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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28)화 (128/220)

127화

나엘라는 모포 한 장 올려져 있는 나무 침대에서 번쩍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지하라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배꼽시계다.

“지금은 아침 7시 반이야.”

말을 하고도 살짝 불안한 감은 있었다. 요 며칠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배꼽시계가 고장 났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는 탓이다.

혹시나 식사량이 줄었거나 밥과 밥 사이의 체감 시간이 길어졌을 수도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니 또 열이 받았다.

저녁을 건너뛰고 계속 달려 아곳에 가둬 놓고는 끝까지 밥을 안 줬다. 거기다 아직 아침도 주지 않아 화가 차올랐다.

훈련 중이었다면 차라리 산짐승이라도 잡아먹었을 텐데. 살고자 하면 밖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이곳은 쥐새끼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았다.

결국 갇혀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인 셈이다.

“으음, 몇 시라고?”

비척비척 일어난 하일모라가 눈가를 비볐다. 침대에서 자길 바랐으나 이런 나무 널빤지 위는 아니었다. 이불도 없이 모포만 덮고 자려니 죽을 맛이었다.

“7시 반이라네요.”

지엘라는 벌써 일어난 건지 손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고 있었다.

“우와, 다들 안 불편한가 봐. 나만 제대로 못 잔 건가.”

눕자마자 잠에 빠져 나엘라가 부르는 것도 못 들은 사람이 딴소리를 했다. 나엘라가 보기엔 간밤에 제일 잘 잔 것은 하일모라였다.

“설마 아침도 안 주진 않겠지?”

다행히 아침은 주려는지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는 소리와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보는 얼굴의 두 남자가 그릇을 가져와 각 철창 밑으로 넣어 주었다.

“아침이다.”

그릇에 담긴 건 온갖 해산물이 들어간 수프였다. 부실하다곤 할 수 없는 것이 해산물의 양이 많은 데다 매운 고추도 보였다.

얼큰한 수프의 냄새만으로도 나엘라는 알 것 같았다. 이건 분명 해장용 수프다. 그녀들을 여기에 가둬 두고, 위에선 술판을 벌인 게 틀림없다.

예상에 쐐기라도 박듯 남자들에게서 은은한 술 냄새가 났다. 전날 밤의 파티가 눈에 훤해 나엘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의 기분이 어떻든 남자들은 군말 없이 술 냄새만 남기곤 돌아섰다.

아침을 넣어 준 이들이 감옥을 빠져나가자 나엘라는 수프 그릇을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감시하는 사람들은 전부 새로 보는 사람들일 거야.”

저녁을 거른 탓인지 수프 하나뿐임에도 맛있게 먹고 있던 하일모라가 고개를 돌렸다.

“왜?”

“어제 술을 먹었다는 건 인원이 교체된다는 거지. 자유분방하고 체계 없는 용병들도 아니니 할 일을 내팽개쳐 놓고 술을 먹진 않았을 거고, 오래 이동했으니 그들도 지쳤겠지. 그런 자들로 감시 인원을 세우면 효율이 낮아.”

차라리 그들이 계속 감시를 했다면 몸에 피로가 쌓였을 테니 지안과 제니가 파고들 틈도 더 있었을 텐데. 새로운 사람들이 온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대화를 못 따라가겠네. 술을 먹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지엘라 부인은 알고 있었어요?”

“저도 몰랐어요. 대공비께선 참 신기하네요.”

“난 또 잠든 사이에 취객이라도 내려왔나 했어요.”

그나마 나엘라의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해산물 정도였다.

북부는 해산물이 남아돈다더니 정말인 걸까. 어쩌면 이곳에 있는 내내 식사에 해산물이 올라올지도 모르겠다.

수프로 허기를 달랜 나엘라는 다시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눈을 감았다.

점심에는 밥을 더 많이 달라고 해 봐야겠다.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부탁은 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해산물이라도 든든히 먹어야 나중에 힘을 쓸 수 있었다.

