 더욱 어둡게 침잠했다.
한순간에 바뀐 나엘라를 파악하고자 함인지 기사는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엘라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나엘라는 철장 앞에 서서 그를 응시했다.
“네 주인에게 가서 전하라. 나엘라 노헤스카 대공비가 기다리고 있다고.”
얌전히 잡혀 와 줬으니 소득은 있어야지.
나엘라는 허리를 펴고 턱을 살짝 들어 올려 그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오래 기다릴 생각이 없다고도 전하도록.”
이 말을 전해 들은 소공작이 어찌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경각심이 생기면 감시 인원이 늘어날 테고 좋은 대접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그러나 나엘라는 소공작이 찾아오리라 확신했다. 이중 첩자를 할 정도로 배포가 크고 머리를 잘 굴리는 자라면 그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올 터다.
나엘라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곰팡이가 핀 나무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더는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의사를 알아들은 건지 한참을 바라보기만 하던 남자가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 뒤로 문이 쾅 닫히는 소리까지 들리자 적막한 공기만 내려앉았다.
“그런데 나엘라.”
하일모라가 후다닥 나엘라 쪽의 철창으로 다가와 매달렸다.
“그거 알아? 소공작 잘생겼대.”
그 옆 칸에 있는 지엘라도 한마디를 보탰다.
“어렸을 때 황실 파티에서 봤었는데, 얼굴은 반반했습니다.”
의외의 정보였다. 그들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보였으나 나엘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젠간 쓸 곳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지안이랑 제니와 어떻게 연락할 거야? 여긴 지하라서 창문 하나 없는데?”
“이런 일에 관해선 전문가들이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들은 첩지를 전달하고 암호 표식을 전달하는 것에 관해선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테니 믿고 있으면 되었다.
“밥 속에 쪽지라도 숨겨 두는 건가?”
“어떤 방법을 쓸지는 나도 몰라.”
하일모라도 비밀스럽게 남기는 연락 방법에 관심이 생긴 걸까.
개략적인 방법이라도 알려 줄까 고심하던 나엘라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드는 하일모라의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쪽지 하니까 생각났는데 베르에티의 그림 쪽지 기억나?”
눈 코 입이 있는 동그라미, 네모난 상자를 가로지르는 구불거리는 선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애벌레, 그리고 여러 동그라미와 겹쳐져 있는 기하학적인 문양이었던가?
네 개의 그림을 떠올린 나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파르로시가 황후의 계략에 강제 결혼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페렌츠로 향한다’라는 뜻이었대.”
“그림 네 개에 그렇게 긴 뜻이 있다고?”
“응. 그렇다는데?”
세상은 넓고 신기한 사람은 참 많았다.
*
차를 들어 향을 음미하던 클루아조 아이안은 노크 소리에 확 인상을 썼다. 지금 손님과 다정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데 감히 누가 방해를 한단 말인가.
물론 자정이 넘은 이 야심한 시각에 손님이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긴 어렵겠지만 말이다.
“무엇이냐.”
“소코웨 경이 복귀했습니다. 보고를 드리겠다고 하는데요.”
시종이 전해 온 내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클루아조는 앞에 있는 이에게 양해의 미소를 짓고는 들어오라 일렀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남자는 앉아 있는 손님 때문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천천히 클루아조에게 다가갔다.
“방금 복귀했습니다.”
“고생했네.”
보고를 하려던 남자는 바로 옆에 자리한 손님 때문에 난처한 표정이었다. 클루아조는 과장된 제스처로 손님을 깜박했다며 손을 흔들었다.
“이것 참, 보고는 들어야 하고 손님과 대화도 해야 하고. 바쁘군.”
그러더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 몇 초 되지도 않아 다시 눈을 뜬 그는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며 앞에 있는 이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시론 경은 노헤스카 대공비와 친구라 했던 것 같은데?”
에스토는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찻잔을 내려보다 고개를 들었다. 클루아조의 저의가 뭐든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럼 얼굴이라도 잠깐 보게 해 줄 수 있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 이자가 조금 전 대공비를 납치해 왔으니 하는 말일세.”
에스토의 시선이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향하더니 위아래를 훑었다. 그 시선이 못내 불쾌해 소코웨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제야 에스토가 고개를 돌렸다.
“대공비가 반항 없이 왔나 보군요.”
“수면향을 썼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오는 내내 수면향을 썼습니까?”
클루아조도 그것까지는 알 수 없어 소코웨를 바라보았다.
“이동 중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에스토에겐 그걸로 답이 되었다.
“팔다리가 멀쩡한 것을 보니 그녀가 오고 싶어서 온 겁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남자는 팔다리가 부러졌거나 이미 죽었어야 마땅했다. 일반 기사야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그녀니까.
에스토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클루아조가 심심하다며 그를 붙잡고 있던 거였다.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편히 보고 들으십시오.”
북부에 도착한 뒤로 한 번도 웃지 않은 에스토는 여전히 차가운 낯빛이었다. 부상이 다 낫지 않았지만 흐트러짐 없이 인사를 하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클루아조도 딱히 붙잡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서려던 에스토는 그를 위해 경고를 남겼다.
“대공비를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필시 크게 당할 겁니다.”
할 말은 그게 다라는 듯 에스토는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던 클루아조는 특유의 낄낄거리는 웃음을 내뱉었다.
“신기하네. 벌써 대공비에 대한 경고를 두 번이나 받았잖아.”
파르로시에게 한 번, 에스토에게 한 번. 꽤 만만찮은 여자인 모양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웃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대공비께서… 아니 인질이….”
“음?”
소코웨는 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인질이 소공작님을 뵙고자 합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겠다고….”
“하?”
클루아조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