*

점심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문이 또 열렸다.

계속 눈을 감고 있던 나엘라는 남자들의 군화 소리 사이로 파고든 구두 소리에 일어나야 했다. 별로 안 보고 싶던 이의 등장이 분명했다.

지엘라와 하일모라도 어떤 감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었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또각또각, 여자의 하이힐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곧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보니까 느낌이 남다르네.”

다시 본 파르로시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늘 고집하던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레이스도, 무늬도 하나 없는 어두운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길게 기르던 손톱도 짧게 자르고, 표독스럽게 치켜뜨던 눈 대신 입술 한쪽만 비틀어 올린 채였다.

“다들 내가 올 줄 알았나 봐. 아무도 놀라질 않네.”

문제는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기사들이었다. 깔끔하게 제복으로 맞춰 입었으나 소속을 나타내는 문장이 없었다. 신분을 특정할 수 없을 만큼 외형도 각양각색이었다.

눈으로 그들을 대충 훑은 나엘라는 파르로시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곳에서 황녀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실종되셨다고 들었는데, 범인이 북부 사람인가 봅니다.”

“지겨워.”

황실 예법에 따라 돌려 욕하던 나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파르로시의 눈동자에 예사롭지 않은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분노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허하고, 끓어오르면서도 한없이 차가워 보였다.

모든 걸 부수고 싶어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딴 말투도 지겹고, 앞에선 웃으며 뒤에선 칼을 꽂는 역겨운 사람들도 지겨워.”

나엘라는 연신 그녀의 상태를 파악하려 주의 깊게 살폈다. 황후와 어떤 사이인지를 알아야 다음이 쉬울 것 같았다.

“나를 멍청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지겨워.”

뭐가 그리 지겨울까.

지친 것과 지겨운 것은 엄연히 다른 감정이다.

하나 그 차이를 못 느낄 만큼 파르로시는 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감정을 불태우고 누군가를 원망하고만 있었던 듯했다.

“그래서 나도 참지 않기로 했어.”

그녀의 말은 어딘지 어긋나 있었다.

“매번 나만 당할 순 없잖아.”

파르로시가 손짓하자 뒤따라온 기사 중 두 사람이 움직였다. 당연히 자신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던 나엘라는 다급하게 철창에 달라붙었다.

기사들이 하일모라의 철창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야.”

“말했잖아. 매번 나만 당할 순 없다고.”

철컹, 자물쇠가 풀리고 철창이 열렸다. 놀라 뒷걸음치던 하일모라는 기사들에게 양팔을 붙잡혔다.

“너희들은 절대 몰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세레노피 부인은 죄가 없잖아.”

“하지만 나처럼 살지는 않았잖아. 걱정하지 마. 세레노피 부인이 시작이니까.”

끌려 나온 하일모라는 불안으로 가득 차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엘라는 연신 하일모라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 제발 그녀가 당부했던 것을 잊지 않았길, 기억해 내길 바랐다.

“왜? 걱정돼?”

파르로시가 웃음을 흘렸다. 나엘라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그녀가 나엘라를 향해 다가왔다.

“누가 그러더라고. 제일 먼저 주변 사람들부터 건드리라고.”

누군가 파르로시에게 조언을 했나? 이곳으로 오기 전에?

“똑똑히 들어. 세레노피 부인이 이렇게 된 건 모두 네 탓이야.”

누가 무엇을 권했든 그 방법이 저속하기 그지없었다. 주변인을 건드려 나엘라에게 죄책감을 심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잘못된 방법을 전해 줬네.”

“그건 해 봐야 알겠지.”

나엘라는 숨을 고르고 머리를 굴렸다.

하일모라가 다쳐도 타격이 없다는 것을 파르로시에게 주지시켜야 한다. 동시에 파르로시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린 후 하일모라가 움직일 시간을 줘야 했다.

“그럼 네가 그렇게 된 건 누구 탓인데?”

나엘라는 그녀를 붙잡아 두기 위해 심기를 건드렸다.

“황후에게 맞은 건 누구의 잘못이야? 모두 너를 멍청하게 바라보는 건 누구의 잘못이야?”

“미쳤구나.”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지. 네가 피해자라고 세상 사람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고 싶은 거야?”

파르로시야말로 황후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정말 피해자라면 복수의 칼날은 가해자인 황후에게로 향해야만 했다.

“황후를 건드리긴 무서워서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사람들을 건드는 거야?”

파르로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꽉 쥔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겨우 이런 말로 흔들린다면 파르로시는 절대 황후를 이길 수 없다.

“너도 황후와 똑같은 사람이야. 좋겠네. 어머니를 닮아서.”

몸을 휙 돌린 그녀는 엄한 기사들에게 소리 질렀다.

“가져와!”

그녀의 비명 같은 외침이 지하를 쩌렁쩌렁 울렸다.

기사 한 명이 신속하게 채찍을 가져와 그녀에게 넘겼다. 채찍을 말아쥔 파르로시가 기사들의 손에 붙들려 있는 하일모라에게로 다가갔다.

나엘라가 다급히 외쳤다.

“하일모라!”

마음 같아서는 당부했던 것을 소리치고 싶었다.

열쇠, 만에 하나 나엘라가 아닌 다른 이들이 끌려 나가게 되면 열쇠를 던져 달라고 말했다. 아무 반항도 하지 말고 사람들을 방심시켜 딱 한 번의 기회를 노리라고.

사실 나엘라가 갇혀 있는 이상 그 방법 외에는 없었다. 평범한 귀부인인 그녀가 남자들의 완력을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일모라를 믿었다. 기회는 빠르든 늦든 분명히 올 것이다.

방금 철창을 열었던 자가 열쇠 꾸러미를 아직 손에 쥐고 있었다.

“똑같이 만들어 줄 거야. 어머니도, 너희들도, 다른 사람들도.”

파르로시가 채찍을 말아 쥐자 기사들이 하일모라의 팔을 놓고 옆으로 물러났다.

“너희들도 나처럼 한 번 빌어 봐. 그리고 끝나지 않을 지옥을 느껴 봐.”

손이 번쩍 들어 올려지고,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짜악─.

“아악─!”

팔로 얼굴을 가린 하일모라가 땅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그녀의 몸 위로 다시 한번 채찍이 달려들었다.

짝─.

나엘라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일모라가 언제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묶여 있지 않다는 거였다.

“너희도…!”

짜악─, 채찍질에 도톰한 하일모라의 옷이 찢어지고 있었다.

“다 똑같아…!”

쫘아악─, 한 번 더 내리쳐진 채찍이 다시 위를 향했을 때 나엘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는 황후와 달라. 그런데 너는 황후와 똑같아. 더럽고 역겹고 추잡해.”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뚝 멈췄다.

“너도 언제나 피해자인 적 없었어. 너도 네 하녀에게 똑같이 굴었잖아.”

파르로시의 얼굴이 천천히 나엘라 쪽으로 향하려는 순간,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던 하일모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일모라는 흐트러진 하늘색 머리카락 사이로 같은 색의 눈을 불태우고 있었다.

“나는 황녀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 있었잖아요.”

나엘라는 철창을 꽉 붙잡았다. 하일모라는 지금 파르로시를 자극하려 하고 있었다.

“꼭 해 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지엘라 역시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철창을 두드리며 애타게 하일모라를 불렀다.

후회가 고개를 치밀었다. 나엘라의 머릿속에는 아그노멘에서 나눴던 대화만 맴맴 돌았다.

하일모라와 지엘라를 데려오지 말걸, 아니면 북부로 오는 중간에 둘만이라도 도망가게 할걸.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심한 건 자신이었다.

“징징거리지 말고 네 엄마랑 같이 지옥으로 떨어져, 쓰레기야.”

채찍을 던져 버린 파르로시가 하일모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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